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스크랩] 음악의 악성(樂聖) 세종대왕 - "소리가 하늘이다"

맑은물56 2010. 2. 2. 11:27

1. "이 소리 하나가 약간 높은데 무엇때문인가?"

                - 조선의 악성(樂聖) 세종.

 

 
                    집준관(출저-© encyber.com)

(종묘대제 아헌례. 

  각 실 집준관으로 상준에 담긴 양주를 작에 따르기 위해 서 있다.)

      

                     종묘제례 (출저-© encyber.com)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

 

종묘제례(, 중요무형문화재 56호).

 

 

종묘제례는 왕실에서 주관하는 제사로 국가적 행사였다.

 

이 제사에 사용되는 음악이 바로 종묘제례악(중요무형문화재 1호)이다.

 

 

수많은 악기들이 제례를 더욱 장엄하게 해준다.

 

이 종묘제례악의 작곡가는 세종이다.

 

"새로운 음악을 모두 임금이 만들었는데

 

 막대기로 땅을 치면서 박자를 맞추어 하루 저녁에 만들었다."

 

 (新樂節奏皆上所制以柱杖擊地爲節一夕乃

  신악절주개상소제이주장격지위절일석내)

 

 
     
                           

                      

 
 
 

 

조선 최고의 성군.

그는 왜 음악에 매료되었던 것일까?

그가 음악으로 추구한 것은 무엇일까?

 
 

세종대왕과 음악.

어딘가 부조화가 느껴지기도 하지만, 세종은 '조선의 악성(樂聖)'이었다.

 

박연이나 우륵, 왕산악처럼

우리 역사에서 음악으로 이름을 날린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우리 음악사상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을 이야기할 때

세종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실제로 세종은 직접 작곡한 악보를 실록에 남기기도 했고

박연에게 악기를 새로 만들고 궁중음악을 정리하게 했다.

 

이제 막 창업한 새나라 조선의 문물을 정비해야 했던 세종이

이토록 음악에 매달려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음악의 악성' 세종에 대해,

조선의 소리, 조선의 음을 찾기 위해 밤을 지새웠던 세종을 만나보자.

 

<세종실록>에는 음악과 관련된 기사가 유난히 많다.

그중에는 특히 세종의 음악성을 보여주는 기록도 적지 않다.

 

세종 15년 1월 1일의 기록을 보면 세종의 뛰어난 음악성을 엿볼 수 있다.

 

새로 만든 악기 편경을 선보이는 날.

소리를 듣고 있던 세종이 악기곁으로 다가왔다.

이 편경을 만든 실무책임자는 악학별좌(樂學別坐)직의 박연.

 

"이 소리 하나가 약간 높은데 무엇때문인가?"

 

세종이 지적한 편경에는 먹줄 자국이 남아 있었다.

 

"...편경을 잘라내기 위해 친 먹줄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제대로 더 갈지 않아서 음이 높았습니다..."

 

세종은 먹줄 하나 두께가 내는 음의 차이를 알아낸 것이다.

 

그렇다면 편경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경기도 파주시 연악사(국악기제작사).

편경은 경석으로 만든다.

 

편경은

모두 16개의 돌이

각기 다른 음을 내도록 만들어지는데

돌의 모양은 모두 같게 만든다.

 

먼저 경석위에 먹줄로 모양을 낸 다음 돌을 잘라낸다.

경석은 철사줄로 자르는데

이때 금강사라는 입자가 고운 모래를 계속 뿌리면서 갈아낸다.

 옛방식 그대로다.

 

세종이 감지했던 먹줄 하나의 두께는 어느 정도일까?

 

먼저 먹줄이 남아있는 상태의 음을 들어보았다.

음의 높낮이를 알아보기 위해 주파수를 측정했다.

 

다음엔 이 경석을 좀더 갈아보았다.

역시 금강사를 이용, 경석을 갈아냈다.

이렇게 돌의 두께를 맞추면서 적당한 음을 찾는 것이다.

 

"돌을 갈면서 음을 맞추어야 합니다."

"두께에 따라서 음의 높낮이가 달라집니까?" 

"그렇죠. 두꺼우면 음이 높고, 얇아지면 음이 낮아집니다.

 그래서 경석의 면을 눕혀 문질러 갈아내어 음을 낮게 맞추는 것입니다."

 

먹줄 하나 두께만큼 더 갈아냈다.

더 얇아진 경석.

 

음은 어떻게 변했을까?

 

갈아낸 경석의 음의 높이는 약 10센치 정도 낮아졌다.

10센치면 반음의 1/10높이.

미세한 차이다.

 

"먹을 다 갈아 없앴더니 제 소리가 났다." - <세종실록>

 

세종은 반음의 1/10음을 구분할 정도로 뛰어난 음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2. 여말선초의 혼란기,

            음악 정비 사업에 힘쓰는 세종 - 편경 제작

 

그런데 임금앞에서 시연을 했을 정도라면 편경은 대단히 특별한 악기일 것이다.

세종은 왜 이렇게 편경 제작에 힘을 쏟았을까?

여기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경기도 화성시 팔달면 건달산.

편경은 세종대에 비로소 제대로 만들 수 있었다. 

 

"우리가 걸어온 이 자리가 옛날부터 조선 500년 동안 경석을 많이 사용했던 자리입니다.

 지금 보이는 건달산 일대가 바로 세종시대 우리 서씨들의 집성촌이었습니다.

 그때 왕실의 시비로 계셨던 서화라는 분이 경석을 발견해서 세종께 받쳤습니다."

                                                                                   -서지민 소장(궁중옥연구소)

 

조선 건국초 혼란기에 많은 악기들이 사라졌고

편경도 역시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세종 이전까지 중국에서 보낸 편경을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곳에서 경석이 발견되면서 편경을 제작할 수 있었다.

남양석(南陽石)이라고 부르는 이곳의 경석은 지금도 채굴되고 있다.

남양석은 품질도 뛰어나다.

품질이 좋은 돌과 나쁜 돌은 그 소리에서 확연한 차이가 난다.

 

"외형으로 봐서 품질이 좋은 돌은

 성분의 입자가 곱고 이렇게 단색이며 연한 옥색입니다."

                                                                               - 김현곤(국악기 제작 악기장) 

 

좋은 돌과 잡석의 차이는 일반인도 느낄 수 있다.

좋은 돌은 맑고 투명한 소리가 나고

품질이 안 좋은 돌은 탁한 소리가 난다.

 

<국립국악원>에는 세종때부터 새로 만들기 시작한 각종 악기가 전시되어 있다.

많은 악기중에서 편경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편경은 모든 악기의 기준, 즉 조율악기다.

 

"편경은 돌로 되어있어서

 기후조건의 영향을 받지 않고 일정한 음고를 내줍니다.

 그래서 가야금이나 거문고처럼

 연주하는 기후조건에 따라 음고가 많이 변하는 악기와 많이 다릅니다.

 편경은 일정한 음을 내서 조율악기로 사용되어왔습니다."

                                              - 서인화 학예연구관(국립국악원 악기연구소) 

 

악기는 '우주의 소리'를 모두 담아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인식이었다.

따라서 악기는 모두 자연 재료를 이용해 만들어냈다.

 

나무로 만든 타악기인 (鼓)와 (祝),

으로 만든 질그릇 악기인 (缶)와 (塤),

대나무로 만든 악기 (笛)과 (琴).

이런 악기로 우주의 소리를 담으려 했다.

 

"유교 음악에서 8음은 아주 중요한 음악입니다.

 우주를 구성하는 여덟가지 악기 재료,

 흙, 돌, 나무, 쇠, 실, 대나무, 바가지, 가죽 등 입니다.

 이러한 악기로 음악을 연주함으로써 우주를 반영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고려말 조선 초기의 어지러운 상황에서 악기가 많이 소실되었고,

 세종대에는 여러 악기를 구비하면서 완전한 음악을 연주하려 노력합니다."

                                                                            - 서인화 학예연구관

 

 

3. 음악을 통해 성리학적 이상 세계를 추구한 세종.

            - 황종율관 제작, 도량형 통일. 

 

이처럼 악기를 갖추고 훌륭한 음악을 정립하려고 한 세종.

세종의 이런 노력에는 음악 정비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조선은 유교, 즉 성리학(性理學)을 국시로 하는 나라.

 

"여기 있는 세 질이 모두 <성리대전(性理大全)>입니다.

 <성리대전>은 성리학의 교과서와 같은 책입니다.

 왕도정치(王道政治)라든지 성인군주론(聖人君主論)과 같은

 이런 정치에 대한 이론적 근거로써 이 책들을 수용한 것 같습니다."

                                            - 김종식 수석연구원(한국학진흥원)

 

세종은 이 책들을 전국에 보급했다.

성리학을 국가 통치 이념으로 확립하려는 의도였다.

 

<성리대전>의 한 권인 <율려신서(律呂新書)>.

음악이론서다.

 

음악을 통치의 한부분으로 여긴 것이다.

여기에 보면 음악의 시작은 황종음(黃鐘音)에서 시작된다고 되어 있다.

 

"황종음이라는 음은  '누를황(黃)'자가 들어있는 것처럼 노란색을 나타내고

 노란색은 중심을 나타내고 가장 고귀한 색깔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황종음을 정한 다음에 나머지 음을 만들어 나가게 됩니다.

 즉 황정음은 다른 음들의 기준이 되는 기본음입니다."

                                                                             - 전인평 교수(중앙대 국악대학 창작국악과)

 

<난계유고((蘭溪遺稿)>

이때 조선의 음악을 정비한 인물이 박연(, 1378~1458)이다.

 

박연은 세종에게 조선의 음악을 정비해야 한다는 상소를 무려 39편이나 올렸다.

그중에는 '황종율관'을 제작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율관 제작을 위한 상소 - '청제율관소(請制律管疏)'

 

"율관은 기장으로 줄을 세워 만든다"

 

기준음인 황종음을 내는 기구.

그것이 바로 황종율관이다.

 

황종율관 제작(세종 7년, 1425년)

 

세종은 박연의 주장을 받아들여 황종율관을 제작케 한다.

 

황종율관은

기장알 90개를 늘어놓은 대나무 길이에서 나는 소리였다.

 

박연은 중국의 방식 그대로 황종음 제작에 나섰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중국에서 보내온 편종의 음보다 약간 높았던 것이다.

 

세종 12년, 9월 11일.

세종은 박연의 실패 원인을 간파했다.

 

"우리나라가 동쪽 끝에 있어서

 춥고 더운 기후와 풍토가 중국과 현격하게 다른 데 

 어찌 우리나라 대나무로 중국의 황종관을 만들려고 하는가.

 우리나라는 소리가 중국과 다르기 때문에

 중국의 옛 제도를 그대로 따라서 옛 황종관을 만드는 것은 옳지가 않다." 

 

박연은 중국의 기록을 그대로 따랐는 데

중국 기장과 우리나라 기장의 크기 차이를 간과 했던 것이다.

박연은 다시 몇 차례 시도 끝에 황종율관을 만들었다.

 

조선 시대 기준음은 어떤 음이었을까?

 

세종때의 황종율관을 복원한 것을 불어보았다. 

측정 결과 황종음의 주파수는 278.5 헤르츠(Hz)였다.

 

"이 음은 서양에서 말하는 '도'음보다 약간 높은 음으로 측정되었습니다."

                                                       - 정환희(국립국악원 악기연구소)

 

황종음이 만들어지자 나머지 음들도 만들 수 있었다.

 

황종음에서 1/3을 자른 것은 임종음 '솔',

임종음에서 1/3을 더하면 태주음 '레'

여기서 다시 1/3을 자른 것은 남려 '라'

 

황종음에서 1/3을 더하거나 줄이는

이른바 '3분손익법'으로 12음을 모두 만들 수 있었다.

 

황종 - 대려 - 태주 - 협종- 고선 - 중려 - 유빈 - 임종 - 이직 - 남려 - 무역 - 응종

 

이렇게 해서 황종음과 나머지 음이 만들어졌다.

음악을 세우기 위한 세종의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이다.

그런데 황종율관은 단순히 음악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황종율관은 도량형의 기준이 되었다.

 

황종율관의 길이로 황종척(34.7cm)이 만들어지고  

이를 기준으로 용도에 맞는 자가 만들어졌다.

 

포백척 - 황종척 - 영조척 - 조례기척 - 주척

 

황종관은 부피의 기준도 되었다.

 

직경 12mm의 황종율관에는 기장알 1200개가 들어간다.

이 황종율관 2개 양이 1홉이 되었다.

그리고 10홉이 1되가 되고, 10되가 1말이 된다.

 

이렇게 정해진 도량형이 실제 생활이 적용된 것이 남아 있다.

 

수표교(서울유형문화재 제 18호 - 서울 중구 장충단공원)

강의 수위를 재던 수표(보물 제 838호).

 

수표는 세종때 처음 청계천에 설치되었다.

 

수표에는 수위를 재는 눈금이 새겨져 있는데

모두 아홉 등분으로 하여 가뭄과 홍수위 등을 표시하고 있다.

 

수표 수위 한 칸은 21.6cm(1주척)

수표에는 주척을 적용했던 것이다.

 

음악에 대한 세종의 관심은

유교적 이상국가를 건설하려는 데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런 특별한 동기에서 황종음을 찾았고

이를 바탕으로 도량형을 통일했다.

 

음악을 세우는 것.

그것은 바로 국가의 표준을 세우는 것이기도 했다.

 

 

3. 세종의 음악적 동반자 박연, 아악 정비

 

그런데 국가 표준도 표준이지만

왜 유교 국가 조선에서 음악이 이처럼 중요시 되었을까?

 

그것은 음악이 단순히 듣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풍속과 민심을 바꿔서 정치를 고르게 하는 첩경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즉, 좋은 음악은 좋은 정치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세종은 음악을 통해 국가 체제를 정비하려 했었고

세종의 이런 노력을 받든 사람이 바로 박연이었다.

 

옥계폭포(충북 영동군 심천면).

 

세종의 음악적 사업을 가장 잘 이해하고 도운 인물이 있다.

바로 충북 영동 출신의 난계 박연.

그는 대금을 잘 불었으며 음악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왕지' - 박연의 진사과 합격 증서

 

태종때 이미 과거에 급제한 박연은 명문가 후예답게 학문도 높았다.

그는 세종의 세자 시절, 세종의 글선생이었다.

 

세종은 세자 시절부터 음악에 조예가 깊었으며

현악기인 금(琴)을 아주 잘 연주했다고 적고 있다.

 

이때부터 세종과 박연은 서로의 음악적 소양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 인연으로 세종은 박연에게 음악을 맡겼던 것이다.

 

그러나 세종의 음악 정비 사업에 반대의 목소리도 높았다.

황조음을 찾고 율관을 만드는 것은 천자가 해야 할 일이지,

제후가 해선 안 된다는 것이 반대파의 주장이었다.

 

세종 15년 1월 1일.

 

"편경의 모양과 소리는 어떻게 만들었는가?"

 

"편경의 모양은 중국에서 보내준 모양를 따라 만들었고

 편경의 소리는 신이 스스로 만든 12음관에 따라 만들었습니다."

 

"중국의 음악을 버리고 우리 스스로 음관을 만든 게 옳은 일인가?"

 

이런 반대를 무릅쓰고 세종이 박연과 더불어 음악을 정비한 까닭은 무엇인가?

 

대성전(공자 사당) - 중국 산동성 곡부

 

통치에서 음악의 역할을 특히 강조한 이는

바로 공자(孔子, BC 551 노(魯)나라~BC 479)다.

 

공자는 춘추 전국 시대의 혼란을 예학(禮學)이 무너진 탓이라 여겼다.

 

이런 혼란을 극복하고

요순 시대 같은 태평성대를 이루기 위해서는

예학을 회복해야 한다고 여겼다.

 

세종 역시 음악을 통해

조선을 유교적 이상 국가로 만들려고 했고

이 동반자로 박연을 선택했던 것이다.

 

"악학 정비라고 하는 숙원은

 유교 하면 최고 이상 국가인 요순 임금시대를 태평성대 시대로 보고 있는데,

 아정악음악 즉, 아악 정비에 있어서는 박연이 월등한 역할을 하시고

 그에 대해 밝으신 분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박연이 세종으로부터 제일 먼저 받은 프로젝트가 아악 정비(雅樂 整備)였습니다."

                                                                                              - 김세종 박사(음악회)

 

아악중국 황실의 음악.

그러나 당. 송 시대를  거치면서 중국에서도 제 모습을 잃은 상태였다.

 

그런데 조선의 박연은 성리학의 창시자 주자가 쓴

<의례경전통해시악(儀禮經傳通解詩樂)>이라는 문헌을 근거로 아악을 복원한 것이다.

 

당시로서는 중국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것이 지금 <세종실록>에 악보로 남아 있다.

 

박연이 복원한 아악의 악보.

 

문묘제례악.

 

박연이 복원한 아악중에 지금도 실제로 사용되는 게 있다.

공자의 사당에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문묘제례악이 그것이다.

 

우주의 소리를 담아낸 아악.

문묘제례악은 춤과 함게 연주된다.

춤은 예법이 갖춰진 태평성대의 동작을 표현한다.

 

음악과 춤이 어우러진 문묘제례악.

이것이 바로 박연이 복원한 아악이다. 

 

아악을 조선이 복원해냈다는 것은 세종의 자부심이었다.

 

"우리나라의 음악이 비록 다 잘 되었다고 볼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중국에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다.

 중국의 음악인들 어찌 다 바르게 되었겠느냐."

                                                                  - 세종

 

"아악이라고 하는 것은 동양인의 머릿속에 아주 이상적인 음악의 원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중국에서도 고대에나 완전한 형태로 있었지,

 후대로 내려오면서 어그러져 참고할만한 모범이 없었는데,

 조선 세종때 이루어진 아악은 원전에 버금가는 가장 이상적인 모범 형태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재현해놓고 소리로써 그것을 들을 수 있고 눈으로 보는 것은

 문화 시민으로서 뿌듯함 같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 송혜진 교수(숙명여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 

 

아악 정비에는 박연의 노력과 열정이 큰몫을 했다.

 

"앉아서나 누워서나

 매양 손을 가슴 아래에 얹어서

 악기를 다루는 시늉을 하고

 입속으로는 소리는 짓고..."

                                       - <연려실기술>

 

박연은 늘 음악만을 생각했고, 음악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 열정이 지나쳐 병을 얻기도 했다.

 

세종은 이러한 박연의 음악 작업을 주도한 음악 정책의 리더였다.

박연의 일을 검토하고 지시했으며 또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너는 내가 아니면 음악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고

 나도 니가 아니면 역시 음악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 세종

 

4. 세종의 혜안 - 우리 음악, 향약 정비

     

       "우리나라는 멀리 동쪽에 있어 음악이 중국과 같지 않다.

        제사 지낼 때 우리 음악을 쓰는 게 어떠한가?"

 

음악을 통해 이상적인 유교 국가를 건설하려는 세종과 그 뜻을 받들었던 박연.

이 두 사람의 노력으로 마침내 아악은 정비되었다.

이로써 왕실의 법도와 위엄은 선명해졌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세종 12년 9월 11일.

 

세종의 생각은 한걸음 더 나아갔다.

 

"우리나라는 멀리 동쪽에 있어 음악이 중국과 같지 않다.

 중국 사람들은 그들의 제사에 평소 듣던 아악을 쓰는 것이 당연하겠다.

 

 허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아서는 우리나라 음악을 듣다가 

 죽어서는 아악을 듣는 셈인데

 제사 지낼 때 우리 조상님들이 평소 들으시던 우리 음악을 쓰는 게 어떠한가?"

                                                                                                                - 세종

 

그러나 박연은 우리 음악을 쓰는 것을 반대했다.

"아악만 쓰고 향악은 쓰지 마시옵소서."

 

반면 맹사성은 달랐다.

"아닙니다. 성상의 하교가 옳습니다.

 어찌 향악을 모두 버릴 수 있겠습니까.

 먼저 아악을 연주하고 향악을 겸해서 쓰는 것이 옳습니다."

 

맹씨행단 (사적 제 109호 - 충남 아산시 배방면)

 

세종의 뜻을 가장 잘 헤아렸다는 명재상 맹사성.

그는 아악과 향악을 같이 쓰자는 절충론을 제시했다.

맹사성은 스스로 악기를 만들 정도로 음악의 조예가 깊었다.

그가 불었던 옥적이 지금도 전해진다.

 

"손님들이 오시면 피리소리가 나면 이 양반이 집에 있구나 하고,

 피리소리가 안나면 이 양반이 한양 가셨구나 했답니다.

 그 정도로 음악을 좋아하고 악공도 가르쳤다고 합니다."

                                                                                  - 맹건식(맹사성의 21대손)

 

맹사성은 세종때 음악 담당 기관인 관습도감의 총책임자였다.

박연은 이 기관의 실무책임자였다.

 

"아악은 박연, 향악은 맹사성과 의논하라."

 

우리 음악 향약을 쓸 것이냐, 중국 음악 아악을 쓸 것이냐 갑론을박 하는 가운데

유일한 지지자였던 맹사성은 얼마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제 우리 음악 향악의 실현 여부는 세종에게 달려 있었다.

 

"세종 생각에는 머리로써 이상적인 것과 마음에 와 닿는 소리에는 차이가 있다,

 조선인에게는 조선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조선인의 감성적인 음악성이 있는데

 그것을 놓치기에는 너무 아깝다 그렇게 혼자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 송혜진 교수(숙명여대)

 

그러나 세종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음악에 관한 한 고독한 군주였다.

 

원래 세종의 의도는 아악을 정리한 후에

우리의 음악인 향악을 세우고, 그것을 모든 음악에 기본을 삼으려 했다.

 

그런데 박연을 비롯한 대신들은

중국 음악을 함부로 버릴 수 없다고 하면서

세종의 의견을 반대한다.

이에 세종은 자신이 직접 우리 음악을 작곡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작곡가 세종의 진면목을 만나 보자.

 

아악을 정리한 이후 세종 13년 ~27년까지 우리 음악 창작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세종의 작곡 기사가 발견된다.

 

"새로운 음악은 모두 임금이 만들었는데,

 막대기로 땅을 치면서 박자를 맞추어 하루 저녁에 만들었다."

 

세종은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음악으로 담아

많은 사람과 우리 음악으로 즐기고 싶었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조선의 건국이 하늘의 뜻이며 역사의 필연이라는 것을 천명한 노래다.

 

세종은 신하들이 지어 올린 이 용비어천가 가사에 직접 가락을 붙였다.

용비어천가는 훈민정음으로 만든 최초의 작품이다.

 

새로운 우리글 훈민정음을 창제,

그리고 우리곡 작곡. 

여기에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익히고 즐기도록 하려는

세종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세종이 음악을 통해 하고 싶었던 것은

 예술적인 음악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건국의 이념, 그리고 조선의 정책 방향이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를

 노래로써 불러주고 싶었던 건데

 그런 걸 전달하는 데 아악은 맞지 않았던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있는 자기 생각을 음악으로 전달하려면

궁중음악으로써 위엄도 있어야겠지만

결국은 음악으로 소통하려면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멜로디여야 되겠다는

그런 생각을 한 거 같습니다."

                                                              - 송혜진 교수 

 

 

5. 세종의 의지 "백성들과 더불어"

                       - 정간보, 여민락, 훈민정음 창제

 

우리 음악을 보다 많은 사람과 소통하고 공유하고 싶었던 세종.

세종은 우리 가락을 제대로 담을 수 있는 악보까지 만들었다.

 

우리 음악이 중국 음악과 다르기 때문에

우리 음악이 기록하는 방법도 중국과 달라야 했다.

 

세종이 창안한 악보는 정간보(井間譜).

 

바둑판처럼 칸을 나누고 

한 칸을 한 박으로 삼아 음길이를 나타내도록 했다.

 

"한글 창제가 우리말을 정확히 적기 위해 장체한 것과 마찬가지로

 정간보는 한국 음악을 바로 정확히 적기 위해 만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인평 교수(중앙대 창작음악과)

 

용비어천가에 곡을 붙인 여민락의 악보.

 

아악은

모든 가사에 음길이가 똑같아서 음길이를 표시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향악은

가사 하나하나에 음길이가 각자 다 달라서 하나하나 다 표시해야 했다.

 

"중국의 음악은 한 박씩 규칙적으로 배분되는 것이고,

 향악은 각 가사 하나하나 마다 길이가 달라,  

 불규칙하게 어떤 음은 좀 길 수도 있고,

 또 상대적으로 짧은 음이 있을 수도 있고,

 또 짧고 긴 음이 아주 근사치지만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 있는

 불규칙적인 진행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간보를 통해 기록할려고 하는 노력은 세종의 혜안입니다."

                                                                                       - 김세종 박사 

 

세종이 남긴 여민락을 당시 그대로 복원해보기로 했다.

음의 길이까지 정확히 남아 있기 때문에 지금도 복원이 가능하다.

세종대처럼 용비어천가 한문 가사를 붙이고 악기 편성도 세종대의 것 그대로 해봤다.

 

세종이 만든 당시 여민락(與民樂)은 어떤 음악일까?

 

"근심지목(뿌리 깊은 나무는)/ 풍역불항(바람에 흔들리지 않아)/

 유작기화(꽃이 좋게 피고) / 유분기실(열매를 많이 맺나니)/"

 

여민락은 백성과 더불어 즐긴다는 뜻이다.

세종이 스스로 작곡하여 백성과 더불어 즐기겠다는 여민락.

바로 우리 음악이었다.

 

이 여민락은 주로 임금이 행차할 때 연주되었던 곡이다.

백성들과 함께 하겠다는 세종의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세종의 업적중에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바로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다.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국지어음 이호중국 여문자불상유통)

 故愚民 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 多矣 (고우민 유소욕언 이종부득신기정자다의)

 予 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여위차민연 신제이십팔자 욕사인인이습 편어일용이)  

 

"우리 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아니한다.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가엽게 생각하여 새로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쉬이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 훈민정음 머리글

 

훈민정음은 아(牙), 설(舌) 순(脣), 치(齒), 후(喉),

발성 기관을 그대로 본떠 다섯음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그만큼 세종은 소리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음악 창작까지 가능케 했던 것이다.

 

 

6. 세계속 우리 음악 - 세종, 종묘제례악 정비

   

우리의 말을 제대로 담아내기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었듯

세종은 우리 음악을 제대로 담아내기 위해 우리 음악을 만들었던 것이다.

세종의 음악은 이제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되어 있다.

 

세종이 작곡한 또 다른 음악.

 

정대업(조종의 무공을 찬양한 15곡)

보태평(조종의 문덕을 찬양한 11곡) 

 

조상의 무공과 문덕을 찬양한 모두 26곡의 방대한 곡.

 

신정(정대업의 6번째곡)

 

"적의 출현에 분노하니 병사들 맹수 같도다.

 그들의 용기 고무시키니 그 형세가 나는 듯하다.

 온 하늘을 진동케함이여.."

 

세종은 이 음악을 실제로 왕실 행사에 사용할 수 있는지 점검하고 검토했다.

비밀히 기생과 궁녀를 불러 노래에 춤을 맞춰보기도 했다.

 

"세종은 13년부터 27, 28년 사이,

 신악이 완성될 때까지 비밀히 프로젝트를 운영한 것 같습니다.

 

 간간이 보이는 기록중에 훗날 세조가 되는 이유에게 이 일을 주관하게 합니다.

 간간이 사신들을 보내어 중국에서 펼쳐지는 의례음악도 보고 오게 하고,

 그 다음에 예악을 자신의 가까이에 두고 실험해보는 등 비공개로 추진이 됩니다.

 

 어느날 갑자기 공개되었기 때문에

 사관의 입장에서는 하룻밤에 하신 일로 쓸 수 밖에 없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 송혜진 교수

 

세종은 정대업, 보태평을 만들 때

우리 음악인 향악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널리 불리던 서경별곡, 쌍화곡, 청산별곡 등의 고려속요에 바꿔붙이고

음의 길이를 조절하여 새 음악을 만들었다.

새 음악에 우리 선율을 이용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속요는 어떤 것일까?

 

청산별곡을 세종 당시의 곡으로 들어보자.

 

"살  어  리  살  어리랐   다."

 

정대업 15곡 가운데 9번째곡인 '휴명'

이 곡을 들어보면 향악 가락이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아  기  재  회  제명시   순"

 

이번에는 청산별곡휴명을 같이 들어본다.

 

"청  산  에   살  어리  랐       다 

 수        기  항      의  신    단독    운"

 

세종의 음악에 우리 가락 향약이 담겨 있음을 여실히 알 수 있다.

 

"고려 시대까지 전해오던 청산별곡, 서경별곡 같은 속요 가사에,

 당시에는 속요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에다가,

 조상을 칭송하는 정대업이나 보태평에 붙여 가사를 바꾸고

 또 음의 길이를 조정하고 새로운 음악을 만든 것입니다." 

                                                                        - 전인평 교수

 

세종 31년 12월 11일.

그러나 세종 당대에는 새 음악은 널리 사용되지 못하였다.

새 음악을 왕실의 여러 행사에 써야 되는지에 대해 논의가 분분했다.

 

"새롭게 만든 신악이 조정의 공덕을 그려내는 일을 했으니 함부로 버릴 수 없다.

 그러니 새로 만든 음악을 잘 들어보고 버릴 것과 버리지 말 것을 보고하라.

 그러면 내가 바탕히 빼고 더하겠노라."

                                                                                          - 세종 

 

세종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이때 이미 세종은 병이 깊었다.

 

세종이 작곡할 때 곁에서 도운 사람이 있다.

바로 수양대군이다.

세종의 뜻은 수양대군이 세조가 된 후에 실현된다.

 

"지금부터 정대업. 보태평 등 신악을 익히고 옛 음악은 모두 폐지하라."

                                                                           - 세조 6년

세조 6년.

세조는 모든 옛 음악을 폐지하고

오로지 아버지 세종이 작곡한 음악만을 사용할 것을 명령했다.

이로써 조상의 제사에 중국 음악이 아닌 우리 음악이 채택되었다.

 

"정대업. 보태평을 종묘제례악으로 채택"

                                                   - 세조 10년 1464년.

 

이렇게 탄생한 종묘제례악은 1995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지금까지 500년 넘게 전해져오고 있는 우리의 무형문화재 1호.

종묘제례악은 이제 우리의 소리를 담은 세계문화유산이다.

 

치세지음(治世之音).

즉, 소리가 편안하고 즐거우면 정치가 조화를 이룬다고 한다.

음악은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중요한 통치 수단으로 여겨졌다.

음악을 통해서 인간을 예의 경지까지 끌어올리는 예치(禮治)를 추구했던 것이다.

 

이에 세종은 조선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개국을 찬양하는 음악 제정에 심혈을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우리 음악을 세웠다.

 

이처럼 세종의 음악은 우리의 소리, 하늘의 소리를 담고자 했다.

이제 이것이 세계의 소리가 되었다.

 

 

- 한국사 전(傳)을 보고

    (따뜻한 겨울 보내세요!~~)

 

출처 : 금강불교
글쓴이 : 황금마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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