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둘레산길 잇기 제7간 ☞ 언 제 : 2010년 4월 11일 10 : 20 - 14 : 10(약 3시간 50분) ☞ 어디로 : 봉산동 종점 ⇒ 오봉산 ⇒ 구룡고개 ⇒ 보덕봉 ⇒ 증골고개 ⇒ 용바위고개 ⇒ 금병산 ⇒ 수운교 ☞ 누구랑 : 나홀로
☞ 09 : 20 지하철(정부 청사역) 하차, 301번 버스(둔산 경찰서)로 환승하여10 : 05 봉산동 종점 도착 ☞ 오봉산 아래에 있는 마을을 <바구니>라고 부릅니다. 바구니, 뒷바구니 마을로 나누는데 합쳐서 부를 때 바구니라고 부릅니다. <백운>이라고도 부릅니다. 이미 구전에 따르면 고려시대부터 <박산소>라는 행정 단위인 소가 있었던 지역입니다. 오봉산에 올라서 아래쪽을 바라보면 지금도 바구니를 닮았습니다. 송강동 쪽이 개발로 인해서 바구니 한쪽이 파손된 것 같지만 틀림없이 바구니(바구리) 같습니다. ☞ 봉산동은 유성구의 북동쪽의 위치해서 서쪽으로는 산악지대이나 동쪽으로는 비교적 넓은 들이 펼쳐진 지역에 자리합니다. 봉산동의 동북쪽으로는 그리 높지 않으나 수려한 <불무산.162m>이 동북풍을 가리고 여기서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낮은 산악지대는 그 남쪽으로 이르러 봉산동의 진산격인 <보덕봉.263m>을 우뚝 세워서 서쪽으로는 비교적 높지 않는 산악지대로 봉산동의 서쪽을 장식합니다. 구전에 따르면 이미 선사시대에 사람들이 정착한 곳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에 따른 유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는 사람들이 정착을 하고 마을도 형성된 지역 으로 추정됩니다. 비교적 비옥한 땅이 펼쳐진 남쪽에는 신라 통일시대에는 촌락으로 큰 마을이 들어서고 고려시대에는 이미 구역 행정 단위인 <박산소>가 이 지역의 특이한 농촌지대를 관리했던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봉산동은 산지의 마을로서 풍수설에 따른 이야기도 많은 지역입니다. 삼운지간의 ‘만인가활지지’이며, 금반하엽형의 ‘만대가활지지’라는 설도 있습니다. 구전에 따르면 백할아버지의 자손의 피난처라고 말하며, 삼운지란 백운리와 뒷간 오봉산에 있는 바위 모습이 두꺼비 모습이어서 산세를 보호하는 백운이고, 청운은 마을로 들어오는 길이 외길이어서 청운이란 설이 있습니다. ☞ 봉산동 앞바구니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으로 정월 열나흗날에 <木神祭>를 지냅니다. 목신제를 지내는 곳은 지금의 구즉동사무소 앞에 있는 느티나무입니다. 바구니 마을에서는 이 느티나무를 神木이라 부릅니다. 마을의 수호신처럼 받드는 나무로 마을이 잘 되고 못 되고 하는 것은 느티나무 神의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믿고 있으므로 마을 사람들은 정성을 다 합니다.
☞ <뒷바구니 길>을 따라 <법화사>를 따라 <오봉산.五峰山>을 향해 출발합니다.
☞ <큰법당>입니다.
☞ <송유관 저유소>는 지나쳤습니다.
☞ 오나가나 <철탑>입니다. 그것도 문명의 흔적이지요.
☞ <오봉산.五峰山.271m>입니다. ☞ 유성구 봉산동과 구룡동 경계에 있는 산입니다. 바구니 마을 뒤에 있습니다. 그러나 산의 모양이 수려하여 옛날부터 여러가지 전설이 전해옵니다. 오봉산은 다섯 봉우리로 되어 있는 산입니다. 옛날에는 선녀 다섯 명이 산봉에 내려와서 착한 효자와 효녀의 집에 몰래 도움을 주고 하늘로 올라가곤 하였다는 전설이 전합니다. ☞ <오봉산.五峰山.271m>에서 내려다 본 <신구교>입니다.
☞ <오봉산.五峰山.271m>에서 내려다 본 <불무교>입니다. 왼쪽은 <불무산>입니다.
☞ <구룡 고개>로 향합니다.
☞ <염소 목장>입니다.
☞ <구룡 고개>입니다. 봉산동 앞바구니에서 서북쪽으로 구룡동으로 넘어다니는 고개입니다. 구룡동 사람들이 봉산동이나 신탄진 場으로 볼일을 보러 다니던 고개였습니다. ☞ 구룡동은 유성구의 북쪽에 위치해서 금병산과 그 북쪽 산악지대에 자리합니다. 구룡동의 산은 참으로 수려합니다. 해발 300m에 미치지 못한 山이 여러 갈래로 서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금병산>을 주축으로 한 山과 이에 연한 나지막한 山들이 모두 <금병산>의 아들과 손자 山 같습니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오봉산>과 그 남쪽에 자리한 <보덕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도 그 산형이 수려합니다. ☞ 구룡동이 그 동쪽을 가리고 있어서 사실상 오지를 면치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山으로 가린 구룡동은 고려 시대 이전에 이미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곳입니다. 첩첩한 山 사이로 남쪽 금병산 줄기 <증골고개>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흐르면서 주변 계속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수를 합치고 은은하게 흘러가는 <삼성천>은 구룡동의 젖줄입니다. 삼성천은 남쪽에 생각지도 못할 <구룡 소류지>를 조성하여 물고기들에게도 쉼터를 마련해 주고 여기서 다시 북쪽으로 흘러가는 냇물은 그 주변에 들을 조성하여 사람들에게 삶의 터를 마련해주고 있습니다.
☞ <구룡 고개>에 자리 잡은 음식점입니다.
☞ <보덕봉.普德峰>까지 1.21km입니다.
☞ 한 쪽엔 무덤을 위한 철책이, 한 쪽엔 염소를 위한 철책이 자연을 훼손하고 눈살 찌푸리게 합니다.
☞ 이곳에는 조상님 묘지를 위한 목책이 발길을 돌리게 합니다.
☞ <보덕봉.普德峰.265m>입니다.
☞ <헬기 장>과 함께 주민들을 위한 운동 시설을 갖춰 이름에 걸맞게 덕(德)을 널리 베풀고 있습니다.
☞ 근처에 약수터와 <송꽃봉>이 자리합니다.
☞ <보덕정.普德亭>입니다.
☞ <용바위 고개>로 가기 위해 오른쪽으로 갑니다.
☞ <생강나무>가 노란 손수건을 흔들며 환영합니다.
☞ 조상을 위한 후손들의 정성이 산허리를 자릅니다.
☞ 진달래는 연분홍빛 수줍음으로 환영합니다.
☞ <증골 고개>입니다. 구룡동 <사시마> 마을에서 남쪽으로 <별락정> 마을을 지나고 남쪽으로 고개를 넘어 덕진동으로 넘어다니는 고개입니다.
☞ 새로 단장한 이정표입니다. 그래도 <대둘>의 이정표가 더 정겹습니다.
☞ 긴 산행 동안 유일하게 차를 나누며 잠시 환담한 분입니다. <테크노 밸리>에 거주하십니다.
☞ <한국 원자력 연구소>입니다. 그 앞이 <덕진 소류지>입니다.
☞ <용바위 고개.348m>입니다. 구룡동 <청운동>에서 추목동 <숯골>로 넘어다니는 고개입니다. 청운동에서 대곡티로 올라오다가 구룡 소류지 남쪽에서 동쪽으로 올라가면 <대곡티>이고 서쪽으로 갈라지는 고개로 접어들면 추목동 용바위를 지나 <숯골>로 내려가게 됩니다. ☞ 옛날 금병산 옥내봉 중턱에 용이 되기 위해 승천(昇天)만을 기다리는 <이무기> 셋(청, 흑, 청흑)이 살고 있었습니다. '청이무기'와 '흑이무기'는 만나기만 하면 물어뜯으며 싸우고 '청흑이무기'는 말리는 형편이었지만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서로 승천하고 싶은 욕심에 싸웠습니다. 어느 날, 열흘이 넘도록 싸우자 '청흑이무기'도 지쳐서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비가 오더니 먹구름이 사라지고 하얀 물줄기가 하늘에서 내려와 천룡(天龍)이 나타나자 '청흑이무기' 혼자서 맞이하였습니다. 그러자 천룡이 "땅속에 있는 두 놈을 끌고 오라"고 호령하였습니다. 굴 속에 들어가 두 이무기에게 승천 준비를 서둘러 한 뒤 끌고 왔습니다. 그러나 싸우느라고 피투성이가 된 모습을 보고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어서 타라"하고 그 물줄기가 서해 바다로 가자 바닷물에 떨어뜨린 뒤 파도에 떠밀려 고통을 받게 하고난 뒤 천룡 왈, "너희 셋에게 하늘에 올라가는 '굴'을 주어 道를 닦기를 기다렸거늘 매일같이 싸움만 하였으니 미물만도 못하다. 그대들의 자리엔 이미 다른 이무기들이 차지하였으니 너희들은 이곳에서 해룡(海龍)의 종이 되어 천년을 기다려라." 하며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껏 승천하지 못한 채 해룡의 종살이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이후 이곳 금병산 <龍바위>에는 싸움이 그치고 100년만에 하나씩 龍이 승천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도 금병산의 세 굴에는 승천을 기다리는 이무기가 살고 있다고 합니다.
☞ <자운대>에서 지은 정자입니다.
☞ <자운대>의 전경입니다.
☞ <자운대>의 골프장입니다.
☞ <자운대> 건너로 <신성동>과 <유성>이 황사 사이로 희미하게 보입니다.
☞ 정자 주변은 진달래가 봄을 불러옵니다.
☞ 정자에서 바라본 <한국 원자력 연구소>입니다.
☞ <수운교> 방향으로 하산하는 지점입니다.
☞ 금병산(錦屛山.382m)입니다. 신라 때는 ‘금평산’, 고려 때는 ‘만인산’이라고 불리다가 태조 이성계가 조선 창업의 뜻을 품고 8도 명산에 기도하던 중, 비단 병풍을 갖추고 치성(致誠)하라는 꿈을 꾸었는데 이 자리의 형세가 ‘비단 병풍’과 같아서 오늘의 이름을 붙이고 산천 기도를 드렸다고 전합니다. 지도상에는 <노루봉>으로 표기된 곳입니다.
☞ 이곳은 수운교의 도솔천 궁(宮)을 옹위하고 있습니다. 유성구 추목동에서 연기군 금남면에 걸쳐 12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데 수운교에서 각각 이름을 부여하고 표지석을 세웠습니다. 동쪽으로부터 1) 옥련봉 2) 일광봉 3) 공덕봉 4) 도덕봉 5) 옥당봉 6) 연화봉(현재의 위치) 7) 운수봉 8) 출세봉 9) 감찰봉 10) 현덕봉 11) 대법봉 12) 창덕봉입니다. 옥당봉(玉堂峯)에서 대전 <둘레>길과 <경계>길이 나뉩니다.
☞ 이 아래 방향으로 <수운교>를 향해 방향을 바꿉니다.
☞ <수운교>에서도 묘소를 정비하고 있습니다.
☞ 생각없이 하산하노라니 문이 굳게 닫혔습니다. 겨우 작업하시는 분께서 문을 열어 주셔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많은 곳에 민간과 군대 사이의 간격이 자리합니다.
☞ <수운교> 입구입니다.
☞ 황사 속에도 날씨는 따뜻해서 흐른 땀을 <청정수>로 달랩니다.
☞ <수운교 석종>입니다. 대전광역시 유성구 추목동 403-1번지에 소재하며 1989년 3월 18일 문화재 자료 1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 이 석종은 ‘누운 소’ 또는 ‘개구리’ 모양을 닮은 돌로 두드리면 쇠소리가 나므로 일명 석고라고 불립니다. 충청남도 보령군 미산면 황룡리에 사는 송석호는 꿈에서 깨어나서 생각하기를 참으로 기이한 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이 어지러워짐에 따라 민심은 허약해져서 사람이 산다는 멋도, 맛도 잊혀져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나라를 구원하고 민심을 수습하겠다고 금강산 관음봉에서 태어난 최교주도 송석호와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바다로 면한 한적한 산골을 넘어서 깊은 골짜기에서 들리는 석종 소리를 듣고는 바로 저 소리가 혼탁한 민심을 바로잡을 소리라 했습니다. 그 이튿날 밤 송석호는 잠자리에 들어서 또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푸른 소나무가 우거진 산과 푸른 물이 흐르는 계곡 사이로 소한 마리가 바삐 뛰어서 여기저기를 헤매다가 산정상에서 없어지자 어제와 똑같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리고는 한쪽에서 '사인여천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이란 말이 메아리쳐 왔습니다. 그리고 그 소리가 그치자 또 달려 다니던 소는 산 정산에서 내려와서 숲속으로 물이 흐르는 계곡과 산을 헤매다가 아득하게 멀리 보이기 시작하면서 어디론지 사라졌습니다. 송씨는 억지로 꿈에서 깨어나려고 몸부림치다가 겨우 꿈에서 깨어나서는 바른 자세로 앉고 는 지그시 눈을 감았습니다. “그렇다. 이것은 하늘의 계시다. 그래도 하늘은 우리를 버리지 않는구나. 그렇지 앞으로는 유불선합일의 무극대도만이 백성들의 갈 길이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하지만 그 종소리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또한 소가 푸른 숲과 푸른 물이 흐르는 계곡을 달리다가 산정상에 올라갔을 때는 종소리가 들리고 말의 울림이 들리니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오늘 꿈속에 나타났던 일이 모두 수수께끼만 같았습니다. 송씨가 그런 꿈을 꾸던 날 교주도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금강산에서 벗어나 차령산맥의 줄기에서 황소가 뛰어오고 있었으며 그 황소는 금강산 기슭까지 왔다가는 다시 되돌아서서는 쏜살같이 사라졌습니다. 교주는 생각했습니다. “백성이 바로 저 황소와 같은 거다.” 그러나 황소는 누런 빛깔도 아니고 검은 빛깔도 아닌 누르스름한 빛깔이었습니다. 교주는 생각했습니다. “백성이 찌들어서 소도 찌들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는 그 소가 없어질 때 들려왔던 종소리를 생각했습니다. “저 종소리를 잡아야 한다. 저 종소리의 연유가 궁금하구나.” 교주가 그리 생각하고 소의 모양과 백성의 찌든 얼굴을 생각하면서 백성을 구할 길을 모색하면서 지그시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꿈을 꾼 지 바로 다음날 송씨도 또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자기가 사는 성주산 기슭 개천에서 어제 나타났던 황소와 똑같은 소가 나타나서 계곡을 타고 한참 올라가다가 숲을 헤치고 산으로 올라가서는 산 정상에 이르러 소가 없어지더니 어제와 똑같은 종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으며 이번에는 크게 "인내천"하고 외치는 소리와 함께 태양의 불빛이 강하게 땅으로 내리 쬐이는 것이었습니다. 송씨는 그때 꿈속에서도 하늘을 우러르며 합장했습니다. 햇빛이 서서히 물러가고 다시 푸른 소나무 숲이 보이기 시작할 때 황소는 산정상에서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송씨는 꿈속에서도 그 황소가 달려가는 곳을 유심히 살폈습니다. 황소는 푸른 숲을 헤치고 나와서는 계곡을 한참 내려오다가 물살을 헤치고 건너와서는 주위를 살피고 조용히 앉았습니다. 그리고 황소는 없어졌습니다. 송씨는 꿈속에서 깨어나며 "저 황소다"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다시 합장을 했습니다. 하늘이 계시라고 꿈을 꾸며 “저 황소다”하고 소리칠 때 교주도 똑같은 꿈을 꾸었으나 소리는 치지 않았습니다. 송씨는 그 이튿날 동이 트자 황소가 나오고 달려와서는 없어진 계곡을 찾아갔습니다.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습니다. 계곡을 따라가다가 물가에 서서는 이곳에서 황소가 건너갔다고 생각하고서는 냇물을 건너갔습니다. 냇물을 건너서 얼마 가지도 않아서 꼭 황소를 닮은 돌을 뱔견했습니다. 그는 그 돌 앞에 무릎을 끓고 작은 돌을 주워서 한 번 그 돌을 때려 보았습니다. 돌에서 나오는 소리는 꿈속에서 들었던 종소리와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송씨는 이 돌은 하늘에서 내린 돌이라고 생각하고 1925년 9월 15일 수운교 전당에 안치하고는 종을 울리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석고를 운반하기 시작하였으나 산주가 나타나서 돌 값을 내라고 하였습니다. 할 수 없이 돈을 내어 주고 운반을 했으나 도중에 보령경찰서에 압수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석종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가까스로 되찾아 수운교로 옮겨졌습니다. 이 석종을 천단 옆에 놓아 두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조그만 돌로 두드려 쇠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두드리는 부위에 따라 약간씩 다른 쇠소리가 나며, 세계 평화와 종교 통일의 날을 알릴 때 크게 울릴 것이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 몇 년 전 건물 보수 공사를 하면서 이 석종 주변에 보호망을 설치한 후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한편 수운교 측은 이 석종 맞은편에 이와 비슷한 형상의 또 다른 돌을 구해다 놓았습니다.
☞ 처마에 달린 <풍경>이 <용머리>를 희롱하는 드합니다.
☞ 문화재청에서 지정한 <대한민국 근대 문화 유산> 제335호입니다.
☞ 문화재청에서 지정한 <대한민국 근대 문화 유산> 제333호입니다.
☞ 대롱대롱 매달린 <범종>의 용도는 무엇일까요?
☞ 606번 시내버스(신흥동 행)를 타고 정부청사 동문에서 하차합니다. ☞ <정부청사>역에서 환승하여 집으로 향합니다. ☞ 동료 직원의 <모친 상>에 참여하기 위해 오늘 <시 경계 5구간>에 불참했습니다. ☞ 오랜만에 만나는 <대둘>이 반갑고 즐거웠습니다. 회원님들이 그립습니다.
2010. 04. 11(일). 松影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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