맑은물의 이야기/자연을 찾아서

[스크랩] 영주 무섬마을

맑은물56 2012. 3. 14. 08:40




 

십리라 푸른 강물, 밟고 간 자취는 바람이 밀어가고
     영주 무섬마을 외나무다리

영주=글·사진 이성원기자

 

 
 

무섬마을 처녀(김 난희)와 결혼한 조지훈은 처가 마을을

서정적으로 그린 '별리'란 시를 남겼다. 무섬마을을 찾은

한 가족이 외나무다리를 건너고 있다.

장에 다녀온 할머니가 버스에서 내리자 마중 나온 할아버지 가 짐을 나눠 들고는 무섬마을 고샅길을 따라 집에가고 있다

 

 

 

무 섬 海 愚 堂 전 경



    눈부시게 하얀 백사장, 흐르는 듯 멈춰진 듯한 강물 위로 외나무다리가 길게 가로질렀다. 기와와 초가지붕을 한 마을을 뒤로하고 기우뚱 기우뚱 외나무다리를 건넌다. 강을 건너고 마을을 건너고 수백년의 시간을 건너는 행복한 걸음이다. 경북 영주의 무섬마을 외나무다리 이야기다. 느릿느릿 흐르는 낙동강변엔 유독 물돌이동 마을이 많다. 안동의 하회, 예천의 회룡포처럼 무섬마을도 강물이 마을을 감싸는 마을이다. 부석사에서 흘러내린 내성천과 순흥 소수서원에서 내려온 서천이 무섬마을 직전에서 만나 오메가 모양으로 마을을 휘돈다. 약 340도 마을을 감싼 물줄기는 동그라미가 거의 완성 되기 직전 방향을 틀어버린다.황무지였던 이곳에 사람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건 1666년부터다. 강 건너 머럼마을에 살던 박수라는 이가 처음 들어왔고 이후 그의 증손 사위인 김대가 들어와 일가를 이루었다. 지금 마을은 이렇게 반남 박씨와 선성 김씨 두 성씨가 어우러져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물 안에 갇힌 섬 같다고 해서 무섬마을이다. 한자 지명도 수도리(水島里)다. 한때 120여 가구 5,000여명이 북적대던 마을은 이제 24가구 40여명이 지키고 있다. 물돌이말고도 마을의 지세는 무척이나 흥미롭다. 마을로 뻗어내린 산줄기는 태백산에서 연유한다. 그리고 강 건너에서 마을을 감싸고 있는 능선들은 소백산 자락들이다. 양기의 태백을 음기의 소백이 포근히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마을 안의 40여호 되는 건물은 8채의 양옥을 제외하곤 모두 기와 아니면 초가의 전통가옥이다. 양옥도 조만간 전통가옥으로 다시 지어진다. 이 마을엔 특이하게도 농토가 하나도 없다.농지도 없고 물에 갇힌 마을이지만 한때 영주에서 알아주는 부촌이었다. 강 건너 학가산 밑까지 30리가 다 무섬마을 사람들의 땅이었고, 천석꾼이 마을에 여덟 집이나 있었다고 한다.지금은 1983년 놓인 수도교로 버스가 집 앞까지 들어오지만 그 전 마을과 강 건너를 연결하는 수단은 외나무다리뿐이었다. 당시 마을의 외나무다리는 3개였다. 상류에 있던 다리는 영주로 장을 보러 갈 때, 가운데 것은 아이들이 학교에 갈 때, 하류에 있던 것은 농사지으러 갈 때 건너던 다리다. 지금은 하류에 예전 쓰던 외나무다리를 복원해놓았다.다리는 나무벤치를 한 줄로 쭉 연결해놓은 듯한 모양이다. 통나무를 반으로 쪼갠 다리의 폭은 20㎝정도 밖에 안 되고 흔들거리기 까지 해서 걸음걸음이 조심스럽다. 이 다리를 건너 마을 주민들은 농사를 짓고 학교를 다니고 장을 보러 다녔다. 새색시의 꽃가마도 이 다리를 건너 마을로 들어왔고, 꽃상여도 이 다리를 건너 마을을 떠났다.무섬전통마을보존회 김한세 회장은 "지금의 외나무다리 정도면 고속도로"라고 했다. 예전엔 굵은 나무 구하기도 힘들어 다리의 폭은 훨씬 가늘었다. 김 회장은 "한 뼘도 안 되는 폭에 한겨울 서리라도 내리면 미끌미끌한 다리였지만 이력이 붙으면 뜀박질로 건너고, 캄캄한 밤중 술에 취했어도 물에 빠지지 않고 잘 건너 다녔다"고 했다. 학교 가기 싫은 아이들이 일부러 강물에 빠지기는 했지만 바닥은 고운 모래이고 수심도 깊지 않아 다칠 염려는 없었다.다리 중간 중간에 짧은 다리가 나란히 붙어 있다. 마주 건너던 이들이 피해 가도록 배려한 '비껴다리'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서로 길을 양보하고 때론 그곳에 걸터앉아 한담을 나누었다.무섬마을은 시인 조지훈의 처가 마을이다. 시인은 '겨먹이' '띠앗강변' 등 무섬마을과 관련된 시어를 여러 시에서 언급했고 특히 무섬마을의 경치를 서정적으로 묘사한 '별리' 라는 유명한 시를 남기기도 했다. 올곧은 마을 주민들은 일제 때에는 아도서숙 (亞島書塾)을 열어 양반 천민 할 것 없이 계몽사상을 가르치고 독립운동도 전개 했다. 작은 마을이지만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이가 5명이나 된다. 이 물돌이동 마을도 한때 사라질 뻔 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마을 뒤쪽의 은고개 부분에 물길을 직선으로 뚫으려 했다. 물길을 돌려 농지를 더 많이 확보 하겠다는 목적이었다. 기공식까지 열린 사업이었지만 주민들은 목숨을 걸고 막아 결국 철회시켰다. 마을엔 가게가 없다. 민박집도 아직 갖추질 않았다. 마을 입구에 '무섬마을 헌장'이란 간판이 서있다. 마을 보존회의 허가 없이 술을 팔거나 식당 매점을 열 수 없고 유교 윤리를 해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한다고 적혀 있다. 안동 하회마을이 안 좋게 변하는 것을 보고 안 되겠다 싶어 무섬마을 어르신들이 서둘러 정한 규약이다. 에둘러 흐르는 강물과 함께 무섬마을은 여전히 전통을 지키고 있다.

     


    별리(別離)

    - 조지훈 -
    푸른 기와 이끼 낀 지붕 너머로

    나직이 흰 구름은 피었다 지고

    두리기둥 난간에 반만 숨은 색시의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 자락에

    말 없는 슬픔이 쌓여 오느니

    십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 가는데

    밟고 간 자취는 바람이 밀어 가고

    방울 소리만 아련히

    끊질 듯 끊질 듯 고운 뫼아리

    발 돋우고 눈 들어 아득한 연봉(連峰)을 바라보나

    이미 어진 선비의 그림자는 없어

    자주 고름에 소리 없이 맺히는 이슬 방울

    이제 임이 가시고 가을이 오면

    원앙침(鴛鴦枕) 비인 자리를 무엇으로 가리울꼬

    꾀꼬리 노래하던 실버들 가지

    꺾어서 채찍 삼고 가옵신 님아

출처 : 도편수마을
글쓴이 : 하늘남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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