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나를 찾아 가는 길

불현듯 사라진 인연 ' 내일이면 늦으리' / 한겨레 조현기자의 휴심정

맑은물56 2010. 5. 11. 19:35

지산 스님 열반
100일 동안 무문관 수행 직후 심장마비
세계 불교 회통 큰뜻…“한 희망 무너져”
 
우리에게 내일이 있을까. 내 눈을 휘둥그레하게 하고 그 아름다운 잔상이 미처 내 각막에서 지워지기도 전에 벌써 떨어져버린 저 벚꽃과 진달래만이 아니라 불현듯 현세에서 사라져버린 인연 앞에서 ‘내일이면 늦으리’, ‘오직 지금만이 있을 뿐’이란 선사의 말씀이 더욱 절실해진다.
 
지상에서 가장 청정하고 아름다운 마음과 얼굴을 가진 분 중의 한 분이었던 지산 스님이 세상을 떠나다니. 무상하고 무상하다. 이제 50을 갓 넘은 그가. 지금껏 줄곧 수행하고 공부만 하느라고 미처 제 뜻을 한번도 펼쳐보지 못한 그가.
 
 
 
“ ‘지금 당장’ 그대는 누구인가” 일갈에 정신 번쩍
 
img_100426.jpg그가 열반했다는 소식을 전해준 이는 법정 스님의 조카인 현장 스님이었다. 그들은 모두 전남 순천 송광사의 문도들이다. 다른 일 때문에 현장 스님과 통화하는 중에  “지산 스님 아시지요?”라고 물어왔다.
 
“아다말다요. 며칠 전에 통화했어요. 지난주에 만나려 했는데, 요즘 몸이 안 좋아 따로 사람을 안 만나다 보니 늦어졌지만, 다음주엔 만나려고요.”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현장 스님이 청천벽력을 안겨줬다. “지산 스님이 심장마비로 열반했다”는 것이다. 충격 속에 전화를 끊고 철퍼덕 앉으니, 내 앞엔 말기암 환자들의 임종을 지켜주는 능행 스님이 그날 출간한 <이 순간>(휴출판사 펴냄)이라는 책 표지에 배우 나문희 씨가 쓴 추천사가 들어왔다.
 
“오늘 하루 숨 쉬고, 밥 먹고, 무대에 서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적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마당가에서 이제 꽃이 다 떨어지고 새싹만이 푸릇푸릇 돋아나 있는 진달래가 시야에 들어왔다. 불광사 회주  광덕 스님이 했다는 ‘내일이면 늦으리’라는 말이 절감됐다. 어느 봄날 산사로 전화를 걸어온 제자 송암 스님(안성 도피안사 주지)에게 스승은 “진달래꽃이 참으로 아름답다”며 “어서 와서 보라”고 했다. 그러자 송암 스님은 “오늘은 바쁘니, 시간을 봐서 내일이나 가보겠다”고 하자 스승이 전화를 끊으며 그러더라는 것이다.
 
“내일이면 늦으리.”
 
천안함의 아깝디 아까운 청춘들에게서도 보았듯이 그렇다. 삶은 기다려주지않는다. 언제 어떻게 될 지 내일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오늘이 이처럼 소중하고, 오늘 만나는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인 것이다.
 
내일과 어제가 어디에 있는가. 은둔의 선사 중 금봉 선사가 있었다. 얼마 전 열반한 법정 스님은 그를 통해 선(禪)의 진수를 알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법정이 금봉을 찾았을 때 마침 한 선승이 금봉에게 ‘화두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하소연하고 있었다. 그러자 금봉이 그 선승에게 ‘어떻게 화두를 드느냐’고 물었다. 선승이 ‘본래의 나는 누구였는가’라고 화두를 든다고 했다. 그러자 채 선승의 답변이 끝나기도 전에 금봉의 일갈이 터졌다.
 
“ ‘지금 당장’ 그대는 누구인가?”
 
법정 스님은 옆에서 이 얘기를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는 것이다. 중생은 과거에 대한 회환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한세월을 소진해 버리고 만다. 금봉은 그런 미망에 갇혀선 현재의 화두에 성성해질 수 없음을 일갈한 것이다. 

 
위파나나, 티베트불교 현지 직접 찾아가 수행
 
경기도 남양주 봉인사 전 선원장 지산 스님이 열반한 것은 지난 18일 새벽이라고 한다. 100일간 무문관 수행을 하고 나온 직후 평소 지인인 전주의 한 거사집에 머물던 날 심장바비로 열반했다. 그런데 법체(주검)을 인계받은 속가 가족들이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그냥 화장터에서 화장을 했고, 도반들이 며칠이 지난 뒤에야 이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뒤늦게 봉인사 주지 적경 스님이 소식을 듣고 지난 24일 봉인사에서 지낸 49구재 중 초재(7일마다 7번 지내는 제사중 첫번째)엔 뒤늦게 지산 스님의 열반 소식을 들은 송광사 문도들과 도반들이 달려와 충격적인 아픔을 함께 했다. 도반들은 “여전히 십대 같은 순수함과 청정한 마음으로 오직 수행만 해 이제 일을 시작할 시점에 이렇게 떠나가 한국 불교의 한 희망이 무너졌다”고 입을 모았다.
 
서울대에서 심리학을 전공하며 구도회 회장을 지낸 지산 스님은 1988년 순천 송광사 법흥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0여 년간 국내 선방에서 간화선 수행을 하다 간화선과 남방의 위파사나, 티베트불교 등 세계 불교 3대 흐름을 모두 수행해 하나로 회통시키겠다는 원대한 희망을 안고 한국을 떠나 새로운 수행에 나섰다. 고인은 미얀마 파욱선원 등에서 사마타와 위파사나 수행을 4년간 했고, 인도 히말라야 다람살라에서는 닝마파의 타시종 사찰에서 수행한데 이어 카규파의 수장 카르마파를 찾아 티베트불교 수행을 했다. 타시종 수행을 하고 돌아온 뒤엔 필자가 10년 전 쓴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의 티베트부분 원고를 위해 자신의 수행 원고를 아낌 없이 주었다. 지난해 귀국 뒤엔 서울 상도선원(주지·미산 스님) 등에서 수행을 지도해오다 무문관인 계룡산 대자암 분원에 들었다. 고인은 사방이 막힌 방안에서 식사와 용변을 모두 해결해야 하는 무문관에서 100일간 정진하고 나온 뒤 열반했다.
 
갑자기 그의 소식이 궁금해 그에게 전화를 한 것은 두 달 전쯤이었다. 한참 뒤 전화를 받은 이는 그의 속가 누나였다. 휴대폰도 맡겨놓고 무문관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언제쯤 나오느냐’고 물었더니, 짧게는 100일, 길면 3년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오는 즉시, 꼭 제게 전화해달라고 전해주세요”라며 전화를 끊으면서 건강 체질이 아닌 스님이 너무 힘든 고행을 자처하는 것이 못내 걱정스러웠다. 10여 년 전 그와 10여 일을 함께 지내며 보니, 소화력이 약해 늘 고생하는 것을 보았던 터였다. 그런 그가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는 무문관에 갇혀서 버틸 수 있을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10여 일 전 그에게 전화가 왔다. 예전 목소리 그대로 맑고 밝았다. “건강은 어떠냐”고 물었더니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뒤 다시 연락을 드릴테니, 그때 직접 보면서 긴 얘기를 나누자”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내일이면 늦으리~’였다.
 
 
‘삶은 꿈이다…하지만 여간해선 깨어나지지 않는 꿈이다’
 
도반들 중엔 대성 스님과 무감 스님이 열반 전날 지산 스님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오랫만에 만나 수행담을 나눴던 도반들은 열악하기 그지없는 무무관 수행으로 피로가 누적된 듯한 지산 스님의 얼굴을 보고, 걱정스러워 괜찮느냐고 물었지만, 그때도 지산 스님은 어느 때나 다름 없이 해맑게 웃으며 “걱정 마라”고 했다는 것이다.  선승인 무감 스님은 지산 스님과 헤어진 뒤 연 3일 동안이나 지산 스님이 꿈에 나타나고, 지산 스님이 열반한 아침엔 도반들과 함께 포행하던 중 갑자기 온 몸에 힘이 쭉 빠진 듯 주저앉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산 스님한테 별 일 없느냐”고 물으려 적경 스님에게 전화했다가 그의 열반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다.
 
지산 스님이 앞으로 뜻을 펼친다면 온 힘을 다해 돕겠다며 힘을 모으던 보우회 등의 재가자들도 그의 열반으로 큰 충격에 빠졌다. 그는 절을 소유하거나 특별한 직책을 거의 갖지 않은 채 살아왔지만 미얀마를 다녀온 뒤 봉인사 등에서 자애관과 위파사나를 지도하는 그를 따르는 이들이 적지않았다.
 
그는 미얀마 수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난 2005년엔 <붓다의 길 위파사나의 길>을 출간했다. 이에 앞서 그가 출가 직전 인도의 성자 라마나 마하리쉬의 책을 속명인 이호준이라는 이름으로 번역해 펴낸 <나는 누구인가>는 영성과 수행서의 고전으로 지금도 널리 읽히고 있다.
 
지난해 인도에서 귀국해 경기도 안성 도피안사에 머물며 정리해 최근 발간된 <어머니, 스님들의 어머니>(도피안사 펴냄) 는 그의 유작이 됐다. 이 책은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과 고산 스님을 비롯한 19명의 필자의 공저인데 고인은 티베트 불교의 고승 미라레파의 어머니와 달라이라마의 어머니 부분을 썼다. 고인은 지난 25일로 예정됐던 봉정식에 대표필자로서 불전에 이 책을 올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산 스님의 갑작스런 열반으로 송광사 문도이자 오랜 도반인 봉인사 주지 적경 스님이 고인의 영정을 들고 대신 봉정했다.
 
지산 스님은 어서 꿈을 깨고 싶었을까. 이 책에 쓰인 그의 글은  ‘미라레파의 어머니’와는 관계가 없어보인다 싶은 ‘삶은 꿈이다’라는 소제목으로 시작되고 있다. 그가 <금강경> 구절을 빌어 쓴 글은 이렇다.
 
 “ 일체유위법  一切有爲法  모든 유위법은
   여몽환포영 如夢幻泡影  꿈,환,물거품,그림자 같고
 여로역여전 如露亦如電  이슬 같고 번개 같으니
 응작여시관 應作如是觀   마땅히 이와 같이 살필지니라.
 붓다께서는 <쌍윳다니카야>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의 시작 없는 과거로부터 윤회해 오면서 고통으로 흘린 눈물을 모아 놓으면 저 바다의 물보다 많을 것이다. 또한 죽으면서 남긴 뼈무더기들을 모아 놓으면 저 수미산보다 높을 것이다.…’

 삶은 꿈이다.…하지만 여간해선 깨어나지지 않는 꿈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