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교와 창암 글씨에 미치다
2005년 8월 10일 오마이 뉴스
이용진 기사
저자 최준호
한국화가이자 옥과미술관 관장인 일목(一木) 최준호(崔峻豪)씨가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와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 1770~1847)의
유묵을 탈초하고 해제한 < 원교와 창암 글씨에 미치다 > (한얼미디어 刊)를 출간하였다.
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
중국에까지 필명을 떨쳤던 창암 이삼만.
이 두 명필은 내로라 하는 명가에서 태어났지만, 유배와 가난으로 점철된 고난의 생을 살아갔다.
그러나 서(書)에 대한 열망과 노력은 난세를 견디게 한 마지막 길이었고, 생을 바쳐 그 길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글씨'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펼쳐 보여준 대가로서의 족적을 남겼다.
두 명필이 한 권에 함께 글씨를 남긴 이 희귀한 유묵첩을
최준호 관장이 탈초하고 해제하여 출간하였다.
대가의 유묵을 탈초, 해제한 책이 드문 시점에서 나온 이 책은
원교와 창암의 예술세계에 심취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한국서예사에 두 분이 어떻게 자리매김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해준다.
- 이번 저서는 심도 깊은 인문학적 향기를 내포한 서예 출판이 드문 시대에
두 명필을 현재로 불러내어 그 진면목을 보여준 의미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 원교창암유묵 > 은 어떤 서첩입니까?
"이 서첩은 아산 조방원 선생께서 40년 동안 소장해온 것으로,
접어 놓았을 때 가로 31.3cm, 세로 42.6cm, 두께 3cm, 무게 2.7kg이며,
표지를 제외하고 앞뒷면을 합쳐 58면의 병풍식 서첩으로, 펼치면 940cm에 이릅니다.
원교 선생이 앞쪽 30면에 걸쳐 112자를 썼고, 그 뒤를 이어 28쪽에 걸쳐
창암 선생이 발문을 포함 110자를 썼습니다.
원교 선생이 먼저 쓰고, 비워져 있는 부분을 창암 선생이 채워 넣은 것입니다.
두 대가 모두 독특한 필법과 장법으로 물 흐르듯 이 서첩을 채우고 있습니다.
또한 창암 선생은 서첩을 사이에 두고 원교 선생을 '흠모'하면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듯이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원교와 창암 글씨의 장법, 구성, 흐름이 얼추 맞아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흠모하는 마음, 곧 원교 선생을 따르려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이며,
그것이 이 서첩의 가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원교창암유묵첩.
앞뒷면을 합쳐 58면의 병풍식 서첩으로, 펼치면 그 길이가 940cm에 이른다.
- < 원교창암유묵 > 이 < 원교와 창암 글씨에 미치다 > 로
출간되기까지의 과정을 말씀해 주십시오
"이 서첩은 아산 선생이 1960년대 구입하여 보관해오던 것인데,
1992년경부터 가끔씩 선생께 들르면 특별히 아끼면서 보여주셨습니다.
구한 내력을 말씀하시면서 '보면 볼수록 의미가 담겨져 있는 서첩'이라고 하시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7, 8년 전 아산 선생께서 '완상과 농첩의 즐거움을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셨고, 그래서 지난해 말 영인본 제작을 구체적으로 진행해 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최소한 첩의 내용은 탈초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복사본을 가지고 탈초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 여기고 시작했는데, 탈초만 7개월이 걸렸으니
탈초 과정이 지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92쪽의 '貼(첩)'의 경우는 막판 인쇄 과정에서
인쇄기를 세워놓고 바로잡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貼'자는 창암 선생의 고급 한자 구사능력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한데,
우리는 흔히 '帖(첩)'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두 의미는 미세하면서도 분명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즉, '帖'은 '묶어 놓은 책'의 뜻으로 얇게 붙인 경우에 씁니다.
반면 '貼'은 '어디에 붙여 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창암 선생의 마지막 의도를 놓치고 지나갈 뻔 한 것이죠.
그러다가 탈초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해제를 시작하였습니다.
해제 과정에서 원교와 창암의 '서결'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의 서결을 보면서 주요 골자가 서결에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서결'은 단락이 지어져 있는데, 단락의 근원은 어디인가를 찾기 시작하였고,
'서결'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가,
혹 이 서첩을 통하여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없는가 하는 것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단행본 출간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 탈초, 해제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원교, 창암 초서의 필획이 일반적인 경우와 다른 서체가 많았습니다.
한편 문구가 원문과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 서첩의 가장 앞에 원교 선생이 쓴
'口諷牛毛 心麟通角'은 종밀(宗密, 780~841) 선사의
< 금강반야경소론찬요(金剛般若經疎論纂要) > 에 나오는 문구로,
원문에는 '麟(린)'과 '通(통)'의 위치가 바뀌어 있습니다.
의문이 생겨 서첩을 자세히 관찰하였습니다.
혹 후대 사람이 서첩을 손질하는 과정에서 순서가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서첩의 연결 상태는 처음 만들어진 그대로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원교 선생은 '麟(린)'과 '通(통)'을 바꿔 썼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혹 착각을 하였을 수도 있고, 혹 알면서도 그렇게 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도달한 것이 바로 '농묵(弄墨)'이었습니다.
서첩 전체가 갖는 분위기는 '농'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농'은 '가지고 놀다'라는 뜻이지만, 그 안에는 옛 선비들의 단아한 아취가 담겨 있습니다.
선비들은 먹과 벼루를 가지고 '농'했고, 인장을 가지고 '농'했습니다.
따라서 틀리게 썼다고 해서 틀렸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를 정립하는 데 가장 어려웠습니다.
원교 선생의 글씨 특징 중 하나가 신장(伸張),
즉 '길게 늘임'인데, 56쪽의 도판에 나오는 '連'자는
일반적인 초서는 첫 시작 획 길이가 비교적 짧은데,
원교 선생은 첫 시작 획을 유난히 길게 신장하였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다른 서예가들에게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대목이어서
두 사람의 필체를 알지 못하면 쉽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원교창암유묵첩.
접었을 때 가로 31.3cm, 세로 42.6cm, 두께 3cm, 무게 2.7kg이다.
- 이 유묵첩을 탈초, 해제하면서 원교, 창암, 그리고 아산 선생이
투사되고 중첩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떤 느낌이 드셨습니까?
"처음에는 확대 복사본을 가지고 작업을 하다가,
나중에 원본을 가져다 두 달 정도 완상(玩賞), 농첩(弄帖)을 하였는데, 보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원본을 볼 때만이 가질 수 있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교 선생은 스스로 '농'을 하였고,
창암 선생은 원교 선생의 글씨를 많이 구해보았다는 것이 느껴지더군요.
서첩을 구한 후 계속 완상하면서 흠모하는 마음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결국 서가로서의 예술정신, 창작의욕을 일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산 선생 역시 '완상과 농첩'하였을 것입니다.
원본과 동일한 형태의 영인본을 만들려고 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라 하겠습니다."
- 원교 이광사는 옥동 이서에서 출발하여 공재 윤두서, 백하 윤순으로 이어지는
동국진체를 완성하였으며, 진·초·예·전서에 모두 능했고,
그의 독특한 서체인 '원교체'를 이루었습니다.
창암 이삼만은 중국에까지 그 필명을 떨쳤고, 독창적인 서풍으로 고유색을 내함한
그만의 독특한 '창암체'를 완성한 명필로 유명합니다.
이 서첩에서 드러나는 두 분 서체의 특징을 말씀해 주십시오
"원교 선생의 글씨는 자획이 건강하고 웅장하며, 기상이 빼어나면서
그러한 가운데 유려함이 돋보입니다. 단아하면서도 교(巧)합니다.
장법 구성에 있어서 다른 서가와 달리 신장해서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진·초·예·전서에 모두 능했을 뿐만 아니라, 산수·인물·초충 등에서도 뛰어났습니다.
창암 선생은 유려하면서 신들린 듯한 운필을 보여줍니다.
갈필(葛筆), 죽필(竹筆), 앵우필(鶯羽筆) 개발 등 민중적인 필기구를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혈주어지면(氣血注於紙面)', 즉 기와 혈이 운필하는 대상인 지면 위에
천연스럽게 스미고 완전히 배어 들어가 합일되도록 운필하였습니다.
두 분의 글씨에는 교(巧)와 졸(拙)이 각각 나타나기도 하고,
또 교와 졸함이 함께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 서첩에는 이러한 두 부분이 다 내함되어 있습니다.
두 분의 글씨를 한 마디로 말하면
"佰喈 骨氣洞達 元常 絶倫多奇
(백개는 골기가 막힘없이 통하고, 원상은 기이함이 비길 데가 없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암 선생이 쓴 '서결'에 나오는 이 문구는 백개(채옹)와 원상(종요)의 글씨를 말하는 것이지만,
두 분을 얘기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책 본문 가운데 일부
- 원교 이광사와 창암 이삼만은
'한국 서예의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는 시기에 활동했던 대가입니다.
추사 김정희에 비해 두 분의 예술세계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서예사에서 두 분이 차지하는 위상과 가치는 어떠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우선 수집가, 호사가, 감상가들이 추사 선생의 글씨에만 너무 치우쳐 있다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원교는 동국진체 완성자로 원교체를 이루었고,
창암은 창암체를 이룬 자주적인 글씨체를 완성한 서가입니다.
추사 선생에 비해 두 분은 열악한 환경이었음에도 극히 자주적이고 독특한 서체를 완성하였습니다.
두 분이 있었기에 추사 선생이 한국서예를 더욱 크게 꽃 피울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또한 원교, 창암 두 선생은 각기 '서결(書訣)'을 저술함으로써 서예이론 정립에도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것만으로도 한국서예사에 큰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대만 유학 중 왕베이위에(王北岳) 교수에게서 전각을 배웠고,
관련 논문도 다수 발표하였습니다.
한국화가로서는 드문 예인데, 어떤 동기에서 비롯되었는지요?
"평소 한국화를 하기 위해서는 한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였습니다.
입학 후 전각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전각 수업을 들었습니다.
전각은 전각 외에도 문자학, 금석학, 한문학, 고고학 등을 광범위하게 공부해야
포괄할 수 있는 예술이었습니다. 3년간 왕베이위에 교수에게서 배우면서 전각에 심취하여
500여 과 정도를 새겼습니다. 대만, 중국의 경우 시·서·화에 두루 능하여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그에 대한 기초적인 학문연구가 필요합니다.
-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나온 지는 오래되었고,
인문분야 저서의 매출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출간 후 주위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인문학의 위기이기도 하겠지만, 기초학문의 위기라고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책이 출간된 후 주변 분들로부터 칭찬과 격려를 듣기도 하였으나,
학문적 오류나 잘못된 부분이 없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은 사실입니다.
이 책이 지닌 의미라면 탈초, 해제집이 보기 어려운 시점에서 출간되었다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이용진 기자
덧붙이는 글
최준호씨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국립 대만사범대학교 미술대학원을 졸업했다.
대만 유학중 왕베이위에(王北岳) 교수에게 전각을 배웠고, 지금까지 세 차례의 한국화 개인전을 열었다. 저서로 『齊白石篆刻藝術的硏究』(臺北, 文史哲出版社, 중문판, 1992)이 있으며,
「黃公望 富春山居圖의 진위문제」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현재 옥과미술관 관장, 광주대학교 겸임교수, 재단법인 아산미술문화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월간 서예문인화 > 2005년 8월호에도 실렸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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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서예 이론 가운데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가장 최초의 문장은 동한(東漢)시대 최원(崔瑗)의『초서세(草書勢)』이다. 그 후 조일(趙壹)의『비초서(非草書)』, 채옹(蔡邕)의『필론(筆論)』,『구세(九勢)』,『필부(筆賦)』,『전세(篆勢)』등이 연이어 탄생하였다. 서예 이론의 탄생과 발전은 동한시대의 서예가 급속하게 발전하여 크게 부흥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동시에 서론의 출현은 서예 미학 사상이 자각되기 시작한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 진나라 시대 이후에는 서사 행위가 실용의 효용과 동시에 심미적 표현 수단으로 인식되어 감상을 위한 창작이 성행하였다. 이와 같은 서예 창작 풍습은 서예 미학 이론이 탄생하는데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비록 동한시대에 나타난 서론은 단편적이고 산발적이지만 그 가운데는 후대 서론에서 나타나고 있는 기본적 사유 방식과 심미 범주가 함축되어 나타나고 있다.
『초서세(草書勢)』,『전세(篆勢)』,『구세(九勢)』,『초서세(草書勢)』,『자세(字勢)』등의 제목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듯이 한위(漢魏)와 서진(西晉)시대의 서론에서 집중적으로 이야기한 것은 ‘서세론(書勢論)’이다. 당시의 서학자들은 서예와 자연 만물의 관계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토론하였다. 그들은 서체의 심미적 범주를 천지 만물의 형상과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동태적 심미 정수에서 찾았다. 이는 사물의 형태에 내재된 미학을 추구한 ‘법상(法象)’ 미학을 서예 창작의 근본으로 이해한 미학 사상이다. ‘법상(法象)’은 창작 주체가 인식한 자연 만물의 형상에 내재된 심미적 의의를 체현할 때 비로소 미학적 가치가 부여된다는 것을 주장한 미학 사상이다.
한자의 모든 서체는 각각 독립적 형태를 취하고 있는 듯 하면서도 모두 다른 서체의 특징을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변화와 통일의 조화로운 구성이 서예의 형태미 가운데 중요한 성분이 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각 서체의 필획과 결구를 표현하는 것은 서예 창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건이다. 곽점초간의 운필은 매우 결구에 비해 더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 붓의 끝을 최대한 이용하여 각 필획에서 필세의 흐름이 멈추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각각 독립된 글자이지만 글자끼리의 기운이 매우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채옹은『구세(九勢)』에서 “운필에서 필세는 끊어지거나 막히면 안 된다.(勢來不可止, 勢去不可遏)”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와 같은 것을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필세는 필획의 자태인 동시에 기운이고 생명으로 형태미와 내재된 심미적 범주를 모두 갖추고 있는 서예미의 중요한 구성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蔡邕《筆論》
書者,散也。欲書先散懷抱,任情慾性,然後書之。若迫于事,雖中山兎豪不能佳也。夫書,先黙坐靜思,隨意所适,言不出口,氣不盈息,沉密神彩,如對至尊,則無不善矣。
爲書之體,須入其形。若坐若行,若飛若動,若往若來,若臥若起,若愁若喜,若蟲食木葉,若利劍長戈,若强弓硬矢,若水火,若雲霧,若日月。縱橫有可象者,方得謂之書矣。
蔡邕《九勢》
夫書肇于自然,自然旣立,陰陽生焉,陰陽旣生,形勢出矣。藏頭護尾,力在字中,下筆用力,肌膚之麗。故曰:勢來不可止,勢去不可遏,惟筆軟則奇怪生焉。
凡落筆結字,上皆覆下,下以承上,使其形勢遞,想映帶,無使勢背。
轉筆,宜左右回顧,無使節目孤露。
藏鋒,點畫出入之迹,欲左先右,至回左亦爾。
藏頭,圓筆屬紙,令筆心常在點畫中行。
護尾,畫點勢盡,力收之。
疾勢,出于啄磷之中,又在竪筆緊趯之內。
掠筆,在于趯鋒峻趯用之。
澀勢,在于緊駃戰行之法。
橫鱗,竪勒之規。
此名九勢,得之雖無師授,亦能妙合古人,須翰墨功多,卽造妙境耳。
蔡邕《篆勢》
字畫之始,因于鳥迹,蒼頡循聖,作則制文。體有六篆,要妙入神。或象龜文,或比龍鱗,紆體效尾,長翅短身。頹若黍稷之垂穎,蘊若蟲蛇之棼縕。揚波振激,鷹跱鳥震,延頸協翼,勢似凌雲。或輕擧內投,微本濃末,若絶若連,似露緣絲,凝垂下端。從者如懸,衡者如編,杳杪邪趣,不方不圓,若行若飛,蚑蚑翾翾。
遠而望之,若鴻鵠群游,絡繹遷延。迫而視之,湍漈不可得見,指撝不可胜原。硏桑不能數其詰屈,离婁不能睹其隙間。般倕揖讓而辭巧。籒誦拱手而韜翰。處篇籍之首目,粲粲彬彬其可觀。擒華艶于紈素,爲學藝之范閑。嘉文德之弘蘊,懿作者之莫刊。思字体之俯仰,擧大略而論旃。
제4절 蔡邕의 서예 미학 사상――法象 미학의 집대성
동한(東漢)시대의 서론과 서예 미학은 채옹(蔡邕)에 이르러 크게 성숙하였다. 현재 전하고 있는 채옹(蔡邕)의 여러 서론에 대해서는 완전한 고증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진위(眞僞)의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의 목적은 고대 서론에 대한 진위의 고증이 아니라 서론에 나타난 미학 사상을 연구하는 것이기 때문에《필론(筆論)》,《구세(九勢)》,《전세(篆勢)》,《필부(筆賦)》등이 채옹(蔡邕)의 서론이라는 전통적 이해를 근거로 한다.
채옹(蔡邕)은《전세(篆勢)》에서 한자의 탄생을 허신(許愼)이나 최원(崔瑗) 등이 주장한 것과 같이《주역(周易)》을 근거로 하는 전통적 학술 이론을 바탕으로 이해하였다. 이는 숭고상상(崇古象象)의 반영인 동시에 심근의식(尋根意識)의 표현으로 채옹(蔡邕)이 서세(書勢)의 심미적 범주를 인식하는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그는 서세의 심미적 범주를 자연 만물의 형상과 그 심미적 정수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이는 허신(許愼)이《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서자여야(書者如也)”라 하고 최원(崔瑗)이《초서세(草書勢)》에서 초서의 서세을 토론하면서 “관기법상(觀其法象)”이라 한 것과 같은 개념으로 당시의 서세론이 ‘법상(法象)’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채옹(蔡邕)의 미학 체계에서 ‘법상(法象)’은 전서나 초서의 서세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서체의 서세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이었다. 그가《필론(筆論)》에서 “천지 만물의 상형의의를 표현하여야 비로소 서예라고 할 수 있다.(縱橫有可象者, 方得謂之書矣.)”라 한 것은 서예의 창작은 자연 만물의 ‘상(象)’을 표현할 때 비로소 서예의 심미적 가치가 인정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채옹(蔡邕)은 서예의 창작에서 “형(形)”으로 들어가는 조건을 제시하였으며 “상(象)”의 심미적 경지를 요구하였다. 이와 같은 미학 사상은 서예의 필획과 조형의 상형성은 물론 의상성(意象性)까지 강조한 것이다. 이는 문자의 근본이 자연 만물의 형상에 있기 때문에 서예와 자연 만물의 형상 사이에는 필연적인 연관이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였다. 채옹(蔡邕)이 제시한 ‘형(形)’과 ‘상(象)’의 미학은 선진(先秦)시대부터 토론된 철학적 개념을 서예 미학으로 응용한 것이다. 도가(道家)에서는 우주 만물의 상징을 ‘도(道)’라 하고 ‘상(象)’, ‘물(物)’, ‘정(情)’이 ‘도(道)’를 형성하고 있는 조건으로 이해하였다. 이는 ‘도(道)’에 존재하는 ‘상(象)’, ‘물(物)’, ‘정(情)’을 서로 다른 개념으로 이해한 것이다.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도(道)’는 잠시도 멈추지 않은 자연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象)’, ‘물(物)’, ‘정(情)’의 개념은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 규율 속에서 생동적인 변화를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역경(易經)》에서도 ‘형(形)’과 ‘상(象)’을 자연 만물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임과 동시에 항상 변화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또한 ‘상(象)’은 사물의 형태가 아니라 사람의 감관(感官)이 천지 만물의 형상(形象)에서 찾아낸 의미적 ‘상(象)’이다. 우주 만물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체현한 형상인 ‘효(爻)’와 ‘괘상(卦象)’이 음양의 움직임을 부호로 표현한 것처럼 ‘상(象)’은 항상 변화하는 것으로 자연 만물의 움직임인 ‘도(道)’와 같은 것이다. ‘도(道)’의 상징인 ‘상(象)’은 ‘형이상(形而上)’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채옹(蔡邕)은 이상과 같은 철학 사상을 바탕으로 서예의 창작에서 “입기형(入其形)”의 조건과 “유가상(有可象)”의 심미적 경지를 요구한 것이다. 따라서 그가 요구한 심미적 경지인 “유가상(有可象)”의 ‘상(象)’은 객관적 형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창작 주체의 감관(感官)이 인식한 ‘의상(意象)’임을 알 수 있다. 원(元)나라 시대의 정표(鄭杓)가《연극(衍極)》에서 “모든 필획은 의상(意象)을 표현하였다.(縱橫皆有意象.)”라 하여 채옹(蔡邕)이 말한 “縱橫有可象者, 方得謂之書矣”의 뜻을‘의상(意象)’으로 해석한 것으로도 이와 같은 이해는 충분히 증명된다. 채옹(蔡邕)이 ‘법상(法象)’의 미학 관점에서 출발하여 서예의 심미적 경지에 이르는 조건으로 이해한 ‘형(形)’과 ‘상(象)’은 독립된 미학 개념은 당나라 시대에 이르려면 복합된 미학 개념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의상(意象)’에 대한 개념도 더욱 분명해짐과 동시에 서예 미학을 토론하는 중요한 미학 범주로 자리잡는다.
채옹(蔡邕)의 서론에서 서세(書勢)의 심미적 근본으로 중시된 ‘법상(法象)’의 미학은 매우 함축된 언어로 표현되었으며 우주 만물의 근본과 발전 과정을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그는《구세(九勢)》에서 서예의 근본을 ‘자연(自然)’으로 이해하고 서예의 형세는 음양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그 심미적 가치가 존재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는 우주 만물의 규칙적 표현을 ‘음양(陰陽)’으로 이해한 철학 사상을 바탕으로 한 미학 사상이다. 한(漢)나라 시대의 유학자(儒學者)들 사이에는 음양에 대한 철학 사조가 크게 성행하였다. 채옹(蔡邕)이 서예 미학을 음양설을 바탕으로 설명한 것은 당시에 성행한 음양 철학 사조의 영향을 깊게 받은 결과이다. 천지 자연은 음양을 낳고 또 음양이 조화함으로써 자연이 존재하는 것과 같이 서예의 창작도 음양의 규율을 체현할 때 비로소 형세(形勢)가 형성된다는 것이 서예의 형세에 대한 채옹(蔡邕)의 관점이다. 음양을 형세의 심미적 조건으로 인식한 미학 사상은 당시 천지 자연이 나타낸 일체의 현상을 음양으로 이해한 철학 사조와 상통하는 사상이다. 채옹은 서예도 천지 자연이 표현하는 하나의 현상 영역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서예의 형세(形勢)는 음양이 구비되어야 비로소 심미적 가치가 부여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그가《구세(九勢)》에서 결자(結字), 전필(轉筆), 장봉(藏鋒), 장두(藏頭), 호미(護尾), 질세(疾勢), 약필(掠筆), 삽세(澀勢), 횡린(橫鱗)의 서세를 모두 음양 사상으로 설명한 것은 서예의 창작에서 필획(筆劃), 결자(結字), 결체(結體), 장법(章法) 등의 영역에서 음양의 조화를 심미적 이상의 경지를 표현하는 중요한 조건으로 인식한 것이다. 이상의 분석을 근거로 할 때 채옹(蔡邕)은 음양과 서세를 상보상성(相補相成)하는 변증 개념으로 인식하였으며 그 근본을 ‘자연(自然)’으로 이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서예는 자연으로부터 시작한다.(夫書肇於自然矣.)”라고 한 것은 곧 서예의 심미적 근본은 천지 자연에 있으며 음양과 형세(形勢)가 상보상성(相補相成)할 때 이상적 심미적 경지가 표현된다는 것을 주장한 미학 관점이다. 채옹(蔡邕)이 서예의 근본으로 이해한 ‘자연(自然)’은 자연 만물의 외형이 아니라 그 형상에 존재하는 심미적 정수이다. 이는 그가《전세(篆勢)》에서 전서의 서세(書勢)를 자연 만물의 심미적 정수에 비유한 것으로도 잘 알 수 있다. 채옹(蔡邕)이 제기한 ‘서예는 자연에서 시작한다.(書肇自然)’의 미학 관점은 서예 미학사에서 가장 수준 높은 생성 미학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書肇自然’의 생성 미학을 바탕으로 음양의 조화를 강조한 채옹(蔡邕)은 서예 미학사에서 처음으로 ‘세(勢)’와 ‘역(力)’의 미학 범주를 제시하였을 뿐 아니라 서예의 창작에 매우 중요한 심미 범주로 인식하였다. 그가《구세(九勢)》에서 ‘구세(九勢)’를 설명한 이론 가운데 ‘결자(結字)’, ‘호미(護尾)’, ‘질세(疾勢)’, ‘삽세(澀勢)’의 조목에서 ‘세(勢)’와 ‘역(力)’의 범주를 강조하고 또 서론의 이름을《구세(九勢)》라 한 것 등은 서예의 ‘세(勢)’와 ‘역(力)’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과 동시에 그 심미적 범주를 중시한 것이다. 이는 채옹(蔡邕)의 미학 체계에서 ‘세(勢)’와 ‘역(力)’의 심미 범주는 음양 조화의 구체적 체현이며 창작 주체가 자각적으로 표현한 ‘필의(筆意)’이다. ‘세(勢)’와 ‘역(力)’의 심미 범주에 대한 인식은 우주 자연과 만물의 모든 움직임은 ‘세(勢)’와 ‘역(力)’이 존재한다는 철학 사상을 근본으로 하였다. ‘세(勢)’는 ‘역(力)’의 함축이며 내재된 심미 범주이고, 또 ‘역(力)’은 ‘세(勢)’의 작용이며 표현으로 두 개념은 상보상성(相補相成)하는 밀접한 심미 범주이다. 채옹(蔡邕)은 이와 같이 우주 만물의 모든 현상은 생동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그 생동의 표현 방식 가운데 중요한 성분이 ‘세(勢)’와 ‘역(力)’이라는 철학 사상을 서예 미학에 응용하였다. 그가 “필력이 있어서 글자에 힘이 있어야 피부와 같은 아름다움이 있다.(力在字中, 下筆用力, 肌膚之麗.)”라 하고 “필세는 멈추지 않아야 하며 붓이 부드러워야 다양한 변화가 생겨난다.(勢來不可止, 勢去不可遏, 惟筆軟則奇怪生焉.)”라 한 것은 ‘세(勢)’와 ‘역(力)’을 근본으로 하는 생동미(生動美)가 서예의 심미적 경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한 것이다. ‘세(勢)’와 ‘역(力)’은 서예의 동태적(動態的) 심미 범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성분이기 때문에 ‘세(勢)’와 ‘역(力)’의 범주를 떠나서는 서예의 심미적 가치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채옹(蔡邕)의 미학 관점이다. 이는 고대의 사람들이 ‘勢’자와 ‘藝’자를 구별하지 않고 ‘埶’자로서 ‘세(勢)’와 ‘예(藝)’의 뜻을 모두 표현한 것으로도 예술 창작의 심미적 가치는 ‘勢’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연 만물의 생동적 표현인 ‘세(勢)’와 ‘역(力)’이 서예 창작의 미학 관점으로 인식되는 것은 필연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 까닭은 서예의 창작은 창작 주체가 인식한 자연 만물의 심미적 정수를 생동적으로 표현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고대 서론에서 ‘역(力)’은 ‘필(筆)’, ‘근(筋)’, ‘골(骨)’ 등과 호응하여 ‘필력(筆力)’, ‘근력(筋力)’, ‘골력(骨力)’ 등으로 표현되었고 ‘세(勢)’는 ‘필(筆)’, ‘서(書)’, ‘체(體)’, ‘자(字)’, ‘형(形)’, ‘기(氣)’ 등과 다양하게 호응하여 ‘필세(筆勢)’, ‘서세(書勢)’, ‘체세(體勢)’, ‘자세(字勢)’, ‘형세(形勢)’, ‘기세(氣勢)’ 등으로 표현되었다. 이들은 모두 서예의 창작 과정에서 창작 주체가 자각적으로 표현한 필의(筆意)와 서의(書意)의 심미적 범주이다. 채옹(蔡邕)이 ‘세(勢)’와 ‘역(力)’의 심미 범주를 제출하고 그것을 서예 창작의 중요한 심미적 범주로 강조한 후 서예 미학에서 ‘세(勢)’와 ‘역(力)’은 중요한 미학 범주로 자리잡았다.
채옹(蔡邕)은 서예를 창작 주체의 성정을 표현하는 독립된 예술의 한 영역으로 자각하였다. 그는《필론(筆論)》에서 처음으로 서예와 창작 주체의 성정(性情)과의 관계에 대한 미학적 관점을 제시하였다. 서예의 창작을 창작 주체의 감정과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는 ‘표정(表情)’의 예술로 인식하고 창작 주체는 아무런 구속이나 스트레스가 없는 상태에서 회포(懷抱)를 풀어 헤치고 성정(性情)에 따른 자유를 실현할 때 완전한 심미적 경지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그가 강조한 서예의 ‘표정(表情)’ 미학이다. 서예의 창작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은 서예를 실용의 공리적 영역이 아니라 독립된 순수한 예술의 영역으로 완전히 자각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채옹(蔡邕)이 제기한 “서예는 발산하는 것이다(書者, 散也)”의 미학 명제는 예술 창작의 절대적 자유를 중시한 미학 사상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미학 체계에서 ‘산(散)’의 범주는 ‘隨意所適(마음이 움직이는데로 표현하는)’ 즉, 창작 주체의 정서와 감정을 자유롭게 펼치는 것이다. 서예의 창작에서 ‘산(散)’의 경지를 요구한 것은 자유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만사에 억류된 조건에서는 절대로 좋은 창작을 할 수 없다고 강조한 미학 사상이다. 채옹(蔡邕)이 제시한 ‘산(散)’의 창작 미학은 도가(道家)와 유가(儒家)의 사상이 정신의 절대적 자유를 추구한 철학에서 그 근본을 찾을 수 있다.《장자(莊子)․인간세(人間世)》에서 제시한 ‘산목(算木)’, ‘산인(散人)’, ‘심재(心齋)’, ‘좌망(坐忘)’의 철학 관점은 일체의 외부적 조건에 구속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떠한 조작도 하지 않는 ‘무위(無爲)’의 경지를 정신적 이상으로 인식한 사상이다. 채옹(蔡邕)이 서예를 실용의 공리적 효용에 구속되지 않는 순수한 예술로 인식한 것도 이와 같은 철학 사상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채옹(蔡邕)이 제출한 ‘산(散)’의 창작 미학은 서예의 창작에서 마음에 따라 움직이는 자유로운 심리 상태를 중시한 것과 동시에 서예의 표정(表情) 미학을 긍정하고 서예를 독립된 순수 예술로 자각한 것이다. 그가 제시한 창작 미학은 후대의 서예 미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서예의 표정(表情) 미학에 대한 관점은 서예 미학사에서 서예의 예술성에 대한 인식의 방향을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서예의 표정(表情) 미학은 조형(造形) 미학과 함께 서예 미학의 중요한 미학 명제로 토론되었다.
심근의식(尋根意識)을 바탕으로 ‘법상(法象)’을 중시한 미학 사상은 최원(崔瑗)과 채옹(蔡邕)은 서론은 물론 서진(西晉)시대의 서세론(書勢論)에서 나타나는 공통적 특징이다. 서예의 체세(體勢)와 기법(技法), 서예와 작가의 관계, 서예와 자연계 만물의 관계 등에 관하여 토론한 채옹(蔡邕)의 서론은 양웅(揚雄), 허신(許愼), 최원(崔瑗) 등의 미학 사상을 계승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채옹(蔡邕)이 ‘법상(法象)’을 서예의 탄생과 발전은 물론 심미적 범주의 근본으로 인식한 서예 미학은 한(漢)나라 시대의 ‘법상(法象)’ 이론을 집대성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고대 서론에서 상형(象形) 미학을 모든 서체의 심미적 범주의 원천으로 이해한 것은 ‘법상(法象)’를 중시한 동한(東漢)시대의 미학 사상이 끼친 영향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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