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절초 / 정세나
호젓한 못 둑에 앉아
산 그림자 품은 연둣빛 물속 바라보면
그대 얼굴이 구절초로
가만 가만 피어나네
늘 오고 싶은 만큼
내 마음을 비집던 그 시절
잊혀 지지 않는 모습이
잔잔하게 맴도는
옛 사랑의 그림자여
스산한 못 둑의 흰 꽃잎 속에
타는 노을빛
그대 모습도 보랏빛으로 물드네
- 시집『숲속은 한 음절씩 눈을 뜬다』(문학예술,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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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길을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다’ 안도현의 <무식한 놈>이란 시다. 시인은 구절초라는 이름을 문학소년 시절 박용래의 시 ‘구절초’를 통해 처음 알긴 알았는데, 이후 그런 꽃이 있겠거니 방치했다가 이십여 년이 지난 다음에야 이름과 꽃을 일치시켜 구절초를 처음 보았다. 꽃이 귀해서 만나지 못한 게 아니라 꽃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해후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지은 시라고 한다.
안도현 시인은 그 후로 꽃과 나무의 이름에 대하여 무식하기 짝이 없는 자신과 완전하게 결별했다고 하였지만, 나는 여전히 ‘무식한 놈’을 면치 못하고 있어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헷갈려한다. 구절초는 꽃대 하나에 하나의 꽃만 피우고 희거나 엷은 분홍색을 띄는데 비해, 쑥부쟁이는 길가 아무데나 볼 수 있고 향기가 별로 없는 연보라색 꽃이란 정도는 들어 알고 있으나 자신만만하게 가려내지는 못한다. 그 지경이다 보니 지금까지 꽃을 제재로 시를 쓴 기억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구절초와 쑥부쟁이 감국 산국 벌개미취 개미취 등의 가을꽃들을 뭉뚱그려 '들국화'라고 흔히 부르는데 식물도감에는 들국화란 꽃은 존재하지 않는다. 깊게 따지지 않으면 모두 들에 피는 국화과의 꽃이어서 틀린 이름도 아니다. 높지 않은 산길에 그리고 호젓한 못 둑에 소박하고 수수하게 피어있는 가을꽃들은 모두가 그놈이 그놈 같다. 그 가운데 구절초는 좀 더 한갓진 곳에서 볼 수 있는데, 음력 9월 9일(바로 오늘)이면 아홉 마디가 되어 꽃을 채취한다 해서 구절초라 불렸고 바로 이 시기가 그 절정이라는 의미이다.
청초하게 피어있는 그 가녀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여성시인으로서는 ‘내 마음을 비집던 그 시절’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겠다. 자연히 시공을 거슬러 좁은 길로 들어서게 되면 ‘옛 사랑의 그림자’도 만나게 되어 있다. 구절초는 흰 꽃잎이 신선보다 더 돋보인다 하여 ‘선모초’라고도 하는데, 그렇듯 본디 흰빛을 띄고 있지만 ‘타는 노을빛’에 그만 ‘그대 모습도 보랏빛으로’ 물들고 만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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