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과 벗
“학문과 예술의 가치는 실천과 공유에 있다.”
이것이 라이브서예의 가치관이다.
광장이나 거리, 산속이나 강가, 호텔이나 대학, 절이나 교회,
백화점이나 음식점, 아트센터나 카페, 전시회장이나 음악회,
잔치판이나 결혼식, 방송사나 신문사, 국내나 국외…….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으로 뛰어다니며 250여 회에 걸쳐 펼쳤고,
지금도 펼치고 있으며, 앞으로도 펼칠 라이브서예…….
엊그저께는 여의도 홍보석 이화포럼에서 펼쳤고,
내일은 설악산 신흥사에서 라이브서예를 펼칠 계획이다.
서예의 장래는 밝은가? 벗과 얘기해 보면 한결같이 부정적이다.
붓 잡고 먹고 살기가 힘들다고들 한다.
그러나 배운 게 글씨밖에 없어, 그냥 붓 잡고 지내고 있단다.
결국, 20년 이상 불철주야 노력하여 초대작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원에는 원생이 거의 없고, 젊은이나 학생들은 더욱 찾아보기 어렵다고들 한다.
그리하여 문화센터나 평생교육원 등지를 기웃거리며 차비 정도 벌어서
길바닥에 깔 따름이다. 나 역시 앉아서 많은 서예 지망생을 받는 형편이
되었다면 라이브서예는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컴퓨터가 모든 글쓰기를 대신하는 시대인데 느려빠진 서예가 무슨 예술이여?”
여기저기서 붓을 꺾는 소리가 들린다.
외국 관광객의 필수 코스인 인사동에 그 많던 필방이나 표구점들은
하나씩 밥집이나 술집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는 형편이다.
몇 안 되는 대학 서예과도 학생 채우기에 급급한 실정이다.
대학원 서예 전공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
다시 붓을 세워야 한다.
붓에 기(氣)를 불어넣어야 한다.
매일 붓을 거꾸로 들고 떨어뜨리지 않으며 받치는 놀이를 한다.
어릴 때 긴 막대기를 손가락 끝에 세우고 균형 잡기 놀이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리고 앉아서 원생을 받아 가르치는 수동적인 자세에서 현장을 찾아가
보는 즐거움과 쓰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야 한다.
서예 실천만은 외롭다.
음악, 무용 등과 함께 놀아야 한다.
‘즐기는 서예’, 곧 낙서(樂書)이어야 한다.
언제나 능동적 자세로 ‘다가가는 서예인’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지랄 방귀를 떨던 차에 내 앞에 다가온 일본 영화 한 편,
‘서도(書道) 걸즈(girls)!! 우리들의 갑자원(甲子園)’이다.
서예를 일본에서는 서도라고 한다.
갑자원 즉 고시엔이란 야구 리그 결승전이 벌어지는 경기장(약 육만 명을 수용)이나
고교 최강을 가리는 리그전을 뜻한다.
이 영화에서는 야구 대신에 여러 학교의 서도부 학생이 참가한 서예 리그전이
피날레를 장식한다.
불경기로 침체된 전통마을을 살리기 위해 서도부(書道部) 여고생들이
서예와 음악을 접목하여 서도 퍼포먼스를 탄생시키는 실제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이라는 데에 더욱 관심이 고조되었다.
2시간 1분짜리를 성장 드라마를 숨도 쉬지 못하고 끝까지 뜯어보았다.
무겁고 큰 붓으로 펼친 마지막 퍼포먼스 내용이 ‘재생(再生)’이라서
더욱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사나이답지 못하게 눈물도 여러 차례 흘렸다. 물론 박수도 치면서…….
영화가 끝날 즈음에 가슴은 뭉클하고 눈에는 눈물이 맺혔지만
내 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를 두고 공감(共感)이라 하는구나.
내가 꿈꾸어 오던 라이브서예를 이웃 일본에서 벤치마킹이라도 해간 듯했다.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화장을 하거나 페인트칠을 할 때 붓을 사용한다.
붓이 지나간 자리는 아름답다.
그래서 인간은 붓을 만들어 지금까지 사용해 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애용할 것이다.
여러 가지 붓 중에서 나의 붓은 먹물을 머금고 종이 위에서 놀기 좋아한다.
내 나이 육십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 붓이란 벗과 만나고 사귄 지도 어언 오십 년 가까이 되는 셈이다.
이 대목에서 벗과 술타령이나 해 볼까.
벗과 술은 오랠수록 좋고 옷과 차는 새로울수록 좋다.
벗이란 하루 저녁 술자리에서 필(feel)이 통하여 소울메이트(soul mate)가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발효된 된장처럼 오래 묵은 벗이 제격이다.
벗은 마음과 옷을 다 벗어도 전혀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벗이다. 나의 붓이란 벗도 거짓 없는 곰삭은 친구이다.
오래된 침몰선에서 인양된 술은 한 병의 낙찰가에 억 소리가 나기도 한다.
고분의 청동기에서 발견된 술도 애주가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내 붓이 마시기 좋아하는 고묵(古墨)의 가격도 끝이 없다.
술과 벗이 만날 때 술은 벗이 되고, 벗은 술이 된다.
술안주로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시구가 있다.
북송(北宋) 문인 취옹(醉翁) 구양수(歐陽修)가 지은 것이다.
酒逢知己千杯少(주봉지기천배소)요
話不投機半句多(화불투기반구다)라.
친한 벗을 만나 술을 마시면 천 잔도 적고,
대화가 통하지 않으면 반 마디 말도 많다.
커~ 좋다.
지기(知己) 정도 되는 벗이라면 옷 벗고 샤워하는 사이가 아니라,
속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벗이다. 그런 친구라면 시간과 공간은 물론
술값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진정한 벗과 함께 마시는 술은 생활의 즐거움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붓이란 벗도 나의 손길을 탓한 적이 없다.
자신이 즐겨 마시는 술인 먹물이나 짝지어준 애인인 화선지를 한 번도 탓한 일이 없다.
그래서 붙잡고 다니고 싶은 친구라는 뜻에서 ‘붓벗’이라 부르고 싶고,
느낌이 통한다는 의미에서 ‘필벗’이라 부르고 싶다.
붓벗은 절대로 몽니를 부리는 법이 없이 무던한 친구이다.
붓은 먹을 마시고, 벗은 술을 마시니 그 아니 좋을시고.
붓을 뜻하는 한자는 원래 聿(율)이었으나
진시황의 진 나라 이후부터는 筆(필)로 썼다.
이 글자를 보면 붓은 대나무를 만들었다는 것과
붓을 잡은 손과 붓대 및 붓털이 그려져 있다.
筆(필) 자 아래쪽의 二(이)가 붓털인데 전서에서는
붓의 형상대로 밑으로 드리워지게 썼던 것을
예서 이후부터는 편의상 옆으로 펼쳐지게 썼다.
훈민정음 해례본(1446)에는 붓을 ‘붇’으로 표기하고 있다.
붓은 손에 붙어야 하고, 또 자주 붙[붓]잡아야 한다.
붓과 비슷한 것으로는 비(빗자루)가 있다.
붓은 지나가면서 흔적을 남기지만 비는 흔적을 없앤다.
벗이여, 우리 민족에게는 한(恨)과 흥(興)과 정(情)이 많다오.
오늘 하루쯤은 모든 세상의 일을 접고 삶의 고달픔에서 오는
원한(怨恨)을 필흥(筆興)으로 승화시키며 우정(友情)을 나눠 보세나.
<서예가/ 수원대 교수 권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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