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산 스님 열반’ 송암 스님 추도사
미공당지산선사(彌空堂志山禪師)이시여, 속환사바 재명대사速還裟婆再明大事 하소서! 이 좋은 때, 호시절을 맞이하였지만 뜻밖에 천안함 사건이 터져 나라 전체가 봄이 왔지만 봄 같은 기분을 느끼지 못하고 울며불며 전전긍긍 지내고 있었지요. 그러한 때 또 한 번 하늘이 무너지는 스님의 입적 소식을 접했습니다. 난 도저히 정신을 가눌 수가 없어서 어디 심연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 같은 아득하고 멍-한 상태에 빠졌고, 좀 지나서는 덧에 걸린 짐승처럼 소리를 지르며 몸부림쳤지요.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흐르는 눈물, 천줄긴가 만줄긴가 도무지 그쳐지지도 않습니다. 손목시계 하나씩 나눠 차며 약속의 증표로 삼았는데 이곳 청량도솔산 가득 다투어 피어난 진달래와 산벚꽃, 파릇파릇한 초록을 보고 연분홍빛을 봐도 도무지 즐겁지가 않고, 나무를 보고 흐르는 물을 봐도, 땅을 보고 하늘을 올려다봐도 온통 스님생각만 가득합니다. 혼자서 도량돌이를 하고 용설호에 나가 우두커니 서 있어도 물결에 떠오르는 것은 스님의 미소어린 모습뿐입니다. 스님, 어쩌려고― 어떻게 감당하려고 무수한 사람들을 공황상태에 빠지게 하세요. 어디 나 뿐이겠습니까. 그 많은 도반들과 스승, 오로지 스님만 의지하던 단월들과 가족들, 여든이 넘으신 노모는 어찌 살라고 이런 일을 저지르셨습니까? 남은 우리들은 한스럽고 야속한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원망스럽기까지 하답니다. 그러나 스님인들 오죽했겠습니까. 왔으니 가야하는 일을 당함에 스님인들 피할 길이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이 일은 스님만이 겪는 일이 아니라 무릇 태어난 자, 생명 가진 자는 모두 겪고 가야하는 길이기에 공도(公道)라고도 하지 않았습니까. 다만 스님은 이제 겨우 세수 53세, 너무 빨리 가셨다는 것이고 한마디 말도 없이 속절없이 가셨다는 사실이 남은 우리들의 가슴을 저미고 세차게 내려치는 것입니다. 스님은 13년 전, 이곳 안성 도피안사에서 6개월을 머문 뒤, 2009년 4월 9일 다시 와서 살다가 그해 12월 13일 충청도 무문관으로 떠났지요. 난 스님이 이곳에 다시 올 때 거처할 토굴 앞마당에 황토를 깔아놓고 기다렸지요. 우린 아침저녁으로 이마를 맞대고 얘기를 나눴고, 스님의 뜻을 펴는 일차적인 일로 여러 전적(典籍)을 차례로 역출(譯出)하기로 했었지요. 내가 이곳 개산조(開山祖:광덕스님)의 환생이야기를 하니까 전적으로 수긍하고 기뻐하며 환생신〔光린포체〕을 찾아서 둘이서 모시기로 했지요. 그래서 우린 서양문화사 공부 때에 손목시계 두 개를 사서 하나씩 나눠 차면서 약속의 증표로 삼았지요. 마치 미래를 약속한 연인들처럼……. 아뿔싸, 이제 그 글 두 편은 유고가 되고 말았군요 스님은 그 때, 낮에는 답사하고 밤이면 늦도록『어머니, 스님들의 어머니』교정을 보았었고, 무문관에서 나와 가장 먼저 책 나왔느냐고 나에게 물었었지요. 물론 거기에는 스님의 글 두 편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노모에 대한 스님의 속마음을 난 알고 있었지요. 겉으로는 책의 뜻이 좋다고만 문화탐방 떠나기 전 교정쇄를 챙겨가자고 제안했었지요. 아뿔싸, 이제 그 글 두 편은 유고(遺稿)가 되고 말았군요. 스님은 평소에 예의가 반듯했던 분, 언제나 웃으면서 사람을 대했던 분, 누구나 평등하게 맞이했던 분, 출가수행자로서 자존심을 가지고 품위를 지키려고 노력했던 분, 진리에 대한 정열을 가졌던 분, 열렬하게 용맹정진했던 분, 누구의 허물도 입에 올리는 것을 보지 못했고, 그 누구와도 잘 화합했던 분, 나아가 나라와 인류의 미래를 걱정했던 분, 불교의 장래를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았던 분이었지요. 또 스님은 사람을 만날 때는 언제나 환한 미소로 맞이했고, 불교에 대해 묻는 사람에게는 끝까지 친절하게 설명했지요. 함께 살 때 스님은 개인사정을 내세우지 않았지요. 아침저녁 대하는 나와도 언제나 내 뜻을 먼저 살핀 뒤에 스님 뜻을 내보였고, 무슨 일에서나 내 생각을 먼저 물은 뒤 스님의 생각을 말하곤 했지요. 그것은 비단 나에게 만이었겠어요. 스님 자신의 말이나 생각은 아예 없이하거나 뒤로 미루고, 상대의 생각이나 뜻을 스님의 것으로 받아들였지요. 스님은 거의 한 번도 자신의 사정을 내세워 타인이나 대중에게 부담을 준 일이 없었지요. 난 그런 스님을 통해 도반이 울타리이고 선지식인 것을 다시 알았으며, 사람이 가장 귀한 보배라는 사실도 더 깊이 알았고, 삼보(三寶)의 존엄도 더 절실하게 깨달았지요. 난 스님에게 출가수행자의 참면모를 자세히 보았어요. 그런 행이 무아행(無我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저 가여운 천안함 장병 영령들 인도 위해 서둘러 가셨나요 그러한 스님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 어떤 조짐도 없이 갑자기 이승을 떠나신 것에 대해 며칠을 주야로 골똘히 생각했어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서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떠오른 한 생각― 지장보살! 아하, 나의 도반 지산스님께서 저 가여운 천안함 장병 46위의 영령들을 인도하기 위해서 부랴부랴 서둘러 가셨구나! 혼자서 무릎을 치고 말았어요. ‘빛덩어리’ 같이 밝고 따뜻한 스님이 추위와 어둠에 떨고 있는 그들 순국충의장병들 곁으로 가면 그들은 저절로 이고득락 할 겁니다. 스님, 도저히 그 젊은 충혼들을 그냥 버려둘 수가 없었지요. 스님의 그 여린 마음에―, 내 말이 맞지요. 그렇지 않고는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가 있나요. 아무쪼록 살아있는 난 이제 스님의 환생을 위해, 이 땅에 남은 사람들을 위해, 티베트 수미산 순례를 가서 환생기도할 겁니다. 생전에 남의 청을 거절치 못했던 스님은 나의 이 청도 거절치 않을 것으로 믿습니다. 내가 스님이 충청도 무문관에서 정진할 때 보내려고 쓴 편지 가운데『금강경오가해』야부스님의 게송만 추려서 다시 저승으로 중생제도의 먼 길 떠난 스님에게 부치렵니다. 이 글은 나의 도반인 스님께 속환사바의 일구(一句)로 보내드리는 겁니다. 아마 써놓고 그때 보내지 못한 이유가 이렇게 있었나 봅니다. 받으시고 다시 오소서. 불현듯 오소서, 사바하. 젊어서부터 돌아다녀 먼 길에 익숙하니 형악을 넘고 소상강 건너기 몇 번이던가 하루아침에 고향 길 밟고 보니 길에서 보낸 세월 길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네. 불기 2554(4343?2010)년 5월 안성 도피안사 묘향대에서 愚弟 松菴 焚香拜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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