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지정 중요 문화재 도록
7 고려·조선 시대의 흑자(黑磁)
세밀한 흑자 연구를 위하여 시대·태토·기형·유색·문양·기법·등이 서로 다른 유품 4점을 제시하고 정밀히 검토하고자 한다.
제시유품《가》
고려 흑자 흑갈색 소호(高麗 黑磁 黑褐色 小壺)
높이 15㎝, 입 지름 10.4㎝, 밑 지름 8.6㎝
제시유품《나》
고려 흑자 어문병 (高麗 黑磁 魚文甁)
높이 19.6㎝, 입 지름 7.5㎝, 밑 지름 7㎝
제시유품《다》
고려 흑자 목단문 매병 (高麗 黑磁 牧丹文 梅甁)
높이 35.6㎝, 입 지름 5.5㎝, 밑 지름 13.3㎝
제시유품《라》
조선 흑자 호리병 (朝鮮 黑磁 葫蘆甁)
높이 26.8㎝, 입 지름 2.1㎝, 밑 지름 9.5㎝
연구 목차
서론 1. 흑자(흑유)의 시원 1) 중국의 사례 2) 고려의 흑자 3) 조선의 흑자 4) 논문「朝鮮時代 黑磁의 製作樣相과 性格」의 是와 非 2. 유품감상 1) 현황 2) 시대성 3) 예술성 4) 희귀성 |
서론
어느 날 지기(知己)의 희수연(喜壽宴)에 초대되어 장수를 빌어주고 자식 농사 잘 지어 화목한 가정의 표본을 보았다. 성찬에 포식하고 귀가하려고 일어서니 장남이 다가와 제가 모시겠다고 하며 차에 오르기를 권한다. 사양했지만 끝내 사양은 예가 아닌 것 같아 차에 오르니 방향을 묻지도 않고 달린다. 내 집을 모를 텐데 어디로 가는 거야? 저의 집으로 모시라고 하던데요. 무슨 할 말이 따로 있는 것 같아서 잠자코 따랐다,
그의 거실은 화실이었고 별실 한 칸은 아담한 박물관이었다. 일견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본인이 화가이니 수집한 유품도 그림일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이외로 도자기가 즐비하다.
평소 골동 가게 출입이 잤다는 소문은 들었어도 화가가 고화에서 기법이나 구상이 필요해서 그랬겠지 하였는데 이외였다. 본인의 말은 이러했다. 그림은 보관을 잘못하면 역사의 죄인이 될 수 있기에 보관이 편한 도자기를 모았다고 했다.
유품은 시대별로 분류되어 있었다. 분류에 착오는 없는지 보아달라고 하였다. 동문수학한 제자들처럼 분류는 비슷한 생각이었다. 특이한 것은 고려자기에 흑자가 많다. 소장품에 흑자가 많습니다. 느끼는 그대로의 소감이었지 수집한 이유를 물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수집한 이유를 설명했다.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흑유를 왜 모았는지 나도 몰라요.” 라고 한다.
아주 옛날 코흘리개 시절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울 때의 일입니다. 훈장 선생님이 天·地·玄·黃을 풀이 하시면서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고 하셨어요. 철이 들면서 정말 하늘이 검은가? 눈에 보이는 하늘은 푸른데, 한 때의 화두였습니다. 그러나 차차 우주의 근본은 검은 빛이라는 생각이 무의식에 자리를 굳힌 것 같아요. 태양이 밝은 것도 어둠이 있기 때문이고, 모든 생물들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자라 이 세상에 나오는데 뱃속도 어둡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세상의 본바탕은 어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문인화가로 수묵화(水墨畵)의 길을 택한 것도 무의식의 작용인지도 모를 일이다.
굳이 종교적으로 해석을 하지 않더라도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니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빛깔들 모두가 허상 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지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어둠 속에서도 자기를 지킬 수 있는 마음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겠습니까?
하여간 오늘 돌아보니 흑자에 마음이 끌렸던 것 같습니다. 소장한 30여 년간 때때로 바라보면서 왜 검은 빛을 칠했을까? 안료는? 누구의 주문이었을까? 그 많은 난리 통에 용하게도 파손이 없구나. 어떻게 해야 만든 선인들의 본뜻을 살릴 수 있을까? 이런 의문들이 고민이라면 고민이지만 감상이라는 이름아래 즐겁기도 했었지요. 풀리지 않는 의문을 부여안고 끈질긴 관찰이 요구되기도 했고요.
그 동안 흑자에 관한 자료가 없어서 막막하던 차에(서지연 저 「朝鮮時代 黑磁의 製作樣相과 性格」이 라는 논문이 미술사학연구 270호, 2011,6에 발표되었다. <이후는 朝鮮時代 黑磁로 쓴다.>)이 논문을 계기로 필자의 유품 두 점과 함께 연구하기로 하였다.
1. 黑磁(黑釉)의 시원
1) 중국의 사례
근세의 도자문화는 중국이 세계를 선도(先導)하고 있었으니 黑磁의 시원도 중국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 된다. 하지만 흑자의 발생 시기에 관하여는 중국에서도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흑자는 청자나 백자처럼 기년명이 관명(款銘)된 유품이 없고 安陽卜仁墓의 발굴에서 흑유로 채화된 유품이 발굴 되었으나 色調가 褐色에서부터 黑褐色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여 백자와 청자의 기형으로 비정하여 시대를 추정하는 실정이라고 한다.
흑자의 시작은 청자와 함께 발전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추측할 수 있는 근거는 도자기를 제작하려면 흙의 수비(水飛)가 필수 공정이다. 그 수비 과정에 흙에 함유된 철분(산화철)이 가장 먼저 가라앉을 것이니 그 철분을 건조 분쇄하여 유약으로 쓰면 그 철의 성분에 따라 색조가 갈색에서 흑갈색 혹은 흑색으로 발현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관하여 연구사를 살펴보면 중국의 黑磁는 六世紀에서 七世紀에 걸쳐 北方窯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黑釉는 그 色調의 濃淡이 變化가 심(甚)하여 처음에는 黑胎釉에서 黑釉까지 여러 색으로 變化를 겪었을 것이다. 때로는 탁한 色調의 것도 있었을 것이니 아름다운 漆黑의 黑磁로 성공하기까지는 많은 시행착오를 격고 기술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왕성한 수요가 없었던 탓으로 청자나 백자처럼 일반화 되지 못하고 특수 애호가들만의 사랑을 받았기에 많이 만들지 않았으니 지금은 회귀한 유물로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2) 고려 시대의 흑자
우리나라의 흑자는 언제부터 만들었을까? 이에 대하여 기존의 연구에서는 高麗靑磁의 盛期에 鐵彩象嵌과 함께 鐵彩堆花紋은 이미 나타나고 있었으나 그 수요는 많지 않다고 하였으며, 흑자 매병은 그 하나의 예라고 하였다. 그 증거로 康津郡 大口面 沙堂里 窯址에서 靑磁鐵彩堆花雲鶴紋梅甁과 유사한 파편이 출토되었다고 하였다.
흑자는 고려 시대에만 만들었던 것이 아니고 조선 시대에도 만들었을 것이니 그 시대 구별에 어려움이 있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유품의 시대 구분을 기형과 문양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이 절대적인 조건으로 감별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렇게 감별하는 방법은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식기와 같은 일상용품은 이왕에 만들던 대로 만들면 손에 익숙하지만 예술품인 경우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어떤 도공이 신라 토기를 보고 아름다움을 느꼈다면 그 도공이 만든 기형에는 신라적 요소가 가미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예술인이 느낀 감흥을 작품에 반영치 않았다면 그는 예술인이 아닐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대 구별의 요체는 기형이나 문양도 참고해야 하지만 보다도 태토를 기본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도자기 제작에 적합한 흙은 따로 있지, 아무 흙이나 쓰는 것이 아닐 것이고 적합한 흙이 있다고 하더라도 산은 산주가 있고 논밭은 임자가 있다. 당시의 법은 알 수 없으나 지금의 법으로는 정부의 허가도 받아야 했을 것이다. 뿐만이 아니라 요장에까지 흙을 운반하려면 달구지의 길이라도 내야하니 흙은 수시로 바꿀 수가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짧게는 수십 년 한 곳의 흙을 썼을 것이고 바꾸는 경우도 비슷한 성질의 흙으로 바꿨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려 시대의 흑자와 조선 시대의 흑자는 태토로 구별이 가능할 것이다.
고려 시대의 흑자는 기존의 연구에서 청자로 분류되였으니 청자와 함께 자토(赭土)이고 조선시대의 흑자의 태토는 논문(조선시대의 흑자)에서 밝힌 바와 같이 백토이거나 아니면 분청 사기태토이니 확연히 구별이 된다.
송대의 사람 太平老人과 高麗圖經을 쓴 徐兢이 고려청자를 天下第一이라고 칭송한 것이, 청자를 만든 기교를 말한 것이 아니고 그 翡色을 칭송한 것이니 중국에는 고려청자에 사용된 赭土만한 흙이 없어서 그런 빛의 청자를 굽지 못하는 것이지 기술이 없어서 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니 도자기에 흙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말하는 것이다.
고려 시대의 자기를 연구함에 있어서 기존의 연구에서는 흑유를 청자의 계열로 연구되어왔다. 태토는 청자와 같은 자토이고 유약은 청자유약을 썼으니 일리가 있었다. 그러던 것이 조선에 와서는 백토나 분청사기토를 태토로 썼으니 이는 근본적으로 다른 자기라고 보아야 한다. 예를 들면 高麗靑瓦 와 조선 시대의 청와(牙鍊瓦)에 비유하여도 무리한 例示는 아닐 것이다,
3) 조선 시대의 흑자
고려, 조선의 흑자가 다 같은 검은 빛이니 성품(成品)으로 시대를 구별하기가 어렵다. (세밀히 관찰하면 구별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 만) 그러나 고려 흑자에 관하여는 문헌이 없고, 조선 시대의 흑자에 관해서는 문헌이 이으니 이를 토대로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발표된 연구 논문(朝鮮時代 黑磁)에 조선 전 기간에 흑자를 만들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문헌으로 보면 조선 시대의 흑자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만든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며. 이렇게 보는 이유는 문헌이 이를 증명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고 조선 조정이 임진란을 치르고 긴급조치를 반포한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흑자에 관한 문헌으로는 (朝鮮時代 黑磁) 논문의 표 1·2에 명시된 기록에 흑자에 관한 명칭이나 논증이 1756년부터 나타나고 있다. 또 하나의 인용 사료는 조선 조정이 반포한 긴급조치이다. 이 조치는 光海君 8年(1616) 4月 23日의 조치를 말한다. 즉 임진왜란을 치르고 물자가 부족하여 국민 전체가 도탄에 빠졌으니 이를 수습하고자 긴급 조치를 반포하였던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大殿則用白磁器, 東宮則用靑磁器,(중략) 士大夫所用許用常白器 (왕<임금>은 백자를 쓰고<전란으로 청화안료를 구하지 못하여 백자청화를 굽지 못했다.> 동궁에서는 청자를 사용하고 <조선이 건국된 이래 왕실에서 청자를 쓴 례가 없었다> 사대부들에게 상백기<보통백자>의 사용을 허락하는 조치를 말한다.
임란 전에는 왕실이 독점하고 있던 백자를 사대부들에게 상백기의 사용을 허용한 것이다. 이렇게 되니 분청사기만을 쓸 수 있었던 사대부들이 일시에 백자로 몰리자 분청사기는 자연 도태(淘汰)되었을 것이다.
조정의 긴급조치 반포가 1616년이니 1756년까지는 140년의 시차가 있다. 이 기간에 백토가 고갈 상태에 이르니 궁여지책으로 만든 것이 흑자일 것이다. 그러니 조선 흑자는 金馬志에 烏磁器 라는 용어가 기록된 1756년에 처음으로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4)「朝鮮時代 黑磁의 製作樣相과 性格」에 대한 시(是)와 비(非)
흑자에 관한 문헌이 희귀하여 막막하던 차에 한국미술사학회에서 발간하는 학회지 미술사학연구 270호(2011,6)에 서지영이 쓴「朝鮮時代 黑磁의 製作樣相과 性格」이란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 논문을 참고로 유품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논문은 고려대학교 미술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논문으로 알고 있다. 필자도 흑자 유품을 연구하고 있었으니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았다. 관련 문헌을 정리하였고 자료 수집에 과학적 분석까지 갖추었으니 보기 드문 학위 논문이라 생각하며 학위 취득을 축하하고 계속 정진을 기대하면서 필자의 유품 연구에 참고 하기로 한다.
미술사학회의 회원들은 모두 이 논문을 가지고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을 위해서 논문을 인용하여 검토하기로 한다.(논문의 부분인용은 필자가 활용하기 위한 것이니 양해를 바랍니다.)
인용논문 -「朝鮮時代 黑磁의 製作樣相과 性格」,서지영,2011년
1.분석대상
“분석 대상은 조선전기에 흑자와 함께 분청사기가 제작된 웅천 두동리 가마터와 조선후기에 흑자와 백자가 제작된 포천 길명리가마터의 출토품을 선정하였다.....두동리 출토 흑자의 태토는 분청사기의 태토와 유사하며, 길명리 흑자는 백자의 태토와 유사한 양상을 확인 할 수가 있다.”(미술사학연구,167쪽,2011.6)
필자의 의견
1 자료 선택은 논문 작성자의 계획에 의한 것이니 필자로는 이의가 없다
2.흑자는 조선 전 기간에 제작되었다.
1기에 해당하는 흑자는 분청사기 가마에서 제작된 흑자유형 (A군)이며, 대체로 분청사기 제작에서 백자 제작으로 이행되는 가마에서 보인다.....內贍·長興과 같은 명문 분청사기와 함께 출토되어 1403-1432년 사이에 제작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82쪽)
필자의 의견
2항은 이 논문만이 아니고 기존의 연구자(대 학자)들이 분명하게 정리했어야할 부분을 방치했기 때문에 야기된 문제이다. 그것은 고려 시대의 청자가 조선에 와서 백자로 바뀐 것은 우리 도자사의 분수령과 같은 중대한 문제이다.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세계 도자기의 흐름이 청자에서 백자로 바뀌니 우리 도자기도 따랐다. 혹은 불교 국가이던 도려에서는 청자를 숭상했으나 유교국인 조선은 백자로 바꿨다. 등으로 호도하여 후학들을 미궁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에 대하여는 필자의 졸저 『백자청화연구(Ⅱ)』에 상술하였고 이 책은 필자의 블로그에 전문을 실었다. 우리 도자사가 왜곡되었기에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을 전개하면서 정부와의 대화 내용과 함께 전문을 揭載한것이다. 독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블로그를 두 곳에 개설 하였다.그 주소는 다음과 같다.
⑴ (http://blog.naver.com/bbooheum)
⑵ (http://blog.daum.net/booheum) 고려청자가 조선백자로 전환된 이유를 여기에서 설명하기는 장황하여 생략하니 블로그를 읽고 이해하기 바랍니다.
3.흑자의 용어
“흑자는 조선시대 전 기간에 제작되었으며 19세기 이후에 가마 수가 가장 많이 확인되었음을 알 수 있다.(170쪽)
표1 흑자의 용어 분류
時 期 |
用 語 |
關係資料 |
1123년 |
烏盞 |
高麗圖經 권32, 기명, 茶俎 |
1756년 |
烏磁器 |
金馬志「土産」 |
1780년 |
烏瓷 |
朴趾源 (燕巖集)熱河日記 卷10 |
1809년 |
오지 |
빙허각 이씨(閨閤叢書)卷1 |
1823년 |
烏器,烏瓷,烏瓷器 |
徐有榘(林園經濟志)<膽用志>卷2 |
1834년 |
烏瓷 |
李圭景(五洲書種)陶窯類 |
1839년이후 |
烏瓷 |
李圭景(五洲珩文長箋散稿)<華東陶窯辨證說> |
1855년 |
烏指器 |
(右捕廳謄錄)第29冊 |
1891년 |
石間朱 |
서울특별시사 편찬위원회 (국역하제일기 (一),2005 |
1909년 |
黑器,黑磁, 柒(漆)土器 |
農商工部所管(官立工業傳習所報告(第 一回),1909 |
1931년 |
칠기그릇 석간주자기 |
淺川巧(朝鮮陶瓷名考),工政會出版部,1931 |
현재 |
흑유자 흑유, 흑갈유 석간주자기 흑유자기 |
진홍섭 (청자와 백자)세종대왕 기념사업회,1974 강경숙 (한국도자사)일지사, 1989 정량모 (한국의 도자기)문예출판사,1991 윤용이 (한국도자사 연구)문예출판사,1993 방병선 (조선후기 백자연구)일지사,2000 김영원 (조선시대 도자기)서울대학교출판부,2003 |
필자의 의견
3항은 고려도경(1122)이후 634년간 마무 기록이 없다가 1756년에 烏磁器라는 용어가 나타난 것은 이 해에 처음으로 烏磁器가 만들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사람이 태어나도 이름을 짓는데, 팔고자 하는 상품을 생산하면서 이름을 널리 광고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광고를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생산을 하였다면 어느 문서에든지 기록이 남게 마련이다. 古文에‘地不長無名之草’(땅은 이름없는 풀은 키우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4.문헌자료
표2 오자 관련 문헌자료.(163쪽)
필자의 의견
4항의 표2는 문헌 사료인데 전문(全文) 수록을 생략한다. (오자에 관하여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이 金馬志(1756)이다. )
5.흑자의 유약
“徐有榘는 남방에서 오자 옹은 백토로 그릇을 만든 후 석간주로 약간 검은 빛이 나도록 물을 섞어 바른다, ”(163쪽)
필자의 의견
5 번은 이의가 없다. (기술적인 문제이나, 석간주를 약간 검은 빛이 나도록 물을 섞어 발랐다면 갈색이 되지 흑자는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6.생산 요별 현황
“병의 경우 도기는 도기가마에서, 자기는 광주 관요에서, 오자는 남중관동에서 나온다.”(164쪽.)
필자의 의견
6 논문에는 전국 각지에서 오자가 생산된 것으로 조사되었으니 이 사료는 작성자의 편견일 것이다.
7.두 종류의 태토 사용
“두동리 흑자는 분청사기와 유사한 원료를 사용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길명리 역시 <표4>와 <도4>를 통해 흑자(1)과 (2)의 태토는 모두 백자의 태토와 유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분석 결과는 흑자를 자기질로 볼 수 있는 하나의 근거로 제시하고자 한다. ” (168쪽)
필자의 의견
7 번은 현장을 조사한 결과이다. 다만 분청사기 태토를 쓴 이유에 대하여 부연설명이 있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8.흑자를 자기로 보는 이유
“두동리 흑자는 분청사기와 유사한 원료를 사용하였음을 의미한다. ....태토는 모두 백자의 태토와 유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분석 결과는 흑자를 자기질로 볼 수 있는 하나의 근거로 제시하고자 한다. ” (168쪽)
필자의 의견
8 번은 기술적인 문제이니 이의가 없다. (과학적으로 밝혀야할 문제인 듯하다)
9.흑자는 백자와 분청사기와 동시 제작
“B군의 울산 삼상정리에서는 흑자를 백자편 위에 올려 구운 예나 C군의 가평 하판리에서 흑자와 백자가 붙어있는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흑자는 동시기의 분청사기나 백자와 같은 조건하에서 동시에 번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더욱이 흑자의 초벌편도 확인된바 있어 단순히 이들 자기를 함께 구웠다는 현상보다 태토의 자화되는 온도나, 유약이 유리질화 되는 온도 등 가마에서 번조되는 조건이 유사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1기에 해당하는 흑자는 분청사기 가마에서 제작된 흑자유형(A군)이며, 대체로 분청사기제작에서 백자 제작으로 이행되는 가마에서 보인다.....‘內贍’·‘長興’ 과 같은 명문 분청사기와 함께 출토되어 1403-1432년 사이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82쪽)
필자의 의견
9 번은 현장에서 확인한 사실이니 이의가 없다. 그러나 내섬과 장흥의 명문을 들어 1403-1432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 것은 사료를 확인 안했다는 증거가 된다. 이유는 내섬시는 태종 때부터 순조까지, 장흥고는 태조 때부터 고종까지 존속되었던 관사이니 1403-1432년으로 단정은 무리가 있다. 또 달리 해석하면 조선 초기에 분청사기를 굽던 가마터에 후대에 와서 흑자 가마를 본래의 분청사기 가마 위나 인근에 설치하였다면 퇴적층에 묻혔던 내섬·장흥의 파편이 나을 수도 있다,
10.굵은 모래 받침 사용
“번조 받침은 굵은 모래를 사용하였고, 흑자와 백자가 동시에 번조되었다. ” (184쪽)
필자의 의견
10 번은 제시자료 중 회색 태토에 굵은 모래를 받쳐 구은 흑자가 있어 고심하던 중 잘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
논문 전체를 필자 나름으로 해석하면 조선조의 흑자는 1756녀 경부터 만들기 시작하였다. 흑자를 만든 이유는 백토가 부족하여 백자의 질이 떨어지니 흑자를 만들었을 것이다.
조선 초부터 흑자를 만들지 않은 증거로는 관주 관요인 분원에서 흑자를 만들지 않았고, 세조12년에 백토를 봉쇄하였다. 왕명이 지켜졌다고 보면 조선 초기에 백토로 흑자를 만들 수가 없었다. 세조 12년의 백토에 대한 금령이 해제된 때가 광해군 8년(1616)에 사대부들에게 상백기의 사용을 허용하면서 풀렸다. 그러나 관요인 분원은 고종 19년(1882)까지 유지된다. 그러니 양질의 백토는 관요인 분원에서 관장하였을 것이다.
사대부들에게 상백기의 사용을 허용한 때가 1616년이고 흑자는 1756년에 만들어 졌으니 그 시차가 140년간이다. 이 기간에 백토가 고갈되었다고 보면 무리가 없다.
백토는 광석으로 맥을 따라 취토하는 것이다. 표토(表土)의 백토는 140년 사이에 다 썼을 것이고 땅 속의 백토를 취토하려면 많은 비용과 인력이 소요된다. 백토의 취토가 어려움은 숙종실록에 자세한 기록이 있다.
관요인 분원에서 주로 쓴 백토는 황해도 봉산· 강원도 양구· 평안도 선천· 경상도 하동·경주·진주 등지의 백토인데 朝鮮黑磁의 논문에는 이 지역을 벗어나 있다. 그것은 양질 백토는 쓰지 못하였다는 증거이다.
분청사기 태토로는 분청사기를 만들지 왜 흑자를 만들었을까? 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으나 분청사기는 흑자보다 두 工程이 많다. 공정은 많고 이익이 적은 분청사기를 만들기 보다 흑유를 씌워 흑자를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조선 역사 연구의 기본 자료는 『朝鮮王朝實錄』이라고 생각한다. 일제 강점기 일인들의 연구에『朝鮮王朝實錄』에 임금의 금령이 있기는 하지만 지켜지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주장이 있다. 그렇다고 대한민국의 학술 논문에 근거도 없이 왕명을 무시한 논문을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4) 유품 감상
시대· 기형· 문양· 태토· 기법이 서로 다른 흑자 유품 4점을 제시 한다. 그 이유는 상호관련을 살피면서 정밀히 연구하고자 함이다. 제시 자료를 가· 나· 다· 라 순으로 나열 기술한다.
유품《가》고려 흑자 흑갈색 소호(高麗 黑磁 黑褐色 小壺)
높이14.7㎝, 입 지름10.3㎝, 밑 지름8.5㎝ 고대 부분
1) 유품의 현황
(1) 태토는 곱게 정선된 자토(赭土)이다.
(2) 기형은 나직한 중형 호이다.
(3) 유약은 청자와 흑자의 중간색이라고 할 수 있는 흑갈색이다.
(4) 고대는 다소 변형된 해무리 굽이나, 평저에 가깝다. 고대 의 내부에도 시유되었는데 일부에는 묻지 않았다.
(5) 받침이 무엇이었는지 흔적이 없다.
(6) 양쪽 어깨에 고리를 달았는데 그 틀을 박쥐 문양으로 장식 되었다.
(7) 호의 동체는 상하를 따로 만들이 결합하였다.
2) 시대성
(1) 문헌 사료
고려 흑자에 관한 문헌을 발굴하지 못하였으니 유품으로 시대를 비정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2) 비정 유품
시대의 비정을 위하여 고려 시대의 가마터에서 출토된 파편과 비교하고자 한다.
비교도 1은 全羅南道 康津郡 大口面 沙堂里 堂前窯에서 출토된 수습 파편이다. 이 요는 한국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발굴하였다. 비교도 2는 全羅北道 扶安郡 保安面 柳川里窯에서 출토 수습된 파편이다. 이 요는 이화 여자대학교에서 발굴하였다. 비교도 1은 12세기 전반의 파편이고, 비교도 2의 파편은 12세기의 파편이다.
비교도의 파편은 청자라고 표기되어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흑자를 청자와 같은 계열로 분류하여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흑자도 하나의 계열을 이루고 있으니 흑자를 청자에서 분리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다.
최근의 연구 논문 (朝鮮時代 黑磁)에서도 흑자로 표기하고 있고, 흑자를 청자로 표기하는 명칭은 일제의 잔재이기도 하다. 흑자를 하나의 계열로 분류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 필자도 흑자로 기술한다.
도자기의 채료로는 산화철이 가장 먼저 쓰인 안료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흙 속에 함유된 철분이 수비(水飛) 과정에서 부산물로 얻어졌기 때문이다. 우연한 기회에 철분이 검은 빛으로 채색됨을 발견하고 채료로 썼을 것이니, 산화철이 도자기 채료의 원조일 것이다.
고려자기의 유색을 보면 청자와 흑자의 유약은 어떻게 다른가. 라는 의문이 생긴다. 이를 문헌에 보면 산화철을 5% 정도로 도장하고 투명 유를 씌워 환원염으로 소성하면 청색으로 발색되고 10%∼20% 정도의 산화철로 도장하고 불투명 유약을 씌워 소성하면 흑자가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정립된 과학적 연구는 후대의 연구일 것이다. 천연 산화철에는 철분 외에도 망간 · 마그네슘 등 다양한 이질의 광물질도 함유되었기 때문에 일정한 발색으로 구원내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비교도 1 비교도 2
鐵彩象嵌靑磁破片(12世紀前半) 鐵彩象嵌靑磁破片(12世紀)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당전요 출토 유천리요 출토
비교도 1·2는 12세기 와 12세기 전반경의 파편이다. 이 파편보다 제시 유품이 흑자에 한 발 더 가깝게 다가섰다는 느낌이 있으니 12세기 중·후반의 유품이라고 추정하여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3) 예술성
현재의 연구로는 고려청자의 시원을 9∼10세기로 추정하고 있다. 토기를 굽던 나라에서 자기를 생산했다는 그 자체가 예술의 승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제시 유품은 실용을 목적으로 만든 것이기 보다 품위있는 장소에 비치할 것을 전제로 만들었다고 보인다. 그 이유는 실용을 목적으로 하였다면 귀를 달지 않아도 사용에는 하등의 지장이 없다. 그런데도 귀에 동그란 고리를 달고 그 고리를 지지하는 틀에는 박쥐문양으로 장식을 하였다. 이는 그릇의 존귀성의 표식일 것이다.
技藝면에서 보면 그릇의 동체를 상·하로 나누어 따로 따로 만들어 결합하였다. 박쥐 문양은 그 결합부위의 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니 따로 만든 박쥐 문양은 상하의 기체를 결합한 뒤에 붙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제시 유품의 동체를 상·하로 나누어 따로 따로 만들어 결합한 것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당시의 기술로는 한꺼번에 뽑아 올릴 수 없어서 그랬을까? 그렇지는 않다고 보아야 한다. 매병을 만들 수 있었으니 기술 부족으로는 볼 수가 없다. 항아리의 경우는 조선 시대의 중기(달 항아리)도 상·하를 따로 만들어 붙인 유물이 있으니 항아리에 한해서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 이는 앞으로 풀어야할 과제이다.
박쥐는 복을 상징하는 동물이니 어느 계층에서 선호하던 문양인지는 알 수 없으나 상당한 위치의 가정에서 소유하였던 그릇일 것이다. 박쥐 문양의 길상을 고려치 않더라도 문양이 있으므로 해서 예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해야 할 근거다 된다.
4) 희귀성
기면의 유색이 완성 흑자의 직전 유품으로 추정되니 흔하게 볼 수 있는 유품은 아니다. 필자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고려 흑자에 박쥐 문양은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품《나》 고려 흑자 어문병 (高麗 黑磁 魚文甁)
높이19.6㎝, 입 지름7.5㎝, 밑 지름7㎝ 고대부분
1) 유품의 현황
(1) 태토는 곱게 정선된 자토(赭土)이다.
(2) 기형은 유순한 곡선으로 마무리한 예쁜 화병이다. 입(口緣)의 조형은 매병의 형태이나 크기는 매병보다 넓다.
(3) 유약은 기면 전체와 고대의 이면까지 도장되었다. 유색은 윤기가 많고 두껍게 시유되었으며 칠흑(漆黑)의 이름다운 흑색 이다.
(4) 문양은 잉어를 전후 양면에 대칭으로 묘출하였다.
(5) 고대에도 시유되었으나 기체의 표면처럼 유층이 두껍지는 않다. 유층에 차가 있는 것으로 보아 기면의 유는 솔이나 붓으 로 덧칠 한 것으로 보인다.
(6) 받침은 자토에 모래를 섞은 비짐을 네 곳에 괸듯하나 두 곳 은 떨어지고 두 곳만 남았는데 비짐과 비짐 사이에도 자토 섞 인 받침이 붙어있다.
(7) 기면에 유약이 두껍게 시유되었으나 빙렬은 없다.
2) 시대성
(1) 문헌 사료
고려 흑자에 관한 문헌은 발굴하지 못하였다.
(2) 비정 유품
제시 유품은 기형이나 문양이 특이하여 고려 흑자로는 유사한 유품이 없다. 따라서 全羅南道 康津郡 大口面 沙堂里窯에서 출토되었다고 추측되는 靑磁鐵彩象嵌雲鶴文甁의 유색과 문양의 능숙도를 비교하고자 한다.
비교도 3 비교도 4
靑磁鐵彩象嵌雲鶴文甁(12세기 전반)
제시 유품을 비교도 3의 유색과 대조하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유색일 것이다. 검기는 비슷하지만 제시 유품에는 윤기가 많고 문양의 솜씨가 뛰어나다. 비교도의 문양은 붓으로 채화 하였으나 제시 유품의 문양은 상감 기법으로 묘출되었으니 비교 유품 보다는 이른 시기의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따라서 12세기 초반으로 추정해도 무리가 아닐 듯하다.
3) 예술성
비교도 5 비교도 6
朝鮮古蹟圖譜八 高麗時代陶磁器 朝鮮古蹟圖譜八 高麗時代陶磁器
3452號 靑磁彫刻飛龍形水注 3707號 黃褐釉下繪雙魚文洗
고려 시대 도자기에 고기 그림이 희귀하여 朝鮮古蹟圖譜에 수록된 도판을 인용하다 보니 화면이 선명치 못하다. 고려 시대에도 고기 문양이 이었고 훌륭한 조각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제시 유품의 고기 문양은 상감 기법으로 묘출하였다. 잉어의 비늘 한 조각 한 조각의 윤곽선을 흑채로 채화하여 입체감을 살렸으니 생동감이 있다. 잉어 문양을 상감한 백토의 부분에는 유약을 씌우지 않고 로정(露呈)된 채로 소성하였다. 지금은 백토가 미색으로 변색되었어도 아름답지만 당초는 흑백이 선명한 명화였을 것이다. 백토 위에 유약을 씌우지 않고 노정으로 소성한 이유는 몸체의 흑색을 윤택하게 만들기 위하여 불투명 유약을 씌었을 것이니 백토위에 불투명 유약을 씌우지 않고 흑색 바탕에 백색 잉어를 선명하게 부각시켰다.
4) 희귀성
고려자기에 고기 문양 자체가 희귀하지만 흑자에 고기 문양이란 극히 희귀한 화병이다.
유품《다》고려 흑자 목단문 매병 (高麗 黑磁 牧丹文 梅甁)
높이33.7㎝, 입 지름6.2㎝, 밑 지름 14㎝ 고대부분
1) 유품의 현황
(1) 태토는 곱게 정선된 자토(赭土)이다.
(2) 기형는 정통 고려 매병의 형태 이다
(3) 유약은 윤기가 많고 두껍게 시유되었으며 흑색 바탕에 붉은 색이 연하게 비치는 자흑색(紫黑色)이다. 기면 전체와 고대의 이면까지 시유하였다. 병의 내부는 보이지 않으나 고대 이면의 시유보다 동체의 시유가 두껍다. 유층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기면의 유약은 솔이나 붓으로 여러 번 덧칠 한 것으로 보인다.
(4) 문양은 모란 한 송이씩을 전후 양면에 대칭으로 描出하였는 데 백토로 상감하였다. 분장을 백토로 매운 것이 아니고 붓으 로 그리는 기법으로 묘출하였다. 그러니 상감 기법과 채화 기 법을 겸용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붓이 상감하려고 판 곳의 언저리를 다 매우지 못한 곳에는 태토의 노출이 미색으로 비친 다.
(5) 받침은 흔적이 없으나 매끄럽지 못한 것으로 보아 모래받침이었다고 생각된다.
2) 시대성
(1) 문헌 사료
고려 흑자에 관한 사료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2) 비정 유품
비교도 7은 『世界陶磁全集』에 수록된 靑磁鐵彩象嵌蔘葉文甁이고, 비교도 8은『世界陶磁全集』에 수록된 靑磁鐵彩象嵌雲鶴文甁 이다.
비교도 7의 해설에 따르면 白堆花와는 달리 상감과 같은 방법을 병용한 례라고 하였다. 제시 유품의 기법과 비교도 7의 기법을 비교하면 제시 유품이 비교 유품보다 앞선 시기의 것으로 추정할 수가 있겠다. 제시 유품에서 한 단계 발전한 것이 비교도 7의 기법이라고 추정되기 때문이다.
비교도 8의 명칭이 全羅南道 康津郡 大口面 沙堂里窯에서 출토된 파편과 같은 명칭이다. 그러니 사당리에서 수습한 파편이 이와 유사한 파편으로 추정할 수가 있다.
비교도 7 비교도 8
『世界陶磁全集』18「高麗」 『世界陶磁全集』18「高麗」
圖111 靑磁鐵彩象嵌蔘葉文甁 圖112 靑磁鐵彩象嵌雲鶴文甁
(12세기 중엽) (12세기 전반)
위의 비교도 7·8의 유품 보다 앞선 기법이라고 보이니 12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할 수가 있겠다.
3) 예술성
제시 유품에는 앞·뒤 양면에 모란 한 송이씩을 묘출하였는데 그 솜씨가 달인의 경지에 도달한 화가의 능숙한 솜씨이다. 그림의 붓 자취를 새어보면 열네 획으로 모란 한 송이를 완성하였는데 그 허벅지고 여유롭다. 보면 볼수록 보는 이의 마음에 여유가 느껴진다.
4) 희귀성
형식은 매병이지만 흑자 백퇴화의 매병은 도록에도 한 두 점이 있을 정도로 희귀하다.
유품《라》조선 흑자 호리병 (朝鮮 黑磁 葫蘆甁)
높이27.5㎝, 입 지름2㎝, 밑 지름9.5㎝ 고대 부분
제시 유품에는 두 가지 이름이 있다. 현물 시장(골동 가게)에서는 호리병이라는 이름으로 거래되고 있지만 역대 박물관장을 지낸 사람들(최순우,정량모) 등 학계에서는 瓢形甁이라는 이름을 쓴다.
호리병을 瓢形甁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일제강점기에 일인들이 바꾼 것이다. 왜 바꿨을까?
침략자들은 조선의 민족혼을 말살하려면 조선의 모든 사물의 이름부터 바꾸는 것이 우선이라는 원칙이 있었던 것 같다. 이름을 바꾸되 나약하고 작고 쓸모없고 비천한 이름으로 라는 원칙이 있었든 것 같다.
우리의 나라 이름도 조선을 이조로 바꿔 불렀다. 조선은 왕정 치하의 국가이지만 이를 이조로 바꿔 부름으로써 이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지배하던 집단이라는 의미로 해석을 강조하였다.
도자사에서 보면 『朝鮮王朝實錄』등에 白磁靑畵라는 명백한 기록을 고칠 수가 없으니 靑畵白磁로 슬쩍 바꿔 놓았다. 백자청화를 청화백자로 바꾼다고 백자청화 실물에는 하등의 변화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 스스로가 모르는 사이 역사와 전통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호리병을 瓢形甁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였는지, 아무 생각도 없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호리병의 사전적 의미는‘술이나 약을 담아 가지고 다니는데 쓰는 그릇’이라고 되어있다. 이런 의미의 호리병을 문갑위에 올려놓고 감상하는 경우와, 바가지를 닮은 瓢形甁을 감상하는 경우는 다르다.
호리병이라는 이름의 유품을 감상할 경우는 금강산 여행 길에 곤루봉에서 마른 목을 축이던 호리병의 꿀과 같은 물 한 모금의 시원함 그 시원함에 이어지는 아름다운 풍광들의 회상이 호리병의 감상에서 유발될 수 있지만, 바가지를 닮은 표형병의 이미지는 다르다.
瓢形甁 이라는 말은 우리 사전에는 없는 말이다. 사전에도 없는 말을 조작하여 개명한 것이 침략자들의 소행인 것이다.이런 소행을 분석이나 비판 없이 받아드려 후대로 전한 것이 해방 일세대의 업적인 것이다.
표형병이란 바가지를 닮은 병이라는 뜻인데 이 이름으로 유품을 감상할 때 무엇이 연상될까, 동냥바가지, 똥바가지, 거지 밥그릇, 아름다웠던 연상이라야 옹달샘의 물을 떠먹은 일, 깊이 빠질 수 있는 회상을 떠 올릴 수가 없다. 따라서 유품 자체의 이미지가 좋지 못하다. 이러니 제시 유품의 이름은 본래의 이름인 호리병으로 환원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1) 유품의 현황
(1) 태토는 연한 회청색이다.(떨어진 받침 자국에서 볼 수가 있 다.) 朝鮮黑磁 논문에서 말하는 분청사기 태토이다,
(2) 기형은 고려 유품에 있었던 호리병(瓢形甁)과 유사하다.
(3) 유약은 검은 색이나 청색이 많이 함유된 듯 흑청색이다. 두 껍게 시유되었으나 유의 흐름이 몰린 곳은 없다.
(4) 고대는 약간 깊은 편이다.
(5) 받침은 굵은 모래를 받쳐 구웠다.
2) 시대성
(1) 문헌 사료
捕盜廳謄錄 右捕廳謄錄 第29冊 乙酉 7월 20일 (1855) 포천의 烏指器를 서울에 팔았다는 기록이다.
이 유품을 제조한 가마를 (朝鮮黑磁의 硏究)논문에 따르면 포천의 길명리의 요이고 만든 시기는 1855연 경이라고 밝힐 수 있다. 태토는 회흑색, 흑갈색, 희색이고 치밀하고, 색조는 흑갈색이고, 빙렬이 있고 굵은 모래를 받쳐 구웠다고 하였다. 이 내용들이 제시유품과 대체로 일치한다.
(2) 비정 유품
(朝鮮黑磁의 硏究) 논문에는 많은 자료(파편 포함)가 실렸으나 제시자료와 유사한 기형이 없다. 그러니 기형이 유사한 高麗호리병과 기형을 비교하고, 색상은 연구자료 중에서 선정 비교 하고자 한다.
비교도 10 비교도 11
『세계도자전집』18「고려」 제시 유품《라》
도 209 黑釉瓢形甁(12세기후반)
기형은 비교도 9와 유사하다. 그러나 이는 고려시대의 호리병이다.
비교도 12 비교도 13
장성 충암리 가마터 출토
비교도 12는 유색을 비교하고자 제시한 유품이다. 이 유품은 (朝鮮黑磁의 硏究) 노문에 실린 유품이다. 비교도 12보다 제시 유품의 유색에 청색이 깊게 비친다.
3) 예술성
호리병의 용도를 사전에는 '술이나 약을 가지고 다니는데 쓰이는 그릇' 이라고 하였으니 여행용이라고 할 수 있다. 여행을 하지 않을 때는 實用性이 없는 기형이다. 왼야 하면 이런 형태의 병에는 액체(물이나 술)를 담기도 어렵고 붓기도 어려운 기형이다. 그러니 여행을 하지 안을 때는 감상용일 수밖에 없다. 기형의 유연한 곡선과 유색의 깊이도 아름답지만 일지매를 꽂아 놓으면 훌륭한 화병이 되기도 한다.
4) 희귀성
조선시대에 실용성이 없는 사치용 자기는 희귀하다. 正祖는 장인들에게 ‘기교를 부리지 말라’는 금령을 내렸다, 이 금령은 관요인 분원에 내린 금령이겠지만 조선조 도자기에 실용성 없는 사치용은 희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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