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새아침이 밝았다. 새로 마련한 노트에 첫 화두로 역사의 비극을 기억하지 않는 자에게 스스로의 미래는 없다는 교훈을 적으며 새날을 연다.
계사년 2013년은 경술국치로 국권을 잃은 지 103년째요, 항일과 독립의 기치 아래 상해임시정부를 세운지 95년째이며 광복 68년째 되는 해다.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헌정 65주년이며 비극의 한국전쟁이 끝난 지 60년, 4·19 혁명과 5·16쿠테타가 일어난 지 50여 년이 흘렀다. 또한 5·18광주민주운동 33주년이 되는 해이고 6·10민주항쟁 26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상생으로 내달아야 할 통합의 이정표
눈 앞에 큰 길 하나 트이며 펼쳐진다. 아직 공정하고 평등하진 못하지만 이제 복지와 나눔을 논할 만큼은 부를 이루었다. 아직은 권력이 고루 국민들에게 돌아가고 국민 모두가 권리를 십분 누린다고까진 자신할 수 없으나 밀실에 갇혀 억압받으며 광장의 언로와 자유를 갈구하였던 민주도 어느 정도 앞으로 나아왔다. 그래서 우리 눈앞은 암흑의 시대가 아니고 밝아오는 아침이며 이정표가 보인다. 바로 성장과 민주의 유산을 모으고 나누며 상생으로 내달아야 할 통합의 이정표이다.
반면 아직 눈보라 속의 길도 있다. 평화와 통일을 바라보면 분단의 비극과 한반도를 둘러싼 외세의 패권주의는 엄존한다.
이제 2013년 우리가 행해며 가야 할 길은 분명하다. 첫째 성장과 민주의 과제를 한 길로 모아서 국민대통합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둘째는 평화와 통일, 그 희망의 끈을 꼭 움켜쥐고 남북관계와 외세의 패권주의에 지혜로이 대처해 나아가는 길이다. 그 두 가지는 다른 길이 아니며 하나의 길이요, 오천만 대한국민이 우리 다음세대를 생각하며, 이제 대장정(大長征)의 각오와 다짐으로 첫걸음을 내딛어야 할 길이다.
대선, 이제 승자·패자는 없다
이 준엄한 사명의 대장정(大長征)을 향해 첫걸음을 내딛으려면 먼저 발치의 장애부터 냉철히 살펴야 한다. 지난해 말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여망으로 뜨거웠던 대통령 선거, 시야를 흐리게 하는 걸림돌들이 보인다. 51.6%의 국민은 승리의 자신감에 들떠, 또 48.0%의 국민은 아직 패배감에 휩싸여 2013년을 시작한다는 논조들이다. 지배적인 언론들은 그러한 분열과 갈등을 우려하면서도 오히려 2013년 대한민국을 승패의 제로섬게임, 즉 'All or nothing'의 권력투쟁으로 몰아가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이러한 논조와 시각에서 보수와 진보, 부자와 가난한 자, 세대와 세대의 갈등은 여전하며 이번 대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래서는 안 된다. 누가 승자고 누가 패자란 말인가? 2012년 대선은 단지 오천만의 권익과 살림을 결정하는 주주 총회였을 뿐이고 박근혜 당선자는 대표이사로서 문재인 전 후보는 이사로서 대한민국 경영에 참여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소액주주, 즉 소외된 소수 국민들의 권익을 배려하는 공정한 룰을 세우고 실행하는 과제는 잊지 말아야 한다.
또 하나 걸림돌이 보인다. 2012 대선의 특징으로 '세대대결' 양상을 꼽는 분석이 많았고 양 진영은 실제로 이른바 '2040'이라 불리우는 세대를 두고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대략 1964년생부터 1992년생까지가 바로 '2040'세대다. 한국전쟁으로부터 자유롭고 4·19와 5·16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세대, 40세 후반 정도만이 십대 중반에 5·18을 경험했고 사회생활 초반에 6·10을 경험했을, 이후 세대는 이로부터도 자유로운 세대가 바로 '2040'세대 아닌가.
책략가에겐 다음 선거가, 진정한 정치는 다음 세대를
흔히 90년대 30대였고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60년 이후 출생 세대를 지칭했던 '386'은 대부분 50대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막상 선거가 끝나자 이번 대선의 최대 승부처로 50대의 선택을 꼽는 분석이 대두되고 있다. 박근혜 당선자가 50대의 '불안'을 키워드로 90%에 가까운 투표율, 박 후보 지지 62.5%(방송3사 출구조사 기준)를 얻으면서 승부를 갈랐다는 것이다. 반면 언론에는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는 '단일화의 늪'과 '투표율의 덫'에 빠져 50대의 불안감을 놓쳐 패배했다"(민주통합당 전병헌 의원) 등이 패인으로 분석됐다.
선거 책략가들에게는 승인분석과 패인 분석이 중요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다음 선거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바른 의미의 정치가는 그래선 안 된다. 국민이 원하는 정치는 다음선거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정치이기 때문이다.
"정치꾼은 다음 선거만을 생각하고, 진정한 정치인은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 19세기 미국의 개혁적인 신학자이자 작가 제임스 클라크의 금언이다.
선거가 끝나면 여든 야든, 승자든 패자든 올바른 정치인의 본연, 또 국민이 여망하는 정치의 장(場)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이제 승자와 패자가 아닌 우리 정치에 묻는다. 그리고 우리 국민에게 묻는다. 2012년 대선에서 승자든 패자든 함께 승리한 것은 없는가? 나는 작은 실마리에서 첫 대장정의 열쇠를 찾고 싶다.
박근혜 당선인과 문재인 전 후보 모두의 승리한 게 있다
2012년 대선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하지만 중요한 변화가 하나 있었다. 'JP, DJ, YS, MB'로 이어지던 영자(英字) 이니셜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ㅂㄱㅎ'로 한글 첫 자음을 로고 타입화하고 붉은 상징색 말풍선 안에 심볼화하여 사용하였고,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는 한글 이름 그대로를 캘리그래픽(직접 붓이나 펜으로 쓴 글씨체)으로 형상화하여 사용하였다.
박근혜 후보는 본래 영자 이니셜에 'Great Harmony', 즉 '대화합'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여 'GH'라 불러달라고 기자들에게 부탁한 적이 있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이는 그녀가 대선 후보로 거론되기 훨씬 이전 2002년도의 일이다. 그동안 'JP, DJ, YS, MB'처럼 아무 의미 없이 영자 이니셜로만 불리우던 관행에서는 한 걸음 나아온 것이지만 모국어가 엄연한 한국의 정치인이 굳이 영자 이니셜로 불리워야 하는 한계에서는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런데 참 궁금하다. 언제 어느 때부터 누가 우리 정치인들에게 영자 이니셜을 붙였고 왜였을까? 이에 관련해 지난해 7월 9일 <국민일보>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내보낸 바 있다.
세간에 알려진 바로는 정치인 약칭의 원조는 박 전 위원장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는 게 정설이다. 그의 약칭은 특이하게도 영문 이니셜 'JH'가 아닌 'PP(President Park)'였다고 한다.
약칭이 대중화된 건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가 'YS, DJ, JP'로 불린 '3김 시대' 이후였고, 최근에는 이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이 SD, 정몽준 의원이 MJ로 불리웠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1992년 대선 당시 언론에 "CY로 불러 달라"고 주문했지만 잘 쓰이지 않았었다.
'창(昌)'이란 호칭이 널리 쓰였던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대표는 '창'이 무기를 연상시킨다며 HC로 불리길 원했었다고 한다.
JP·YS·DJ 영자 이니셜, 언제·누구로부터?
하지만 내가 기자 생활 당시 확인한 우리 주요 정치인의 영자 이니셜 유래는 다르다. 나는 90년대 초반 기자 시절 대학시절 은사이기도 했던 신도성 박사(1918.3.7~1999.9.6)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신도성 박사는 1944년 일본 동경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해방공간에서 연희전문대 조교수,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교수를 지냈고 광복 직후 스물일곱의 청년 정치학자로 고하 송진우와 몽양 여운영이 만난 자리에 배석했던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51년 당시 초대 이시영 부통령 비서관으로 관계에 입문했다가 이 부통령이 이승만 대통령의 비민주적 통치에 반대하며 사임한 후 52년에는 잠시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지냈다. 54년에는 정계에 입문, 제3대 민의원, 59년 경남도지사를 거쳐 74년 9월부터 1년여 동안 국토통일원 장관, 9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선후보 시절 상임고문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외의 기간에는 주로 대학교수로 활동했다(여기서 신도성 박사의 이력을 상세히 소개하는 이유는 그의 인터뷰 내용에 대한 신뢰성 때문이다).
그의 이력에서 알 수 있다시피 신도성 박사는 초대 이승만 대통령에서부터 90년대 중반 김영삼 대통령까지 직간접적으로 가까이 지켜볼 수 있는 위치에 있어왔다. 그래서 인터뷰 제목도 '내가 본 대한민국 대통령' 이런 식이었고 당시 신문사에서 발행하던 월간잡지에 꽤 분량이 많은 특집기사로 연재했었다. 인터뷰 말미에 신도성 박사는 기자이자 제자인 나에게 물었다.
"심군, 자네 왜 JP, YS, DJ, 이런 이니셜이 생겼는지 아나?"
멈칫 늘 영자 이니셜로 기사를 쓰면서도 무관심했던 기자로서의 호기심 부족부터 반성했다. 신도성 박사의 증언은 이후 어떤 정치기사에도 영자 이니셜을 쓰지 않는 계기가 됐다. 그의 증언은 당시 주요 인물들에게 정기적으로, 또는 현안이 있을 때마다 수시로 이루어졌던 미국대사관 직원, 더 정확히는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들의 인터뷰 과정에서 확인된 것이었다고 했다.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미 중앙정보국(C.I.A)은 5.16의 배후를 확인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그 때 배후로 지목된 김종필 씨를 찾아 만든 파일명이 바로 'JP'였다고 하네."
이후 62년 민정이양 후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 대통령 파일에는 'PP(President Park)'라는 파일명이,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에 맞서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겐 DJ, 김영삼 전 대통령에겐 YS라는 파일명이 만들어졌음을 추론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신도성 박사는 말을 이었다.
"나를 담당했던 대사관 문관은 파일 명 앞에 붙였던 별칭도 조크 삼아 말해주었었네. YS에겐 이그노런트(Ignorant), DJ에겐 오퍼튜니스트(Opportunist)라는 별칭이 붙었다 했네."
'무식한 와이에스'와 '기회주의적인 디제이'. 하루 대여섯 시간씩 사흘 동안 일식집에서 오찬을 겸해 이루어졌던 인터뷰였고 중요한 회고는 대략 정리한 후 말미의 여담에서였다. 한 동안 말없이 허공을 응시하며 앞에 놓인 술잔을 잡고만 있던 신도성 박사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미 중앙정보국(C.I.A)에 사실의 진위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신도성 박사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세간에 알려진 박정희 대통령의 'PP'가 영자 이니셜의 출발이었다는 통설은 사실과는 다른 셈이고, 나아가 'YS, DJ, JP' 등 영자 이니셜은 약소국 한국에 대한 미국의 패권주의적인 시각과 경멸적인 어감마저 드리워 있지 않은가.
나는 인터뷰 특별기획과는 별도로 신도성 박사의 증언을 인용하여 미국의 시각에서 비롯된 'YS, DJ, JP' 등의 영자 이니셜을 버리자는 칼럼을 썼고, 이후 나만큼은 어떤 기사에서도 영자 이니셜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지방 일간지 칼럼 정도로는 지배적인 언론들의 영자 이니셜 사용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런데, 17여년이 지난 이번 대선에서야 우연치 않게 영자 이니셜 관행이 사라지게 된 셈이다.
'ㅂㄱㅎ' 한글 말풍선과 '문재인' 한글 필체의 의미
자연발생적이든 우연이든 2012년 대선은 박근혜 후보의 'ㅂㄱㅎ' 한글 이니셜과 문재인 후보 한글 로고가 'YS, DJ, JP, MB' 등 영자 이니셜을 벗어났다는 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바로 문화적 관점에서 2013년에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열 수 있다는 희망이다.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이만하면 박근혜 당선자와 문재인 전 후보가 당락의 승패를 떠나 함께 이룬 작지만 소중한 성과이며 승리 아닌가? 학력과 지역, 빈부와 세대를 떠나 우리 현대사에 외세의 패권주의적 시각을 벗어난 소중한 문화적이며 역사적인 첫걸음 아닌가 하는 소견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앞서의 한글 이니셜, 또는 한글 로고 그대로의 사용이 우리 '2040'세대를 목표그룹으로 한 홍보전략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나는 50대 중반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사회문화적 발자취를 돌아본다. 또한 무심하게 'YS, DJ, JP'류의 영자 이니셜을 썼던 전직 기자로서 반성하고 성찰한다.
민주주의가 미국에서, 아니 민주주의의 본산은 영국이라 배웠으니 영자 이니셜이 근사해보였던 것은 아니었는가? 왜 호기심과 궁금증을 갖고 묻고 추적해서 바로잡지 못했는가? 혹여 이런 방관이 서구자본주의와 서구 의회민주주의, 나아가 서구식 시장경제 논리를 피상화시키고 정작 우리가 바로 세웠어야 할 비민주의 관행, 불공정의 폐습, 나아가 외세의 패권주의에서 비롯한 분단조차도 수수방관하지 않았나 냉엄하게 묻고자 한다.
이제 우리는 2012년 대선을 통해, 또 '2040'세대와 더불어 외세 의존적인 민주주의의 절차와 관행, 더 구체적으로는 미군정 이후부터 뿌리깊은 미국 편향의 상징 하나를 벗게 됐다. 이러한 반성과 각성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상생과 통합의 대장정(大長征), 그 대전제(大前提, Major premise)를 바로 찾아서 첫 디딤돌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광장'에서 나와서 '대장정'으로 나아가자는 논의로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만 경계하자. 우리 정치가 다음선거만을 생각하는 책략과 모리배에서 벗어나 진정 다음세대를 향하기 위해서는 대전제(大前提·Major premise)가 조작되거나 국민적 여망을 호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성찰이다.
5년 전 이명박 정부의 대전제(大前提·Major premise)는 무엇이 오류였고, 또 출범 초기를 뒤흔들었던 '광장', '어둠의 시대', '촛불' 등의 대전제는 무엇이 문제였을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 논하고자 한다.
계사년 2013년은 경술국치로 국권을 잃은 지 103년째요, 항일과 독립의 기치 아래 상해임시정부를 세운지 95년째이며 광복 68년째 되는 해다.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헌정 65주년이며 비극의 한국전쟁이 끝난 지 60년, 4·19 혁명과 5·16쿠테타가 일어난 지 50여 년이 흘렀다. 또한 5·18광주민주운동 33주년이 되는 해이고 6·10민주항쟁 26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상생으로 내달아야 할 통합의 이정표
눈 앞에 큰 길 하나 트이며 펼쳐진다. 아직 공정하고 평등하진 못하지만 이제 복지와 나눔을 논할 만큼은 부를 이루었다. 아직은 권력이 고루 국민들에게 돌아가고 국민 모두가 권리를 십분 누린다고까진 자신할 수 없으나 밀실에 갇혀 억압받으며 광장의 언로와 자유를 갈구하였던 민주도 어느 정도 앞으로 나아왔다. 그래서 우리 눈앞은 암흑의 시대가 아니고 밝아오는 아침이며 이정표가 보인다. 바로 성장과 민주의 유산을 모으고 나누며 상생으로 내달아야 할 통합의 이정표이다.
반면 아직 눈보라 속의 길도 있다. 평화와 통일을 바라보면 분단의 비극과 한반도를 둘러싼 외세의 패권주의는 엄존한다.
이제 2013년 우리가 행해며 가야 할 길은 분명하다. 첫째 성장과 민주의 과제를 한 길로 모아서 국민대통합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둘째는 평화와 통일, 그 희망의 끈을 꼭 움켜쥐고 남북관계와 외세의 패권주의에 지혜로이 대처해 나아가는 길이다. 그 두 가지는 다른 길이 아니며 하나의 길이요, 오천만 대한국민이 우리 다음세대를 생각하며, 이제 대장정(大長征)의 각오와 다짐으로 첫걸음을 내딛어야 할 길이다.
대선, 이제 승자·패자는 없다
이 준엄한 사명의 대장정(大長征)을 향해 첫걸음을 내딛으려면 먼저 발치의 장애부터 냉철히 살펴야 한다. 지난해 말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여망으로 뜨거웠던 대통령 선거, 시야를 흐리게 하는 걸림돌들이 보인다. 51.6%의 국민은 승리의 자신감에 들떠, 또 48.0%의 국민은 아직 패배감에 휩싸여 2013년을 시작한다는 논조들이다. 지배적인 언론들은 그러한 분열과 갈등을 우려하면서도 오히려 2013년 대한민국을 승패의 제로섬게임, 즉 'All or nothing'의 권력투쟁으로 몰아가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이러한 논조와 시각에서 보수와 진보, 부자와 가난한 자, 세대와 세대의 갈등은 여전하며 이번 대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래서는 안 된다. 누가 승자고 누가 패자란 말인가? 2012년 대선은 단지 오천만의 권익과 살림을 결정하는 주주 총회였을 뿐이고 박근혜 당선자는 대표이사로서 문재인 전 후보는 이사로서 대한민국 경영에 참여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소액주주, 즉 소외된 소수 국민들의 권익을 배려하는 공정한 룰을 세우고 실행하는 과제는 잊지 말아야 한다.
또 하나 걸림돌이 보인다. 2012 대선의 특징으로 '세대대결' 양상을 꼽는 분석이 많았고 양 진영은 실제로 이른바 '2040'이라 불리우는 세대를 두고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대략 1964년생부터 1992년생까지가 바로 '2040'세대다. 한국전쟁으로부터 자유롭고 4·19와 5·16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세대, 40세 후반 정도만이 십대 중반에 5·18을 경험했고 사회생활 초반에 6·10을 경험했을, 이후 세대는 이로부터도 자유로운 세대가 바로 '2040'세대 아닌가.
책략가에겐 다음 선거가, 진정한 정치는 다음 세대를
흔히 90년대 30대였고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60년 이후 출생 세대를 지칭했던 '386'은 대부분 50대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막상 선거가 끝나자 이번 대선의 최대 승부처로 50대의 선택을 꼽는 분석이 대두되고 있다. 박근혜 당선자가 50대의 '불안'을 키워드로 90%에 가까운 투표율, 박 후보 지지 62.5%(방송3사 출구조사 기준)를 얻으면서 승부를 갈랐다는 것이다. 반면 언론에는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는 '단일화의 늪'과 '투표율의 덫'에 빠져 50대의 불안감을 놓쳐 패배했다"(민주통합당 전병헌 의원) 등이 패인으로 분석됐다.
선거 책략가들에게는 승인분석과 패인 분석이 중요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다음 선거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바른 의미의 정치가는 그래선 안 된다. 국민이 원하는 정치는 다음선거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정치이기 때문이다.
"정치꾼은 다음 선거만을 생각하고, 진정한 정치인은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 19세기 미국의 개혁적인 신학자이자 작가 제임스 클라크의 금언이다.
선거가 끝나면 여든 야든, 승자든 패자든 올바른 정치인의 본연, 또 국민이 여망하는 정치의 장(場)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이제 승자와 패자가 아닌 우리 정치에 묻는다. 그리고 우리 국민에게 묻는다. 2012년 대선에서 승자든 패자든 함께 승리한 것은 없는가? 나는 작은 실마리에서 첫 대장정의 열쇠를 찾고 싶다.
박근혜 당선인과 문재인 전 후보 모두의 승리한 게 있다
2012년 대선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하지만 중요한 변화가 하나 있었다. 'JP, DJ, YS, MB'로 이어지던 영자(英字) 이니셜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ㅂㄱㅎ'로 한글 첫 자음을 로고 타입화하고 붉은 상징색 말풍선 안에 심볼화하여 사용하였고,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는 한글 이름 그대로를 캘리그래픽(직접 붓이나 펜으로 쓴 글씨체)으로 형상화하여 사용하였다.
박근혜 후보는 본래 영자 이니셜에 'Great Harmony', 즉 '대화합'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여 'GH'라 불러달라고 기자들에게 부탁한 적이 있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이는 그녀가 대선 후보로 거론되기 훨씬 이전 2002년도의 일이다. 그동안 'JP, DJ, YS, MB'처럼 아무 의미 없이 영자 이니셜로만 불리우던 관행에서는 한 걸음 나아온 것이지만 모국어가 엄연한 한국의 정치인이 굳이 영자 이니셜로 불리워야 하는 한계에서는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런데 참 궁금하다. 언제 어느 때부터 누가 우리 정치인들에게 영자 이니셜을 붙였고 왜였을까? 이에 관련해 지난해 7월 9일 <국민일보>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내보낸 바 있다.
세간에 알려진 바로는 정치인 약칭의 원조는 박 전 위원장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는 게 정설이다. 그의 약칭은 특이하게도 영문 이니셜 'JH'가 아닌 'PP(President Park)'였다고 한다.
약칭이 대중화된 건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가 'YS, DJ, JP'로 불린 '3김 시대' 이후였고, 최근에는 이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이 SD, 정몽준 의원이 MJ로 불리웠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1992년 대선 당시 언론에 "CY로 불러 달라"고 주문했지만 잘 쓰이지 않았었다.
'창(昌)'이란 호칭이 널리 쓰였던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대표는 '창'이 무기를 연상시킨다며 HC로 불리길 원했었다고 한다.
JP·YS·DJ 영자 이니셜, 언제·누구로부터?
하지만 내가 기자 생활 당시 확인한 우리 주요 정치인의 영자 이니셜 유래는 다르다. 나는 90년대 초반 기자 시절 대학시절 은사이기도 했던 신도성 박사(1918.3.7~1999.9.6)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신도성 박사는 1944년 일본 동경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해방공간에서 연희전문대 조교수,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교수를 지냈고 광복 직후 스물일곱의 청년 정치학자로 고하 송진우와 몽양 여운영이 만난 자리에 배석했던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51년 당시 초대 이시영 부통령 비서관으로 관계에 입문했다가 이 부통령이 이승만 대통령의 비민주적 통치에 반대하며 사임한 후 52년에는 잠시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지냈다. 54년에는 정계에 입문, 제3대 민의원, 59년 경남도지사를 거쳐 74년 9월부터 1년여 동안 국토통일원 장관, 9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선후보 시절 상임고문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외의 기간에는 주로 대학교수로 활동했다(여기서 신도성 박사의 이력을 상세히 소개하는 이유는 그의 인터뷰 내용에 대한 신뢰성 때문이다).
그의 이력에서 알 수 있다시피 신도성 박사는 초대 이승만 대통령에서부터 90년대 중반 김영삼 대통령까지 직간접적으로 가까이 지켜볼 수 있는 위치에 있어왔다. 그래서 인터뷰 제목도 '내가 본 대한민국 대통령' 이런 식이었고 당시 신문사에서 발행하던 월간잡지에 꽤 분량이 많은 특집기사로 연재했었다. 인터뷰 말미에 신도성 박사는 기자이자 제자인 나에게 물었다.
"심군, 자네 왜 JP, YS, DJ, 이런 이니셜이 생겼는지 아나?"
멈칫 늘 영자 이니셜로 기사를 쓰면서도 무관심했던 기자로서의 호기심 부족부터 반성했다. 신도성 박사의 증언은 이후 어떤 정치기사에도 영자 이니셜을 쓰지 않는 계기가 됐다. 그의 증언은 당시 주요 인물들에게 정기적으로, 또는 현안이 있을 때마다 수시로 이루어졌던 미국대사관 직원, 더 정확히는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들의 인터뷰 과정에서 확인된 것이었다고 했다.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미 중앙정보국(C.I.A)은 5.16의 배후를 확인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그 때 배후로 지목된 김종필 씨를 찾아 만든 파일명이 바로 'JP'였다고 하네."
이후 62년 민정이양 후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 대통령 파일에는 'PP(President Park)'라는 파일명이,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에 맞서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겐 DJ, 김영삼 전 대통령에겐 YS라는 파일명이 만들어졌음을 추론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신도성 박사는 말을 이었다.
"나를 담당했던 대사관 문관은 파일 명 앞에 붙였던 별칭도 조크 삼아 말해주었었네. YS에겐 이그노런트(Ignorant), DJ에겐 오퍼튜니스트(Opportunist)라는 별칭이 붙었다 했네."
'무식한 와이에스'와 '기회주의적인 디제이'. 하루 대여섯 시간씩 사흘 동안 일식집에서 오찬을 겸해 이루어졌던 인터뷰였고 중요한 회고는 대략 정리한 후 말미의 여담에서였다. 한 동안 말없이 허공을 응시하며 앞에 놓인 술잔을 잡고만 있던 신도성 박사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미 중앙정보국(C.I.A)에 사실의 진위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신도성 박사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세간에 알려진 박정희 대통령의 'PP'가 영자 이니셜의 출발이었다는 통설은 사실과는 다른 셈이고, 나아가 'YS, DJ, JP' 등 영자 이니셜은 약소국 한국에 대한 미국의 패권주의적인 시각과 경멸적인 어감마저 드리워 있지 않은가.
나는 인터뷰 특별기획과는 별도로 신도성 박사의 증언을 인용하여 미국의 시각에서 비롯된 'YS, DJ, JP' 등의 영자 이니셜을 버리자는 칼럼을 썼고, 이후 나만큼은 어떤 기사에서도 영자 이니셜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지방 일간지 칼럼 정도로는 지배적인 언론들의 영자 이니셜 사용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런데, 17여년이 지난 이번 대선에서야 우연치 않게 영자 이니셜 관행이 사라지게 된 셈이다.
'ㅂㄱㅎ' 한글 말풍선과 '문재인' 한글 필체의 의미
▲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한글화된 심볼 박근혜 새누리당 당선자는 ‘ㅂㄱㅎ’ 이름의 한글 첫 자음을 로고 타입화하고 붉은 상징색 말풍선 안에 심볼화하여 사용하였다. | |
ⓒ 심상협 |
▲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의 한글 이름 필사체의 이름 로고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는 한글 이름 그대로를 캘리그래픽(직접 붓이나 펜으로 쓴 글씨체)으로 형상화하여 사용하였다. | |
ⓒ 심상협 |
자연발생적이든 우연이든 2012년 대선은 박근혜 후보의 'ㅂㄱㅎ' 한글 이니셜과 문재인 후보 한글 로고가 'YS, DJ, JP, MB' 등 영자 이니셜을 벗어났다는 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바로 문화적 관점에서 2013년에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열 수 있다는 희망이다.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이만하면 박근혜 당선자와 문재인 전 후보가 당락의 승패를 떠나 함께 이룬 작지만 소중한 성과이며 승리 아닌가? 학력과 지역, 빈부와 세대를 떠나 우리 현대사에 외세의 패권주의적 시각을 벗어난 소중한 문화적이며 역사적인 첫걸음 아닌가 하는 소견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앞서의 한글 이니셜, 또는 한글 로고 그대로의 사용이 우리 '2040'세대를 목표그룹으로 한 홍보전략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나는 50대 중반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사회문화적 발자취를 돌아본다. 또한 무심하게 'YS, DJ, JP'류의 영자 이니셜을 썼던 전직 기자로서 반성하고 성찰한다.
민주주의가 미국에서, 아니 민주주의의 본산은 영국이라 배웠으니 영자 이니셜이 근사해보였던 것은 아니었는가? 왜 호기심과 궁금증을 갖고 묻고 추적해서 바로잡지 못했는가? 혹여 이런 방관이 서구자본주의와 서구 의회민주주의, 나아가 서구식 시장경제 논리를 피상화시키고 정작 우리가 바로 세웠어야 할 비민주의 관행, 불공정의 폐습, 나아가 외세의 패권주의에서 비롯한 분단조차도 수수방관하지 않았나 냉엄하게 묻고자 한다.
이제 우리는 2012년 대선을 통해, 또 '2040'세대와 더불어 외세 의존적인 민주주의의 절차와 관행, 더 구체적으로는 미군정 이후부터 뿌리깊은 미국 편향의 상징 하나를 벗게 됐다. 이러한 반성과 각성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상생과 통합의 대장정(大長征), 그 대전제(大前提, Major premise)를 바로 찾아서 첫 디딤돌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광장'에서 나와서 '대장정'으로 나아가자는 논의로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만 경계하자. 우리 정치가 다음선거만을 생각하는 책략과 모리배에서 벗어나 진정 다음세대를 향하기 위해서는 대전제(大前提·Major premise)가 조작되거나 국민적 여망을 호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성찰이다.
5년 전 이명박 정부의 대전제(大前提·Major premise)는 무엇이 오류였고, 또 출범 초기를 뒤흔들었던 '광장', '어둠의 시대', '촛불' 등의 대전제는 무엇이 문제였을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 논하고자 한다.
'문화 > 문화 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전설로 남은 남상미 10년 전 미모 (0) | 2013.03.12 |
---|---|
다윈의 ‘비둘기 수수께끼’ 154년만에 답을 찾다 (0) | 2013.02.12 |
824년만에 한번 있는 행운의 달 (0) | 2012.12.12 |
지상 최고의 행위예술 Shanghai Expo 2010 (0) | 2012.12.06 |
싸이, 마돈나 번쩍 드니…윽! ‘당황한 표정 역력’ (0) | 2012.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