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문학의 향기

2008 신춘문예 당선작 / 동화 -귀면와

맑은물56 2008. 1. 7. 21:29

2008 신춘문예 당선작 / 동화

귀면와 / 김 희 철

 

퉁방울눈.날카로운 송곳니…보기만 해도 오싹

보름달이 휘영청 밝았다. 풍경 속의 물고기가 꼬리지느러미를 흔들자 바람이 우수수 떨어졌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풍경위로 귀면와가 보였다. 어쩜 풍경소리는 귀면와의 목소리인지도 모르겠다. 귀면와는 화려한 대웅전의 지붕 네 귀퉁이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땅바닥에서 그를 바라볼 때마다 올려다보아야하므로 늘 고개가 아프다.

얼굴로 말하자면 나도 귀면와만큼 한 몫 하는 강아지이다. 태어나서는 주름자루에 들어간 것처럼 주름투성이였지만 자라면서 몸의 주름은 사라지고 얼굴과 어깨에만 주름이 남은 샤페이 종이다. 백 살 먹은 사람일지라도 내 주름은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나의 주름을 보면 사람들은 제멋대로 웃거나 울거나 귀엽거나 징그럽다고 말했다. 펴고 싶어도 펴지지 않는 주름 때문에 버림받고 떠돌다가 절집까지 오게 되었다. 이런 얼굴로 살게 된 것은 절대로 내 탓이 아니다. 그건 귀면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구도 자신의 모습을 선택할 수는 없다.

어디선가 들릴 듯 말듯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몸 아픈 신음 같기도 했고 마음 아픈 한숨 같기도 했다. 너무 작아서 강아지 귀가 아니라면 잘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등골이 오싹하고 다리가 떨려 대웅전 앞에 그만 똥을 누고 말았다.

귀면와가 퉁방울눈을 꿈틀거리며 끙끙 앓고 있었다. 무서운 중에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는 덜덜 떨리는 다리로 대웅전 앞 계단을 굴러 내려와 귀면와가 보이지 않는 돌 축대 앞에 숨었다.

오들오들 몸을 떨며 웅크리다가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선잠 결에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무불아! 무불이 어데 있느냐. 이리 오너라!”

큰스님인 일봉스님이었다. 눈을 비비고 사방을 둘러보니 동녘 하늘에 새벽빛이 한 가닥 솟아오를 뿐 아직 어두컴컴했다. 스님의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스님이든 시중드는 보살님이든 불공을 드리러오는 신도님이든, 큰스님 앞에서는 얼굴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그들은 큰스님이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꼭두새벽에 큰스님의 부름을 받았으니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쭈뼛거리며 기어 나와 살그머니 귀면와를 쳐다보니 그는 시치미를 떼고 산문 밖을 보고 있었다. 밤중의 신음소리가 생각나서 고개를 숙이고 어기적어기적 스님 쪽으로 걸어갔다. 아무렴 큰스님이 계시는데 귀면와도 날 어쩌지는 못할 것이다.

“욘석이 오늘따라 왜 이리 굼뜨냐. 어여 나오지 못하느냐!”

큰스님의 야단에 실례해 놓은 똥탑 주위를 탑돌이하며 고개를 숙였다.

날 유심히 지켜보던 큰스님이 말했다.

“무불이 너, 절밥 삼년을 먹더니 절 귀신이 다 되었구나. 욘석아! 그런다고 대웅전 앞에 똥을 누면 어쩐단 말이냐! 잘못했으니 벌을 받아야지.”

큰스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상좌스님이 나를 붙잡아 말뚝에 목줄을 매었다. 귀면와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땅만 보고 있으려니 목이 아팠다. 그래서 머리를 들었는데 귀면와가 보였다. 퉁방울눈을 부라리며 날카로운 송곳니로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것만 같았다.

“아직도 날 무서워하느냐…내 마음은 안 보이느냐”

아침예불이 시작되었다. 먼동이 트기 전에 대웅전에서 스님들이 예불하는 시간은 엄숙하고 장엄하다. 내 뒤에 들어온 스님들도 꽤나 있다. 스님이 되기 위해서 절에 오면 신고 온 신발대신 고무신이 주어진다. 스님들이 일제히 한 목소리를 내는 염불소리도 들을만했지만 대웅전 옆문 앞에 줄지어 놓인 고무신들도 볼만했다. 멀리서 보면 고무신들은 민머리 스님들처럼 똑같은 모습이다. 새하얀 고무신 코에는 글자가 쓰여 있다. 불경이 적힌 책의 글자처럼 알아볼 수 없는 글자였다. 나는 까막눈이라서 스님들이 용케도 남의 고무신을 신지 않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정말 심심했다. 뭐 재밌는 장난감이 없을까? 뼈다귀라도 하나 있다면 장난감처럼 실컷 가지고 놀 텐데. 뼈다귀 구경해 본지가 까마득하게 오래되었다. 아, 맘껏 짖지도 못하고 묶여있으니 입이 근질근질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장난감은 보이지 않았다.

큰스님은 적게 가진 것으로도 존경받았다. 옷도 달랑 한 벌 뿐이고, 불공드릴 때 입는 붉은색과 금색으로 빛나는 옷도 절에 두는 옷이다. 그래도 나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다. 내가 가진 거라곤 찌그러진 밥그릇하나 뿐인데 그나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가진 것이 적은 것으로 따진다면 사람은 개한테 배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큰스님 말에 따르면 개는 깨달을 수 없단다. 무불이란 이름을 받을 때 처음 깨달음이란 말을 들었다.

“옛 스님께서 개에겐 불성이 없다고 했으니 없을 무자에 부처불자를 붙여 무불이라 부르겠다. 절밥을 먹게 되었으니 다음 삶에서는 개의 탈을 벗고 부처님 법을 만나 깨달음을 얻으면 인연이 헛되지 않겠지.”

그렇게 새로운 이름을 받았지만 스님들은 말이 없어 이름이 별로 쓸모가 없었다. 더구나 스님들은 짖는 것을 싫어해서 항상 조용해 주기를 바란다. 짖어본 지가 하도 오래되어 이러다가 짖는 걸 잊어버리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스님들의 예불소리가 어둠에 잠겨있던 고무신들을 하나하나 읽어내기 시작했다. 대웅전 한 쪽이 하얀 눈이 쌓인 것처럼 밝아왔다. 그 중에서 가장 깨끗하고 빛나는 고무신은 일봉스님 것이었다. 오직 큰스님의 고무신만이 대웅전 정문 앞의 댓돌 위를 차지할 수 있다. 큰스님의 고무신에는 글자가 적혀있지 않았다. 신발마다 글자가 적혀있으니 글자가 적혀있지 않는 것이 표시가 되었다. 글자가 없는 신발이 한 켤레 더 있었다. 지워진 건지 원래부터 없는 건지 무봉스님의 고무신도 아무런 표시가 없다. 그를 걸레스님이라고 부르는 이도 많다. 일봉스님이 부지런하고 가장 높은 일등스님이라면, 무봉스님은 게으르고 가장 낮은 꼴찌스님이었다. 무봉스님에게 말을 거는 이도 없다. 그래선지 그는 가끔씩 내게 말을 걸곤 했다.

“개 이름이 무불이 뭐야. 그냥 생긴 대로 외국 개답게 쫑이라고 부르면 되지.”

나도 쫑이 좋다. 누가 부르면 귀가 쫑긋해지니까.

예불이 끝남에 따라 먼저 큰스님이 앞문으로 나오고 다른 스님들이 옆문으로 줄지어 나왔다. 맨 나중은 보나마나 무봉스님이었다.

그 많은 스님들이 내 코앞을 그냥 스쳐갔으나 오직 무봉스님만이 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잘못을 했기에 여기 묶여있냐?”

나는 대답대신 귀면와를 올려다보았다. 스님은 내 마음을 알아들었다는 듯 바보처럼 웃었다.

“이제야 눈치 챘니? 아주 옛날에 이 절을 처음 지었을 때 이 자리에 살고 있던 귀신을 잡아서 기와장 속에 가두었다더라. 저 귀면와는 잡혀온 귀신이니 조심해라.”

무봉스님이 목줄을 풀어주고 갔다. 일봉스님이 알면 벌을 받을까싶어 한동안 말뚝을 떠나지 못했다.
해가 떠올라 따스한 햇살이 몸을 감싸자 졸음이 밀려왔다. 얼마나 머리가 무거웠는지 모른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알록달록한 신발들이 눈앞을 어지러이 오고갔다. 더불어 맛있는 냄새가 홍수를 이루었다. 온갖 향기로운 과일과 나물, 떡, 밥 등이 줄지어 대웅전으로 들어갔다. 엄청나게 많은 신발들이 마당 한쪽을 채웠다. 아름다운 꽃밭이 생겨난 것만 같았다. 스님들의 고무신과는 달랐다. 큰 불공이 있는 날인가 보았다. 이런 날엔 잘 얻어먹기 마련이어서 꼬리가 세차게 흔들렸다. 개들은 꼬리 때문에 마음을 숨기기가 너무 어렵다.

곧이어 스님들의 고무신 행렬이 이어졌다. 꽃밭 한쪽에 새하얀 눈밭이 생겨났다. 대웅전 안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모두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는데 맨 나중에 큰스님이 의젓하고 당당하게 걸어와 대웅전 앞문으로 들어갔다. 큰스님의 신발이 배꽃처럼 댓돌 위에 올라앉았다.

목탁소리와 염불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음식냄새에 나도 몰래 대웅전 앞으로 발걸음이 옮겨졌다. 불상 앞에 온갖 음식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큰스님이 가운데 상위에 우뚝 앉아있었다. 절에서는 음식을 아무 때나 얻어먹을 수 없다. 음식을 만드는 공양간으로 달려가 봐도 마찬가지였다. 음식물을 어찌나 철저하게 간수하던지 밥 한 톨도 주워 먹을 수는 없다. 남기는 음식물도 없어서 내 밥도 찌꺼기가 아니고 갓 지은 밥을 따로 퍼주곤 했다.

놀라운 장난감이 눈에 보였다. 항상 보아온 것이어서 장난감인 줄도 몰랐다. 그것은 신발이었다. 신발을 갖고 놀면 혼난다는 걸 알면서도 참을 수 없었다. 왜 이제야 이런 좋은 장난감을 발견했는지 모르겠다.

신도들의 신발이 장난감이라면 스님들의 고무신은 뼈다귀로 보였다. 특히 큰스님의 고무신이 가장 맛나게 보였다. 절에 들어온 이후로 구경도 못하던 뼈다귀였다. 두 짝을 한꺼번에 덥석 물고는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러나 뜯어 삼킬 수는 없었다. 근질근질한 입으로 먹지도 못하는 뼈다귀를 물어 멀리 던져버렸다. 하필이면 대웅전 옆 신도들의 신발로 이루어진 꽃밭으로 떨어졌다. 그곳엔 나비도 있었고 벌도 있었다. 마음껏 구를 수 있는 눈밭도 있어 신나게 뒹굴었다.

순식간에 장난감과 뼈다귀들이 섞여 뒤죽박죽되고 말았다. 덜컥 겁이 났다. 지금껏 장난감 한번 사주지 않은 스님들 잘못이 크다. 스님들 손에는 모두 장난감이 들려있다. 그들은 목탁이라고 말하지만 아무리 봐도 장난감처럼 보인다.

갑자기 ‘할!’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공 끝에는 큰스님의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의 끝은 어김없이 할!이라는 큰소리였다.

“그 소리가 모두의 어리석음을 깨우는 방망이란다. 낄낄.”

언젠가 무봉스님이 말해주었는데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좌우지간 큰일이 나고 말았다. 가지런히 있을 때는 아름답던 신발들이 뒤섞이는 순간 쓰레기 더미가 되고 말았다.

신도들과 스님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여기저기 어지럽게 뒤섞여 있는 고무신을 보고 스님들은 주위를 둘러보며 나를 찾았다. 말하지 않아도 나를 범인으로 단정한 모양이었다. 난 재빨리 담벼락 뒤로 몸을 숨겼다.

큰 소동이 일어났다. 먼저 신도들이 맨발로 뛰쳐나와 신발을 찾았지만 더욱 흐트러질 뿐이었다. 신도들은 자기 신발보다 큰스님 고무신을 한쪽씩 찾아 옷깃으로 내 침과 먼지를 닦아낸 다음 조심스럽게 댓돌 위에 올려놓았다. 큰스님은 고무신을 신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스님들은 고무신을 한곳으로 모아 일일이 짝을 맞추었다. 상좌스님이 내게로 다가오더니 귀면와가 빤히 바라보이는 곳에 목줄을 묶어두고 가버렸다.

스님들이 차례대로 고무신을 찾아 신고 떠나자 그때서야 신도들은 자기 신발을 찾아 신었다. 그 많던 신발들이 사라지고 오직 더러운 고무신 한 켤레만이 뒤집힌 채 나뒹굴고 있었다. 무봉스님의 고무신이었다.

이윽고 무봉스님이 대웅전에서 나왔다. 그는 동작이 느리고 굼떴다. 다른 스님들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고무신을 찾았지만 무봉스님은 달랐다. 꼴찌 스님은 고무신 코를 확인하지도 않고 신어버렸다. 찾아보지도 않고 그냥 신었다. 몸을 길게 늘어뜨리고 달아나던 그림자가 무봉스님 고무신에 꾸욱 밟히고 말았다.

나도 몰래 컹컹 짖고 말았다. 짖는 소리에 스스로 깜짝 놀랐다. 너무도 오랜만에 짖어보았다. 아직 짖는 걸 잊지 않았다. 내게도 목소리가 있었던가? 우렁찬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모두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귀면와만이 얄밉게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걸어가던 무봉스님이 몸을 돌려 내게로 다가왔다.

“큰스님 신발은 오직 몇 사람이 찾아 주었지만, 내 신발은 모두가 힘을 합해 찾아 주었다는 사실을 너 덕분에 알았다. 모두가 자기 신발을 찾아가는 바람에 내 신발을 쉽게 찾지 않았느냐?”

한밤중이 되자 사방이 어두워졌다. 고개를 들면 귀면와가 있을 것이다. 너무 무서워서 오들오들 떨며 앞 다리 사이에 머리를 박았다.

그때 귀면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날 무서워하느냐. 어찌 못생긴 얼굴만 보이고 마음은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겉모습 때문에 여태껏 발길에 채이며 쫓겨 다니던 너라면 날 이해할 줄 알았다. 무봉스님을 보고도 깨달음이 없단 말이냐!”

귀면와가 웃음을 참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날카롭게 돋아난 송곳니와 거친 수염과 치켜 올라간 굵은 눈썹이 보였다. 무섭기만 하던 귀면와가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그는 울고 있지 않았다. 화를 내지도 않았다. 뿔과 퉁방울눈과 송곳니가 그렇게 귀여워 보일수가 없었다. 나의 주름이 꿈틀거리자 그의 퉁방울눈도 꿈틀거렸다. 아, 귀면와가 웃고 있다니. 그는 여전히 머리에 뿔을 세운 채 퉁방울눈을 부라릴 뿐인데 마음대로 그를 생각해버렸다. 앞으로 귀면와랑 힘을 모아 절을 지켜야겠다. 나는 귀면와 앞에서 배를 깔고 다리를 쭉 뻗은 채 늘어지게 잠을 자기 시작했다.




동화 당선소감 / 김 희 철



 “글 쓰는 능력 주신 부모님 감사”



어머니의 필기구는 괭이와 삽과 호미와 낫이었습니다. 기쁨이 넘치면 삽으로 심어 달콤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슬픔이 들이닥치면 낫으로 잘라 땅을 기름지게 하는 퇴비로 만들었습니다. 분노가 치밀어오면 곡괭이로 부수어 고랑 가득 용서가 자라게 하였습니다.

미움이 싹트면 호미로 캐냈습니다. 미움이라는 잡초는 조금만 늑장을 부리면 뿌리를 내리기 일쑤였습니다. 어머니는 종일토록 논밭에서 일하다가 군데군데 물집이 잡혀 집으로 돌아와서는 마술사처럼 치마를 확 걷어 올리고 커다랗게 부풀린 물집을 손수 터뜨렸는데요, 그때마다 가랑이에서 으아앙 아기울음소리가 쏟아지며 어김없이 아이가 나타나는 거였어요.

괭이나 삽을 들고 있다가 낳으면 아들이었고 호미나 낫을 들고 있다가 낳으면 딸이었지요. 연장 몇 개면 거뜬히 수발할 수 있으리라 여겼는지 자그마치 여섯 번씩이나 마술을 펼쳤답니다.

제게 글 쓰는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건 온몸으로 마술을 펼쳐낸 당신을 온전히 대필한 것입니다.

이른 아침 쇳덩어리 리본을 풀어헤치면 쏴하고 한바가지 선물을 안겨주는 수도꼭지와 천천히 달리라며 승용차의 바퀴를 잡아준 과속방지턱과 녹슬어야만 비로소 조이는 힘이 높아지는 녹슨 못과 뻥치려면 나만큼은 쳐야한다고 쩌렁하게 외쳐대는 뻥튀기와 가진 것을 우주만큼 부풀리고 늘어뜨려 야전에서 생존하는 법을 몸소 보여준 호박 씨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어머니의 필기구는 괭이와 삽과 호미와 낫이었습니다. 기쁨이 넘치면 삽으로 심어 달콤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슬픔이 들이닥치면 낫으로 잘라 땅을 기름지게 하는 퇴비로 만들었습니다. 분노가 치밀어오면 곡괭이로 부수어 고랑 가득 용서가 자라게 하였습니다. 미움이 싹트면 호미로 캐냈습니다. 미움이라는 잡초는 조금만 늑장을 부리면 뿌리를 내리기 일쑤였습니다. 어머니는 종일토록 논밭에서 일하다가 군데군데 물집이 잡혀 집으로 돌아와서는 마술사처럼 치마를 확 걷어 올리고 커다랗게 부풀린 물집을 손수 터뜨렸는데요, 그때마다 가랑이에서 으아앙 아기울음소리가 쏟아지며 어김없이 아이가 나타나는 거였어요. 괭이나 삽을 들고 있다가 낳으면 아들이었고 호미나 낫을 들고 있다가 낳으면 딸이었지요. 연장 몇 개면 거뜬히 수발할 수 있으리라 여겼는지 자그마치 여섯 번씩이나 마술을 펼쳤답니다. 제게 글 쓰는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건 온몸으로 마술을 펼쳐낸 당신을 온전히 대필한 것입니다. 이른 아침 쇳덩어리 리본을 풀어헤치면 쏴하고 한바가지 선물을 안겨주는 수도꼭지와 천천히 달리라며 승용차의 바퀴를 잡아준 과속방지턱과 녹슬어야만 비로소 조이는 힘이 높아지는 녹슨 못과 뻥치려면 나만큼은 쳐야한다고 쩌렁하게 외쳐대는 뻥튀기와 가진 것을 우주만큼 부풀리고 늘어뜨려 야전에서 생존하는 법을 몸소 보여준 호박 씨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동화 심사평 / 장 영 우 동국대 교수ㆍ문학평론가



 주제 형상화ㆍ쉽게 풀어낸 교리 ‘훌륭’



올해 신춘문예에 응모한 동화작품은 모두 91편으로 예년과 비슷했다. 동화 창작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최근 현상에 비추어 응모편수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불교신문 신춘문예 심사를 하며 받은 첫 번째 인상은, 응모작의 수준이 대체로 상승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응모자들이 동화를 지나치게 관념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경어체 사용과 동물의 의인화, 또는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황당한 상황설정 같은 것이었다.

동화의 주독자층은, 두말할 것도 없이 어린이다. 그러나 ‘어린이’도 여러 층으로 구분되므로 자기 작품의 주독자층을 좀더 세분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대다수 작품들이 이 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아 아쉽다.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는 부처님’은 천사원에서 생활하던 ‘보리’가 절에 와 처음 크리스마스를 맞으면서 겪는 일을 차분하게 그린 작품이다. 그러나 왜 천사원에서 자란 아이의 이름이 ‘보리’인지에 대해 아무 설명이 없고, 법당에 들어간 ‘보리’가 부처님에게 안마를 해드린다는 사건 설정은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난 어디서 왔을까’는 동생을 보고 싶은 여자아이의 마음을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다. 특히 이 작품에는 ‘삼신할미’와 관련한 설화를 내장하고 있어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읽는 재미가 있지만, 학교에서 성교육을 받은 아이가 과연 그 말을 얼마나 신뢰할 것인가 의문스럽다.

‘껍질로 남은 엄마’는 한가위 차례를 지내는 도시 가정의 삭막한 풍경과 물질주의자가 된 부모들에게 효의 중요성을 깨우치게 하려고 연극을 하는 아이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잘 그리고 있다. 그러나 교육적 내용이 너무 직접적으로 드러난 것이 아쉬웠다.

‘귀면와’의 화자는 절간에서 기르는 강아지 ‘무불’이다. 강아지 이름은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조사의 말을 따라 ‘일봉’ 큰스님이 붙인 것이다. 그런데 이 절에는 ‘걸레스님’으로 통하는 ‘무봉’ 스님이 있어, 매사에 대조가 된다. ‘일봉’ 스님은 큰스님으로 안팎의 존경을 받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아이러니를 이 작품은 ‘무봉’이란 강아지와 얼굴 생김이 무서운 귀면와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내용이 어린이들에겐 다소 어려울지 모르나, 주제를 형상화하는 솜씨와 불교 교리를 알기 쉽게 풀이하는 힘을 높이 사 당선작으로 뽑는다. 정진을 바란다.

올해 신춘문예에 응모한 동화작품은 모두 91편으로 예년과 비슷했다. 동화 창작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최근 현상에 비추어 응모편수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불교신문 신춘문예 심사를 하며 받은 첫 번째 인상은, 응모작의 수준이 대체로 상승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응모자들이 동화를 지나치게 관념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경어체 사용과 동물의 의인화, 또는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황당한 상황설정 같은 것이었다. 동화의 주독자층은, 두말할 것도 없이 어린이다. 그러나 ‘어린이’도 여러 층으로 구분되므로 자기 작품의 주독자층을 좀더 세분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대다수 작품들이 이 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아 아쉽다.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는 부처님’은 천사원에서 생활하던 ‘보리’가 절에 와 처음 크리스마스를 맞으면서 겪는 일을 차분하게 그린 작품이다. 그러나 왜 천사원에서 자란 아이의 이름이 ‘보리’인지에 대해 아무 설명이 없고, 법당에 들어간 ‘보리’가 부처님에게 안마를 해드린다는 사건 설정은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난 어디서 왔을까’는 동생을 보고 싶은 여자아이의 마음을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다. 특히 이 작품에는 ‘삼신할미’와 관련한 설화를 내장하고 있어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읽는 재미가 있지만, 학교에서 성교육을 받은 아이가 과연 그 말을 얼마나 신뢰할 것인가 의문스럽다. ‘껍질로 남은 엄마’는 한가위 차례를 지내는 도시 가정의 삭막한 풍경과 물질주의자가 된 부모들에게 효의 중요성을 깨우치게 하려고 연극을 하는 아이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잘 그리고 있다. 그러나 교육적 내용이 너무 직접적으로 드러난 것이 아쉬웠다. ‘귀면와’의 화자는 절간에서 기르는 강아지 ‘무불’이다. 강아지 이름은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조사의 말을 따라 ‘일봉’ 큰스님이 붙인 것이다. 그런데 이 절에는 ‘걸레스님’으로 통하는 ‘무봉’ 스님이 있어, 매사에 대조가 된다. ‘일봉’ 스님은 큰스님으로 안팎의 존경을 받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아이러니를 이 작품은 ‘무봉’이란 강아지와 얼굴 생김이 무서운 귀면와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내용이 어린이들에겐 다소 어려울지 모르나, 주제를 형상화하는 솜씨와 불교 교리를 알기 쉽게 풀이하는 힘을 높이 사 당선작으로 뽑는다. 정진을 바란다.



[불교신문 2390호/ 1월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