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문학 강의실 '징'

[스크랩] 행동주의 문학 / 공광규

맑은물56 2011. 3. 7. 20:19

 

 

행동주의 문학

 

 

                                                                                                           공광규

 

 

<<논어>> '미자' 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세상 정치가 혼란스러워지자 숨어서 농사를 지으며 사는 장저와 걸익이라는 사람이 밭일을 하고 있었다. 공자와 제자들이 어느 마을을 지나가다가 두 사람을 만났다. 공자의 제자 자로가 그들에게 길을 물으러 갔다. 걸익이라는 사람은 그가 공자의 제자 자로임을 알아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도히 흐르는 것은 천하가 모두 그러한데, 이와 같은 혼란한 세상을누구와 함께 바꿀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거요? 그대는 악인들을 피해다니는 공자와 함께 있는 것보다는 난세를 피하고 있는 우리들을 따르는 것이 낫지 않겠소?"

 

  이렇게 말하고는 뿌린 씨를 덮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자로가 돌아와서 공자에게 이 일을 알리자 공자는 씁쓸한 기색으로 말했다.

 

  "우리들은 새나 짐승과 함께 어울려 생활할 수 없다. 세간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지 않고 누구와 함께 어울린다는 것이냐? 만일 천하의 정치가 올바르게 이루어진다면 나도 너희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려고 할 필요가 없지 않겠느냐?"

 

  이것은 세간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공자의 적극적 세속주의관이다. 세상에 바른 정치가 없는데도 숨어살며 스스로를 위하는 사사로운 마음을 버리고 도가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는 성인의 의지이다. 현실의 개선을 위해서 정치사회 참여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이고, 난세를 피하는 도피와 은거주의자를 넌지시 비난하는 말이다. 이것을 현실 정치가 올바르지 않거나 사회가 혼탁할 때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정치사회에 개입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무리일까?

 

  미국 발 금융위기로 세계가 장기불황에 직면하였다. 전 세계 민중들의 삶이 무너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직장에서 내쫓긴 실업자와 취업을 앞둔 청년 유휴인력이 넘치고 있다. 자본의 수익 위주로 고용 없는 성장을 계속하다보니 일자리가 없어졌기 때문다. 임금노동자의 소득이 낮아지면서 소비가 위축되자 공장이 문을 닫기 시작한다. 미국의 서브프라임의 원인은 자본이 노동자들에게 적정한 임금을 주지 않아서 일어났다. 결국 현재의 공황과 불황은 자본의 지나친 탐욕이 빚어낸 것이다.

 

  급기야는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구제금융을 받은 기업 경영자들의 급여를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도 기업 최고 경영자에 대한 급여제한을 검토하는 한편, 기업이윤을 노동자에게 공정하게 분배하는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프랑스 노동자 25만명이 정부정책에 항의하는 디규모 파업을 벌인지 일주일 만에 나온 정부의 안인 것이다.

 

  자본이 부를 독점하려는 탐욕을 버리고 국가가 개입하여 부의 배분을 조정하지 않는 이상 현재의 불황은 어제 끝날지 모른다. 우리나라는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국민들만 다그칠 뿐 재벌들은 그동안 그 많은 돈을 벌이들이고도 꿈쩍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기업들은 삼성그룹 12조를 비롯하여 43조원(2008년 말)의 돈을 쌓아놓고 있고, 기업의 총수들은 이러한 불황기에도 짭짤한 현금배당 수익을 올렸다. 국민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는 모 국회의원은 그룹 총부보다 더 많은 현금 배당수익을 챙겼으니 이들은 국민의 어려움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다. 한국의 자본이 이렇게 탐욕을 부리고 대톨령이 자본 편을 드는 한 한국사회가 좋아지리라는 기대를 아예 버려야 한다.

 

  지난 1얼 12일 인도 북부 바라나시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이러한 경제의 불황을 도덕성 위기가 낳은 탐욕과 부패라고 하였다. 우리나라가 지나온 그동안 정치경제 행위를 봐도 달라이 라마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 그는 이어서 세계에 만연한 이기심, 자아성찰과 정신문화의 부족이 현재 세계 경제를 금융시장의 위기로 이끈 주요한 요인으로 지적하였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어떻게 소유하게 되었고, 그것이 다른 것들과 어떠한 상관관계에 있는지 잊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상호의존성 인식, 가치 있는 교육, 자연환경 보호를 주장했다.

 

  이지관 조계종 총무원장 역시 지난 1월 13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세계적인 경제난 극복을 위해 모든 불자와 국민이 마음을 모아 검사할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웃을 위해 희망과 행복가 자비의 나눔운동을 펼치겠다고 밝혔다.

 

  현재의 불황에 대하여 세계적인 학자들은 신자유주의의 실패를 인정하고 자본의 엄격한 규제와 사회복지를 강조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오바마 새 정권은 작은 정부, 감세, 규제완화로 대표되는 레이거노믹스를 질타하며 부자에 대한 증세, 규제 강화 등을 내걸고 있다. 공황의 극복을 위해서는 이러한 조치들이 필요하다는 동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현 정부는 이와 반대로 부자 감세, 기업 감세, 친기업, 노조약화, 규제완화, 고용유연화 정책을 지향하고 있다. 세계의 정치경제 운행과 거꾸로 가는 것이다. 또 경기부양을 빌미로 부동산 규제를 완전히 풀어, 다시 한 번 부동산 폭등을 조장하려고 하고 있다. 이는 부자들에게 다시 한 번 '대박'이라는 자산축적 기회를 줄 것이 분명하다. 사회는 더 양극화로 치닫게 되고, 결국 갈등과 폭력이 판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잘못된 정치가 조장한 사회의 갈등과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정치가 바르면 갈등과 폭력이 일어날 리가 없다. 또 가장 좋은 정치는 국민들이 무심한 정치라고 하지 않는가.

 

  얼마 전 철학계는 "사람이 경제에 예속 되어 있고, 경제제일주의라는 용어가 나오는 것은 철학이 근본 구실을 못한 탓"이라고 반성하는 토론회를 가졌다. 철학의 사회적 소통을 회복하여 '활동의 철학'으로 대중과 접점을 넓혀다 한다는 것이다. 이날 한 발제자는 "자신과 상관없는 철학사에 누가 관심을 갖겠는가?"라고 물었다.

 

  마찬가지로 문단 역시 '자신과 상관없는 문학에 누가 관심을 갖겠는가?' 물어야 한다. 독자들이 문학을 외면하고 문학의 위기론이 고개를 든 지 오래이다. '활동의 문학'으로 대중과 접점을 넓혀가야 할 것이다. 현실에 대하여 대부분 문학인들이 전혀 무지하거나 알아도 함구하거나 현실과 상관없는 헛글만 써대고 있으니 독자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은 당연하다.

 

  언론권력과 몇몇 출판자본의 비호를 받는 일부 사이비 문학 권력은 난삽 난해하거나 심약하고 싱거운 시들을 계속 재생산하고 있다. 시집 한 권을 끝까지 읽어내기가 어렵다. 세간과 상관없는, 문학을 위한 문학이어서 인내를 가지고 읽어도 내용이 잡히지가 않는다. '재미있거나 의미있거나'한 것들이 별로 없는, 그야말로 헛글의 난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가. 문학이 현실문제와 만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이 현실과 만나지 못하는 것은 문인이 현실과 만나지 않기 때문이다. 강의실이나 책상 위, 술집이나 까페에 갇혀 있는 문인이 어떻게 사회와 만날 수 있겠는가? 물론 이러한 문인들은 일부 잡지나 문학상의 권력에 둘러싸여 시를 위한 시를 써서 발표하고 시집을 발간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인들의 시가 개인의 체험을 사회화하여 소통시키거나 독자와의 공감을 이루어내지 못할 것은 뻔하다. 그렇다고 문단의 일각에 개인의 체험을 사회화하거나 사회적 사건을 문학으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현장과 광장과 거리의 문학이 주류로 등장할 날이 멀지 않았다.

 

  환경문제, 외국인 노농자 문제, 통일문제 등 우리 사회의 쟁점을 수년째 문학화하며 전국을 찾아다니는 한국평화문학포럼의 순회공연이나 대추리 미군기지 이전반대 투쟁, 한국철도공사 여승무워 정규직화 투쟁, 2008년 촛불 항쟁,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 팔레스타인 문제, 용산재개발지구 참사 등에 일부 문인들이 관심을 갖고 직접 참여하거나 작품을 써 내고 있다. 문학을 행동으로 하고 있는 이들의 문학을 행동주의 문학이라고 붙이면 어떨까?

 

  물론 '행동주의 문학'용어는 1930년대 전후 프랑스에서 시작하여 전개되었다. 그리고 1935년 우리나라에 수입되었고, 최근에 이명원은 '행동시학'을 명명하였다. 인간과 사회를 위협하는 정치경제 현실을 주시하면서 세간과 소통을 통해 사회를 바꾸어보려는 강건한 이들의 문학적 노력은 머지않아 독자들에 의해 발굴되어 아름다운 보석으로 빛날 것이다. 보석은 땅 속에 묻힐지언정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불교문예, 2009년 봄호.

 

 

 

출처 :  http://cafe.daum.net/fmzmffpwldh/PoK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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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소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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