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문학 강의실 '징'

[스크랩] 카페 프란스 / 정지용

맑은물56 2011. 5. 13. 21:31

  

 

카페 프란스 / 정지용


옮겨다 심은 종려(棕櫚)나무 밑에
비뚜로 선 장명등(長明燈)
카페·프란스에 가자.

이놈은 루바쉬카
또 한 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비쩍 마른 놈이 앞장을 섰다.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먼트에 흐느끼는 불빛
카페·프란스에 가자.

이놈의 머리는 비뚜른 능금
또 한 놈의 심장은 벌레 먹은 장미
제비처럼 젖은 놈이 뛰어간다.

"오오 패롤(鸚鵡)서방! 굳 이브닝!"
"굳 이브닝!"(이 친구 어떠하시오?)

울금향(鬱金香) 아가씨는 이 밤에도
경사(更紗) 커튼 밑에서 조시는구료!

나는 자작(子爵)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大理石) 테이블에 닿는 내 뺨이 슬프구나!

오오, 이국종(異國種) 강아지야
내 발을 빨아다오.
내 발을 빨아다오.

- <학조> 창간호, 1926.6

.................................................................................... 

 

 1902년생인 정지용은 1923년부터 시를 썼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 지면에 발표되기로는 이 시가 그의 첫 작품이다. <향수>라는 향토색 짙은 서정시가 워낙 또렷이 우리들 뇌리에 각인되어 이와 같은 모던한 시는 얼른 정지용과의 이미지 연결이 쉽지 않다. 일본 동지사대학 유학시절에 쓴 초기 시이고 영문학도란 점을 감안하더라도 생경한 외국어 등에서 그의 지나칠 정도의 이국적 취향이 느껴진다.

 

 ‘루바쉬카’는 러시아 남성들이 즐겨 입는 블라우스풍의 윗옷이며, ‘보헤미안’은 집시 혹은 사회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방랑적이고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페이브먼트’는 교과서 어느 수필에서도 나오지만 포장된 신작로를 말하며 ‘패롤’은 앵무새, ‘울금향’은 튤립, ‘장명등’은 처마 끝이나 마당에 세워놓은 등을 말한다. 프랑스풍 카페에서부터 이국종 강아지까지 모더니즘의 특징을 온통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그저 모더니즘의 ‘폼’만 잡고 있는 것은 아니고 일제 치하 지식인의 무기력한 고뇌가 주조로 깔려 있다. 자조와 이방인의 부적응, 그리고 망국민의 설움이 고루 배어있는데 ‘이국종 강아지’에게 ‘내 발을 빨아다오’라는 마지막의 거듭 외침은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자학적인 심상의 표출인가. 백수의 비딱한 농간인가. 아무튼 우리 현대 시사에서 그만큼 뛰어난 언어감각으로 지적 서정시를 다채롭게 구사한 이도 없을 것이다.

 

 그의 호적(음력) 생일인 5월15일에 즈음하여 고향인 옥천 생가와 문학관 일대에서는 매년 ‘지용제(5월13~15일)’가 열린다. ‘향수공원’에 실제로 문을 열었다는 '카페 프란스'에 가서 언제 진한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이국종 강아지가 있나 두리번거려봐야겠다.

 

 

ACT4

 

 

출처 : 현실참여 문인ㆍ시민 연대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