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사람이 할 말/ 김소연
늙은 여가수의 노래를 듣노니
사람 아닌 짐승의 발성을
암컷 아닌 수컷의 목울대를
역류하는 물살
늙은 여가수의 비린 목소리를 친친 감노니
잡초며 먼지덩이며 녹슨 못대가리를
애지중지 건사해온 폐허
온몸 거미줄로 영롱하노니
노래라기보다는 굴곡
노래라기보다는 무덤
빈혈 같은 비린내
관록만을 얻고 수줍음을 잃어버린
늙은 여가수의 목소리를 움켜쥐노니
부드럽고 미끄러운 물때
통곡을 목전에 둔 부음
태초부터 수억 년간 오차 없이 진행되었던
저녁 어스름
그래서 이것은 비로소 여자의 노래
그래서 이것은 비로소 사람이 할 말
그래서 이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를 우노니
우리가 발견한 당신이라는
나인 것만 같은 객체에 대한 찬사
살면서 이미 죽어본 적 있었다던
노래를 노래하노니
어차피 헛헛했다며
일생이 섭섭하다며
그럴 줄 알았다며
그래서 어쩔 거냐며
늙은 여가수의 노래에 박자를 치노니
까악까악 까마귀
훌쩍훌쩍 뻐꾸기
차분하고 투명하며 열렬한 눈물의 궤적
- 시집『눈물이라는 뼈』(문학과지성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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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로서는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는 시일 수 있다. 그런데 소리 내어 따라 읽어가노라면 독특하고도 섬세한 낱말의 조합이 생성해내는 묘한 장단에 내 설움과 비탄이 함께 실려 가는듯한 느낌을 받는다. 긴 모조속눈썹 파르르 떨고 있는 ‘늙은 여가수’의 독백에, 샤도우 음영 깊은 주름 사이에, 눈물 번진 마스카라 ‘늙은 여가수 비린 목소리’에 친친 감긴다.
중성에 가까운 비음의 재즈 가락이 흐느적거리듯 내 몸을 더듬듯 타고 내려간다. 그러나 ‘늙은 사내의 덜렁거리는 고환처럼 더 이상 아무도 감동시킬 수 없는 카바레 퇴물 여가수의 고독한 성대’와는 조금 다르다. ‘노래라기보다는 굴곡’ ‘노래라기보다는 무덤’이긴 하지만 거기엔 우리 모두의 곡진했던 삶과 유장한 이력들이 원액으로 녹아있다.
‘슬픔으로 시작되었으나 슬픔으로 끝나지 않는 노래’는 그래서 우리 모두의 과거사다. ‘늙은 여가수의 노래’속에는 그 지문이며 족적, 무늬들로 고스란하다. ‘나인 것만 같은 객체의 찬사’ 한통속에서 당신과 나의 뼈마디가 삐걱댄다. 비로소 사람이 할 말. ‘어차피 헛헛했다며 일생이 섭섭하다며 그럴 줄 알았다며 그래서 어쩔 거냐며’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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