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으로 만들고 생명을 지키는 방짜유기 명인 이봉주 |
“농약 묻은 과일을 넣어두면 방짜유기의 색이 변해요. 결국 생명을 지키는 시약인 셈이죠” 50년이다. 굴곡이 없었을까마는 여전히 그는 공방을 지키고 있다. 굳은 살이 더께처럼 앉은 장인의 손은 또 하나의 거친 작업 도구다. 지금도 작업장을 지키는 방짜유기 중요무형문화제 이봉주. 그의 반백 년은 우리 생명을 지키는 도구를 벼른 세월이었다. 이제야 눈을 뜨기 시작한 방짜의 생명 사상! 그 불을 지켜준 이봉주 선생의 ‘봉주르 라이프’. 방짜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두드려라! 두드려라! 그래 또 두드려라… 일곱 명이 한 팀이다. 도가니에 열을 올려 동(구리)과 석(주석)을 78:22로 눈금 한 자 틀리지 않게 섞어 1,200도가 넘는 온도에 끓여 흐물흐물 녹여낸다(용해). 그렇게 만들어진 합금 덩어리가 바둑이다. 쇳물을 물판에 부으면 둥글 넓적한 성형 재료가 만들어지는데, 그 모양이 바둑알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 소나무 숯만 골라 불을 피워 다음 작업을 준비한다. 이제 네핌질. 바둑을 두드린다. 네 명이 하나가 되어 한 명은 지휘하고 세 명은 돌아가며 망치질이다. 바둑을 달궈 쳐 늘리는 게다. 바둑은 타원형의 엷은 합금 판으로 변한다. 현대 재료공학에서도 불가사의. 구리 대비 주석의 정량 합금 비율은 9:1 선인데 방짜는 주석 비율을 훌쩍 넘겨 22로 끌어당겨버렸다. 깨어지고 부서져야 할 합금은 땀방울로 쳐 늘린 장인의 손에 의해 제대로 된 합금이 된다. 수없이 이어지는 망치질로 서서히 단단한 주석은 인력에 무너진다. 패대기치듯 두드려대는 통에 주석의 입자가 잘게 부숴지고 넓게 펴지면서 촘촘하게 동에 흡착된다. 방짜의 황금 비율은 두꺼운 이론서를 뒤로하고 철저하게 선조의 경험에 의지한다. 더도 덜도 안 되고 불순한 물질도 용납해서는 안 되는, 그렇게 해야 하기에 그렇게 하는 것. 얇게 편 판은 여러 장 겹쳐져 우김질로 틀을 만든다. 네 시간을 이렇게 펴면 우묵한 그릇의 틀이 잡힌다. 이를 당기듯 치며 닥침질은 시작된다. 닥침이 끝나면 감수물에 담갔다가 내어 완제품의 모양새로 담금질이 이어진다. 감수는 놋쇠를 무르게 하며 이어진 담금질은 놋쇠의 성질을 좋게 한다. 이제 꼬이거나 비틀어진 변형을 잡아내는 벼름질이다. 그런 후 가질. 달구며 생긴 산화 피막을 깎아내 제품을 완성하는 것. 방짜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전통의 방식이라면 하루 온종일 6개 정도를 내어놓는다. 7명이 각 작업에 투입되어 6개의 예술을 만들어낸다니 허망할 따름. 물론 오늘에 와서야 풀무질과 망치질은 기계에 의지한다지만 쉽지 않은 작업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거칠어진 손은 굳은 살로 벼려져 있다. 소시적, 보통 사람은 한 손으로 들기도 힘든 약 135cm의 길이, 12kg 무게의 함잽이(집게)에 30여kg의 물건을 잡아 이리 돌리고 저리 옮겼다 하니 장인의 품새가 예사롭지 않음에 새삼 입이 벌어진다. 중요무형문화재 77호인 이봉주 선생(78)은 그렇다. 경북 문경 가은읍에 자리한 방짜 유기촌에서 만난 이봉주 선생은 여전히 작업복 차림이었다. “원래 고향 납청에 유기촌을 세우려 했는데, 나이도 있고 해서 이곳에 만든 겁니다. 아직 유기촌의 조감도대로 완성한 것은 아니지만 건물은 그만 지어야겠어요. 건물 지을 때마다 신경 쓰이는 게 너무 많아 놔서….” 포부 있게 시작한 유기촌 군락은 일일이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아 일을 제대로 못할 정도다. 원대로 고향 납청에 그의 꿈을 올리지 못한 아쉬움과 함께 방짜 장인의 토목 공사가 적성에 맞지 않은 탓도 있을 게다. 납청은 평안북도 정주에 있다. 예전과 같지 않지만 여전히 공장을 기웃거리며 작업 인부의 손놀림에 잔소리를 하는 것이 일상사인 장인에게 일 이외의 다른 위안은 없을 듯하다. 50년을 지켜온 대장장이의 모습은 여전하다. 방짜는 이렇게 지켜졌다 먹기 위해 시작한 일, 모두를 안전하게 먹이다 납청에서 30리 떨어진 시골에서 태어난 장인은 농삿일이 싫었단다. 가뭄이나 홍수가 두 해만 겹쳐도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농삿일이 시쳇말로 비전 없어 보였던 것. 농삿일이 유일한 직업이었던 시절, 유기행상을 하던 어머니와 함께 납청유기공장에 자주 들르면서 그는 그 세계에 매료됐다. 불길과 싸우는 대장장이들의 건장한 모습이 머리에서 가시지 않았다. 그의 꿈은 그렇게 커갔다. 시절이 하수상한 때였고 삼팔선이 가로 막히면서 방짜유기의 판매도 어렵게 되어 납청 방짜유기장도 월남 대열에 합류했다. 이봉주 선생 역시 고향을 떠나 서울로 왔고 1948년 납청 사람이 운영하는 후암동에 있는 양대(이 방짜유기를 ‘양대’라고 하는데, 양대는 원래 큰 그릇을 의미한다) 방짜유기공장에 들어갔다. 꿈이었고 잘할 자신이 있었으므로 사환으로 시작한 지 18개 만에 원대장(방짜 제작을 총괄 지휘하는 지위)이 되었다. 월급을 고사하고 밥 굶지 않고 한뎃잠 안 자는 걸로 감사하던 시절에 원대장장이의 하루 임금이 쌀 두 가마라는 사실도 매력이 아닐 수 없었다. 기술만 믿고 말썽 부리던 전 원대장에 비해 이봉주 선생은 술·담배도 안 하고 성실했다. 게다가 그가 만든 초기의 제품마저 사가는 상인이 생기자 주인도 믿음직스러워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원대장이 된 것이다. 다른 사람은 10년 걸려도 되기 힘들다는 자리였다. 29세 되던 1957년에는 독립하여 구로동에 공장도 세웠다. 먹고 살기 힘든 때에도 장사는 제법 잘 되었다. 그러나 인생의 굴곡은 지나칠 수 없는 듯. 사양길로 접어든 유기장이의 길도 산업의 명운과 다를 바 없었다. 땔감이 연탄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연탄이 내뿜는 일산화탄소만 닿기만 해도 그 독성으로 인해 검게 변색되는 방짜유기를 단지 귀찮다는 이유로 멀리하기 시작했다. 생활 용기로 스테인리스, 플라스틱 그릇이 활개를 쳤다. 끝내 공장을 팔 수밖에. 장인 역시 막일로 끼니를 이어야 했다. 피난 시절에 부산에서 결혼한 아내도 풀빵 장사치로 나섰다. 그렇다고 장인의 외도는 길지 않았다. 생활이 어렵다고 망치질을 멈출 수는 없는 것. 그간 모은 돈을 생활비로 아내에게 주고 다시 유기 일을 시작했다. 안양에 공장을 열고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렇게 방짜유기는 끊어질 명맥을 다잡은 것이다. 대세를 거스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일까. 그의 악다구니에도 유기는 생활 식기에서 왕따를 당했고 유명했던 장인들은 유기를 버리고 야사(野史) 속으로 사라졌다. 생활 용기가 떠난 자리를 꽹과리, 징 등의 악기가 메웠다. “70년대에는 젓가락 한 짝도 주문이 들어오지 않았어요. 징하고 꽹과리를 만들어서 생계를 이어갔지. 방짜로 만든 징이나 꽹과리는 놋 두께가 아주 고르지 않으면 좋은 소리를 내지 못해요. 쉬운 작업이 아니죠.” 악기의 소리를 제대로 내는 ‘울음잡기’의 명수인 그의 작품은 김덕수 사물놀이패도 쓰고 있다. 오직 이봉주 선생만이 놋쇠를 부여잡고 있었던 셈. 외곬수라는 이죽거림을 받을지라도 그 일을 놓을 수 없었다. 풀무질을 하면서, 우김질과 담금질을 반복하면서 하루 종일 화덕의 불길과 싸우고 나서야 청명한 소리가 영혼을 울리는 유기 하나가 완성된다. 파편이 튀어 손은 화상투성이지만 쇠를 두드려 펴서 만드는 방짜는 징, 꽹과리와 같은 타악기를 제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 남한에서 으뜸으로 쳤던 남원의 운봉 방짜는 명맥이 끊겨버렸지만 고향마저 등지고 내려온 납청방짜는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이 모두 이봉주 선생의 공이다. 방짜에 세계가 놀라다 현대 재료공학으로도 합금 기술 못 풀어 그러나 버틸 힘이 있어야 했다. 우직한 고집으로 버텨낸 방짜기술이 예술이나 전통 공예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해 버둥거린 것인데, 미국에 있는 세계 최대의 타악기 회사인 질리안사에 의해 기술력을 인정받으면서 장인의 눈에 방짜가 새롭게 들어온 것이다. 우리의 유기 기술이 선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만큼 일도 신명이 났다. 사회적인 평가도 힘을 실어주었다. 1981년 제6회 전승공예전에 입선한 이래, 각종 공예공모전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83년에는 무형문화재 제77호 방짜유기장으로 지정을 받았다. 이봉주 선생과 함께 유기 부문에서 안성의 김근수(주물), 벌교의 윤재덕(반방짜)씨가 선정된 것이다. 문화재청에서 보조금도 나오고 해서 살림 형편은 조금 나아졌단다. 그러나 행복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 같은 해 작업 도중 놋쇠 파편이 튀어 한쪽 눈을 실명했다. 장인은 장인이다. 이 불행마저 방짜 덕이라고 말한다. “방짜쇠가 아닌 다른 쇠였다면 어떻게 됐을지도 물라요. 이만한 것도 방짜에 독이 없기 때문이죠. 인체에 친화력이 좋아서 스님들 삭발할 때 사용하는 삭도도 방짜로 만든다니까요.” 새벽이 깊으면 아침이 머지 않은 법. 실명한 아버지를 대하는 아들의 눈이 달라졌다. 쇠락산업을 고수하는 고집쟁이였던 아버지가 장인이요 명인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 이 일을 계기로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 그토록 싫어하던 방짜기술을 이어받고자 쇠를 녹이고 망치질을 해댔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가업을 이어받은 아들 형근씨는 1989년에 제19회 전국공예품경진대회에서 대회 사상 최초로 유기 부분으로 대상까지 받아 아버지에 버금가는 기술력을 공인받았다. “방짜유기는 비법이 따로 없어요. 고려시대나 지금이나 구리와 주석의 합금비만 정확히 지키고 대여섯 명이 한 조가 되어 여덟 가지 공정을 착실히 밟아가면 돼요.” 왕도도 없이 그저 주어진 길대로 지치지 말고 달려가는 수밖에. 그런 끈기가 다시 방짜유기의 시대를 맞게 했다. 80년대를 지나면서 연탄불이 사라져 변색하지 않는데다 광택 없는 놋그릇은 은은한 맛이 있어 현대인의 미적 감각을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부시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그가 만든 식기가 청와대 만찬에 사용되기도 했다. 그뒤 청와대 요청에 따라 같은 형태의 식기 두 벌을 제작해놓은 상태다. 몇몇 기업에서는 외국인 초대 행사에 그의 식기를 사용해 찬사를 받기도 했단다. 이봉주 선생 역시 시대의 흐름을 읽으면서 생활 속에 방짜유기를 자리매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요즘은 문화상품이라고 티스푼이나 포크, 식기도 양이 적어진 현대인에 맞게 제작하고 있어요. 고려청자의 도자기 접시를 재현하는 등 현대인의 감각과 취향에 맞는 놋제품을 만들죠.” 방송 드라마에도 선생의 작품은 자주 등장한다. MBC 드라마 ‘상도’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대장금’에도 빼놓을 수 없는 소품이 방짜유기였다. 무상 임대도 아니고 대여료를 받고 협찬을 하는 것인데도, 방송사에서 공로상을 준다는 전언이 들어오기도 한다. 또한 다큐멘터리로 제작된 방짜의 신비는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식기의 우수함을 알려줬다 “해외 바이어도 물건을 달라고 오더라고요. 그런데 11만~2만 개 주문을 받아도 처리할 수 있는 양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절할 수밖에 없어요. 다만 외국에서 우리 방짜유기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기분이 좋았죠.” 그러나 미래는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후계자와 전통 계승이 문제. 장남 형근씨말고도 5명의 제자를 둔 선생은 방짜유기 제작기법을 전하는 데 고민이 많다. 방짜유기는 다섯 명이 팀을 이뤄서 만들어야 하는 만큼 주물유기보다 제작 과정이 까다롭고 힘들다. 특히 쇠가 달궈진 상태를 확인하면서 작업하기 때문에 예전엔 밤에만 일했다. 요즘은 햇빛을 완전히 가려 공장을 깜깜하게 해놓고 일한다. 수공만큼 굳은 의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방짜가 가진 신비한 효능을 알게 되면 의지는 신념이 되고, 이봉주 선생은 거울이 된다. 방짜에 세균과 병균이 놀라다 농약은 기본, O-157균도 꼼짝마 사실 방짜는 생명의 그릇이다. 우리 조상들은 미나리에 붙어 처치 곤란한 거머리를 놋수저로 물리쳤다고 한다. 해충을 쫓아내는 신비한 효능만이 아니다. 멸균 효과도 탁월하다. O-157균을 방짜 안에서 배양하면 하루도 안 돼 모두 사멸된다. O-157균은 식중독을 일으키는 대장균의 하나로 1980년대에 등장한 치명적인 세균이다. “깻잎을 넣어두면 그 주변이 까맣게 변색이 돼요. 농약 때문이죠. 딸기도 그렇고, 심지어 껍데기를 깐 삶은 달걀을 껍질을 넣었을때도 그런 현상이 생기더군요. 그렇게 하루 정도 보관을 한 후 다른 방짜 용기에 그것을 담으면 더이상 변화가 없어요. 방짜가 나쁜 균에 반응하는 것은 물론 그것을 해독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죠. 변색된 것은 설거지만으로도 제 색깔로 돌아오니 염려 없이 써도 되고요.” 이봉주 선생은 방짜를 생명의 그릇이라고 한다. 그런 탓에 물에 삶거나 하면 바로 변색되어 제 빛깔을 잃는다고. 돌아보면 선생의 50년 대장장이 생활은 생명을 지켜온 시간인 것 같다. 먹고 살기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한때 먹고 사는 것마저 위협받기도 했다. 그렇다고 한눈을 팔지는 않았다. 그렇게 지켜온 것이라 오늘날 환경의 침공으로부터 우리의 식탁을 보호해주는 무기가 된 것이리라. 어렵게 지켜온 우리의 문화 유산이다. 다음 대로 이어나가는 일은 장인 혼자만의 몫은 아닐 듯. 방짜처럼 단련하며 살아온 그의 삶을 따라 이제 영롱한 빛으로 방짜의 내일을 여는 몫은 우리에게 있다. 유기란 무엇인가? 유기란 쉽게 말해 구리에 주석을 섞어서 만든 청동기다. 유기는 제작 기법에 따라 안성의 주물유기, 평안북도 정주군 납청에서 전해진 방짜(方字)유기, 주물과 방짜를 병행한 순천의 반방자유기 등 3가지가 있다. 이중에 유기를 망치로 두들기고 펴서 모양을 만드는 방짜유기의 제작이 가장 까다로워 그 제품 중 으뜸으로 친다. 금형에 쇳물을 부어 그릇의 형태를 만드는 주물유기와 달리 불에 달궈진 쇳덩어리를 일일이 메고 치고 두들겨 모양을 만드는 방짜유기는 1,200~1,300의 불길에서 장인의 혼이 깃들어야 겨우 한 작품이 만들어질 정도로 까다로운 작업이다. 경북 문경시 가은읍에 자리 잡은 방짜유기전수관. 1천여 년 이어온 방짜유기를 만들기 위해 화덕의 불이 쇳덩이를 달구고 있다. 과거의 우리 조상들은 주발, 수저, 대접 같은 부엌 세간이나 제기들과 대야, 요강과 같은 혼수품, 꽹과리 징과 같은 악기, 그리고 절이나 무당집에서 주로 쓰던 좌종, 바라 같은 불구에 이르기까지 유기를 폭넓게 사용했다. 그래서 옛날에는 놋그릇의 질과 양, 관리 상태가 그 집안의 생활 정도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 때는 공출로, 해방 후에는 연탄을 쓰면서부터 연탄가스에 민감한 놋그릇이 빨갛게 죽어가고, 쓰기 편한 스테인리스 그릇이 그 자리를 대신해 유기는 세월 속으로 사라져야 했다. 이러한 유기의 부침에 편승하지 않고 오로지 옛 조상들의 기법 그대로 50여 년을 한결같이 뜨거운 풍구를 지켜온 장인들이 있어 생명을 지키는 방짜유기가 이어올 수 있었다. |
출처 : 납청 방짜유기
글쓴이 : 감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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