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역사 이야기

광화문 어떻게 달라졌나… 제자리 찾고 원형 살리고 민족기상 세운 대역사

맑은물56 2010. 8. 18. 14:41

광화문 어떻게 달라졌나… 제자리 찾고 원형 살리고 민족기상 세운 대역사

//

국민일보 | 입력 2010.08.13 18:45

15일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는 광화문은 옛 모습과 어떻게 달라졌을까.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원래 있던 자리로 복귀했다는 점, 철근콘크리트 건물에서 목조 건물로 원형을 되찾았다는 점,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한글 현판에서 고종 중건 때의 한문 현판으로 되돌아갔다는 점이다.

광화문은 조선왕조의 법궁(法宮·임금이 있는 궁궐)인 경복궁의 정문(正門)으로, 경복궁과 함께 조선 건국 직후인 1395년(태조 4년) 건립됐다. 건립 당시의 이름은 사정문(四正門)이었으나 1425년(세종 7년)에 광화문(光化門)으로 이름을 바꿨다. '왕의 큰 덕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뜻을 담았다.

그러나 광화문은 임진왜란의 와중에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270여년 동안 재건되지 못하다 1865년(고종 2년) 왕실의 존엄성을 과시하고자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광화문도 함께 복원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서면서 광화문은 경복궁 북문 쪽으로 이전됐다.

그러다 한국전쟁 때 목조로 된 다락 부분이 불에 타 사라졌다.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인 1968년 아랫부분 석축은 그대로 두고 윗부분만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했다. 원래 광화문이 서 있던 곳에서 북쪽으로 11.2m, 동쪽으로 13.5m 떨어지고 각도 역시 경복궁 중심축을 기준으로 3.75도 틀어진 채였다.

광화문 복원 작업은 1990년부터 시작된 경복궁 복원공사의 일부다. 하지만 20년 계획으로 진행된 경복궁 복원 중에서도 광화문 복원은 역사적 의의 면에서나 규모 면에서 그 자체로 대역사(大役事)였다.

2006년 12월 4일 용마루 취두철거로 시작된 광화문 복원공사는 일제강점기와 1968년 복원을 거치면서 틀어지고 옮겨진 부분을 바로잡았다. 광화문이 흥례문∼근정문∼근정전으로 이어지는 경복궁의 주요 전각 남북 방향 직선 축과 정확히 일치하는 원형의 구조를 되살린 것이다.

이전의 철근콘크리트 광화문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목조 건축물로서의 의미가 없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이번에 완공되는 광화문은 7m 높이의 기단부 석축공사는 고종 때와 같이 화강석을 사용하되 당시 썼던 인왕산 돌과 석질이 가장 유사한 경기도 포천산 돌을 사용해 이뤄졌다. 목조 누각 건축에는 가장 튼튼하고 오래 보존되는 것으로 알려진 금강송 나무를 썼다.

주변에는 고종 중건 당시 모습대로 광화문 뒤편 양쪽에 동·서 수문장청(守門將廳), 그 뒤로 왼쪽에 용성문(用成門), 오른쪽에 협생문(協生門) 그리고 영군직소(營軍直所) 등 군사시설이 들어섰다. 광화문 앞과 석축 위에는 사악함을 물리치고 화재를 막아주는 상상의 동물인 해치 조각상 4개가 설치되고 임금이 드나들던 아치형 홍예문 천장은 봉황 현무 기린 한 쌍씩으로 새 단장했다. 공격과 방어를 위해 석축 맨 위에 쌓아놓은 담장인 여장에는 8괘와 해와 달을 상징하는 무늬를 장식했다.

문화재청은 광화문 공개 이후에도 동십자각 주변의 궁장을 설치하는 공사와 하수암거(하수도) 이설 공사 등을 연말까지 계속 진행할 계획이다.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