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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여년의 전통의 맥을 잇다-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이봉주 옹

맑은물56 2011. 8. 10. 15:26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이봉주 옹

기사입력 : 2009년 11월 23일

기자 : 황진호기자 hjh@kyongbuk.co.kr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이봉주 유기장이 작업하는 모습.

유기는 우리 선대들이 가정에서 생활용품으로서 양은냄비와 스텐용기가 나오기 전까지 도자기와 함께 늘 생활속에서 함께했다. 특히 연탄이 연료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1960년대 부터는 변색이 심하다는 이유로 생산 뿐만이 아니라 유통까지 중단돼 20여년간 유기는 우리 곁을 떠나 있었다. 이후 유기의 전통성과 기법 등이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유기관련 문화재도 지정되고 사람들의 관심이 다시 유기제품으로 되돌아 왔다.

유기는 우리가 사용하는 일반 생활용품 외에 악기, 장신구 등 다양한 쓰임새로 인해 요즘 많은 각광을 받고 있다.

전국 곳곳에서 애용됐던 유기는 한국인의 마음을 담아내는 민속용기로 누구에게나 친숙했던 제품들이지만 현대식 합금제품이나 화학제품에 밀려 지금은 일상 생활용품으로서의 자리를 잃었다. 하지만 묵묵히 유기장의 외길을 걸어온 사람이 있다.

경북 문경시 가은읍 갈전리 807의 1일대 '납청유기촌'에서 외길 52년 장인의 길을 걸으며 혼이 살아 숨쉬는 납청 양대유기, 즉 방짜유기의 맥을 이은 중요무형문화재 77호 유기장 이봉주옹.

지난 6월 중요무형문화재 제 77호 유기장 이봉주 옹의 전통 방짜유기기법 공개행사가 자신의 유기공방에서 개최됐다. 이날 공개행사는 문화재청이 무형문화재의 올바른 전승과 원형 보존을 위해 올해부터 매년 개최할 수 있도록 문화재보호법으로 규정한데 따른 것이다.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출생의 이봉주 옹은 22살에 납청마을 양대(방짜)공장에 들어가 일을 하다 공산주의자들이 유기공장을 폐쇄하자 고향을 떠나 월남했다.

"평북 정주 출신의 유기장 고탁창여 씨의 서울 양대 유기공장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 방짜유기에 전념할 수 있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납청양대(방짜)의 맥을 잇게한 故 탁창여(1898년생)씨는 1948년 서울에 정착, 유기업을 했다. 3·8선을 수차례 넘나들면서 납청 대장들을 월남 시켰는데 당시 원대장 김찬규, 김의선, 김봉섭, 김봉근, 김병훈, 김농도, 박은항, 박은각 등 그가 월남 시킨 장인은 100여명에 이르렀다고 이옹은 전한다.

이 옹은 1958년 탁씨로부터 독립하여 서울 구로동에 방짜 유기공장을 설립하고 전통적인 납청 방짜유기 제작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1978년 경기도 안양으로 공장을 이전, 박달동에 납청유기공방(1981년)을 설립하고 1982년에는 전승공예대전에서 문화공보부장관상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이듬해인 1983년에는 무형문화재 제 77호 방짜유기장으로 지정을 받았다.

1988년부터 8년간 사단법인 전통공예기능보존협회 이사장을 역임하는 동안 이옹은 1991년 '납청양대'(방짜유기)를 저술했다. 1993년에는 특대의 징(지름 161cm, 무게 98kg)을 제작해 눈길을 끌었다. 특히 1983년작 '방짜좌종'과 12첩 반상기인 '임금님수라상'등은 유명한 작품이 됐다. 이 옹은 이 모든 것이 스승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故 탁창여 씨의 공덕비를 세우는데 온갖 정성을 쏟았다. 때문에 천년 이상 거뜬히 지탱할 수 있도록 함은 물론, 비각 지붕도 방짜기와로 이었다.

이옹은 1993년 국립박물관 개관 전시용 작품(제기, 반상기 등 128점)을 기증했다. 오오사카 문화원에도 전시작품(제기, 반상기 등)을 기증했다. 1999년에는 조달청 문화상품 조달물자로 징, 꽹가리가 지정됐다.

그는 1998년 '이봉주공방' 운영에 나서던 중 2003년 문경으로 이전해 지금으이 '납청유기촌'을 조성했다. 이곳에 들어서면 100평, 110평짜리 주공방 2동과 100평 짜리 전시·판매장 겸 사무실 건물과 재래식 공방 1동이 웅장한 모습으로 눈에 들어 온다.

"문경이 참으로 좋습니다. 그동안 7번이나 이사를 다니고 8번째 찾은 곳이 이곳입니다. 특히 이곳 가은 사람들의 인심이 너무 좋아 자랑하고 싶어요. 이제 이곳을 제 2의 고향으로 삼고 납청방짜유기촌을 일구고 있습니다."

83세 노령에도 직접 대장 일을 하는 이옹의 모습은 방짜유기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집념의 혼, 그리고 고향 납청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함께 작품에 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60년 산림법이 개정 강화되고 일반 가정의 연료가 연탄으로 바뀌면서 연탄가스에 변색이 잘 되는 유기의 소요량이 급격히 줄어 마침낸 쓸모없는 고물로 취급돼 고물상 수집용 고철이 됐다"고 회상했다.

일반인들 중 방짜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방짜유기는 정확하게 78%의 구리와 주석을 합금한 우리나라 전통 금속공예 기법으로 제작한 무독, 무취의 무공해 금속으로 선조들이 수 천년동안 사용해 왔던 생활공간의 예술품이다. 특히 성형할 때 두드린 메자국(울퉁불퉁한 자국)은 수공예품으로서의 은은한 멋과 품위가 풍겨 그 격을 한층 더한다.

이 옹은 지금도 전통기법을 고수한다. 용해 → 네핌질 → 우김질 → 냄질 → 닥침질 → 제질 및 담금질 → 벼름질 → 가질 등 8가지 제작과정을 거쳐 유기를 만든다. 납청유기촌에서는 20여명 직원들이 방짜유기 제작 기법을 전수받고 있어 머잖아 국내 최대의 방짜유기촌으로 각광받을 날이 올 전망이다.

이 옹은 방짜유기를 "생명의 그릇"이라 했다. 우리 조상들은 미나리에 붙어있던 거머리를 놋수저로 물리쳤다고 한다.

"농약이 묻은 과일, 채소 등을 방짜 용기에 담으면 그 주변이 까맣게 변합니다. 그렇게 하루 정도 보관 후 다른 방짜 용기에 그것을 담으면 더이상 변하지 않아요. 방짜가 나쁜 균에 반응하는 것은 물론 그것을 해독한다는 사실이죠. 변색된 것은 설거지만으로도 제 색깔로 돌아오니 염려 없이 써도 되고요."

이봉주 옹이 어렵게 지켜온 우리의 문화 유산. 아들 형근씨가 방짜기술을 이어받고자 쇠를 녹이고 망치질을 해대는 모습이 이옹을 흐뭇하게 한다. 이형근씨는 1989년 제 19회 전국공예품경진대회에서 대회 사상 최초로 유기 부분 대상을 받아 아버지에 이은 방짜유기 제조 기술력을 인정 받으면서 그 맥을 이어 가고 있다.

 

↑ 유기방짜 그릇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