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는 어려서부터 인물이 천하 절색일 뿐 아니라 또한 문필에도 뛰어났다.
그녀의 나이 18세가 되자 그녀가 아리땁다는 소문이 장안에 자자하니 누구나 그녀를 한번 보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그 이웃에 사는 한 청년이 누구보다도 더욱 그녀를 연모하여 주야로 그녀를 한 번 만나 보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썼다. 그러나 그때만 하여도 내외법이 극히 엄격한 황진사집은 개성에서 원래 문벌이 당당한 명문가였기 때문에 비록 사생녀인 황진이라도 외간 남자로서는 도저히 그 문호도 엿볼 기회를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런 황진이에게 그녀를 말할 수 없이 연모하고 있는 청년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그 청년 역시 황진이를 전혀 만날 수 없었으므로 혼자서 애를 태우다 청춘에 천고 유한을 품은 채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청년의 집에서는 울며 애통을 하고 초종 범백을 치른 다음에 북망산으로 매장을 하러 가게 되었다.
상엿군들은 그의 상여를 메고 발을 맞추어
'우워남짜 우워호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우워남짜 우워호 저승길이 멀다너
우워남짜 우워호 대문 밖이 저승일세'
하고 이렇게 슬픈 섬로가를 부르며 그 청년의 집을 떠나 북망산으로 향하는데 그 상여가 마침 황진이의 집 대문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 상여꾼들의 발이 땅에 딱 붙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떼어내려고 해도 발이 꼼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여러 사람들은 대경 실색하여 이것이 대체 무슨 까닭이냐고 한참 소란을 떨며 어찌할 줄을 몰라햇다.
그러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황진이를 만나 그 청년이 죽은 사정과 또 상여꾼들의 발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는 얘기를 전하였다.
그 말을 들은 황진이는 뜻밖에도 크게 감동하여 혼자 생각하기를,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남을 살리는 좋은 일은 못할 망정 나로 인하여 남의 집 아까운 청년이 죽기 까지에 이르렀다면 그 아니 가여운 일이며 난들 어찌 죄악을 면할 수 있으랴? 이와 같을진대 이후에도 일개 나의 미색으로 하여 병들어 죽을 사람이 도 몇몇이 있을지 알 수 없으니 그까짓 구구하게 정조니 문벌이니 찾을 것 없이 차라리 아주 해방된 생활을 하여 여러 사람을 위안도 시키고 나도 이 세상에서 마음껏 놀다가 죽는 것이 좋겠다.'
황진이는 이렇게 마음 속에 다짐을 주고는 이내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에 이르렀다. 즉, 부모님께 그 사정을 얘기하고 소복을 한 뒤 집을 나와 그 청년의 시체를 끌어 안고 어루만지니 그제서야 그 상엿꾼의 발이 땅에서 떨어져 무사히 장지에 이르러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로 황진이는 부모에게 자신의 각오를 밝히고 하직한 뒤 기생이 되기에 이르렀다. 황진이는 선천적으로 비상한 천재여서 기생이 된 지 불과 며칠만에 노래와 춤이며 그외 모든 음악에 다 능통하게 되니 그녀의 소문은 일시에 천하를 풍미하게 되었다.
그 때 유수 송모는 또한 풍류 남아로 화류장의 백전 노장이었다. 유수가 황진이를 한 번 보더니 홀딱 반하여 지극히 사랑하니 그것을 본 그의 첩인 평안도 기생이 황진이의 모습을 문틈으로 보고는 몹시 놀라며 생각하기를,
'이 세상에 어찌 저러한 미인이 있으리오? 유수가 만일 저러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내 일은 다 낭패가 되리라.'
이렇게 생각하고 머리를 풀고 맨발로 뛰쳐나가 야료를 치니 유수가 놀라 일어나자 다른 좌객들도 일어나 피하여 달아났다. 그 후에 유수가 그의 환갑 잔치를 하는데 경향의 명기, 명창들이 한 곳에 다 모이고 인근의 수령 방백이 모두 참여했었다. 그래서 다른 기생들은 하나같이 가진 호사와 화장을 할대로 다하고 저마다 자기가 제일 잘난 명기 노릇을 하려고 애들을 썼으나 유독 황진이만은 단장도 호사도 안하고 수수하게 차린 의복에다 본 얼굴 그대로 참석을 하니 천연하고 그 아리따운 태도가 만좌를 감동시켜 누구나 황진이만 바라보게끔 되었다. 더우기 옥을 굴리는 듯한 그 청아한 목소리로 공중이 떠나게 노래를 부를 때에는 그야말로 요지의 왕모가 월광곡을 부르는듯 신녀인지 선녀인지 자못 정신이 황홀하여 마취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그 회석에 참가하였던 악공에 엄수라 하는 이는 70의 노령으로 가야금이 전국의 명수요, 그외 일반 음률도 모두 능통하였는데 처음으로 황진이를 보고 탄복하여 말하기를
"내가 50여 년 간을 화류장에서 놀았으나 이러한 미인은 처음 보았소. 과연 선녀요, 선녀!"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황진이의 노래를 듣고 또 놀라 일어나 말하기를
"이것은 분명히 선계의 여운이오. 인간의 속조는 아니오."
라고까지 격찬해 주었다.
이 몇 마디의 말로도 황진이의 인물됨과 노래가 어떻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황진이는 이와 같이 조선에서만 이름이 났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 까지도 소문이 높아져 당시 명나라 사신이 와서 조선의 사정을 물을 때에는 무엇보다도 황진이의 소식을 물었다 한다.
한 번은 명나라 사신이 서울에 오는 길에 개성에 잠깐 들렀는데 구경하는 남녀가 길가에 잔뜩 모여서 인산 인해를 이루었는데 황진이가 그 중에 섞여 있었다. 명나라 사신이 멀리서 바라보고 통역더러 말하되 '천하 절색은 조선에 와서 처음으로 보았다'고 하였다고 한다.
황진이는 비록 기적에 이름을 두었으나 원래 천성이 고결한 까닭에 보통의 속류 기생들과 같이 사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 하였다. 그리하여 관부 연회석 같은 데를 가도 결코 새옷으로 갈아입거나 특별한 화장을 하지 않고 자기가 평소에 입고 있던 의복 그대로 갔다. 또한 시정의 무식 천류배는 비록 천만금을 준다 해도 결코 같이 놀지를 않고 항상 명사 문객과 서로 상종하기를 좋아하며 글 읽기를 좋아하되 특히 당시를 애독했었다.
당시 개성에는 유명한 학자와 선승이 있었으니 학자는 곧 화담 서경덕 선생이요, 선승은 지족암에서 30년 동안을 면벽참선한 만석 선사였는데 만석은 자칭 도학이 화담선생이라고 하는 터였다. 황진이는 평소에 두 사람을 다 흠모하던 중 한 번은 그 인물의 어떠한 것을 시험하여 보려고 먼저 화담 선생을 찾아 가서 수학하기를 청하니 선생은 뜻밖에도 조금도 난색이 없이 승낙해 주었다.
황진이는 얼마 동안 선생에게 공부를 하러 다니다가 하루는 밤에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선생의 침실에서 같이 자며 공부하기를 청하니 선생은 스스럼없이 허락하였다. 그렇게 수 년 동안을 한 방에서 동거하는 중에 황진이는 별별 수단을 다 써서 선생을 유혹하고자 했으나 화담 선생은 목불과 같이 조금도 동요됨이 없었다.
"선생은 참으로 천하 대성인이십니다."
라고 말한 뒤 그 후로는 다시 다른 뜻을 두지 않고 더욱 선생을 경모하여 항상 말하기를
"개성에는 박연 폭포와 서경덕 선생과 나 (황진이)등의 삼절이 있다." 고 했었다.
황진이는 이와 같이 서화담을 한 번 시험하여 본 뒤에 다시 지족 선사를 시험하여 보려고 지족암을 찾아가 스스로 제자가 되어 수도하기를 청하니 지족 선사는 여자는 원래 가까이할 필요가 없다고 하며 처음부터 절대 거절을 했다.
황진이는 그 선사의 태도가 너무도 냉정하여 말도 붙이기가 어려움을 알고 혼잣말로,
"오냐, 어디 두고 보자. 진소위 새침떼기 골로 빠진다고 네가 아무리 도도한 척해도 나의 모계에 기필코 빠지고 말리라....."
하고 돌아와서 며칠 있다가 다시 소복 단장으로 청춘 과부의 복색을 하고 지족암으로 갔다.
그리고 그 선사가 있는 바로 옆방에다 침소를 정하고 자기의 죽은 남편을 위해 백 일 동안 불공을 들인다고 가칭하고 밤마다 불전에 가서 불공을 들이는데 자기의 손으로 축원문을 지어서 청아한 그 좋은 목청으로 처량하게 축원문을 읽으니 그야말로 천사의 노래와도 같고 선녀의 음률과도 같아서 아무 감각이 없는 석불 금불이라도 놀랄만한데 하물며 감수성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 누가 감히 귀를 기울이고 듣지 않을 것인가?
이와 같이 며칠 동안을 계속하여 불공 축원을 하니 노선사가 처음에는 무심하게 들었으나 하루 이틀 들을수록 자연히 마음에 갈등이 일었다. 그리하여 30년 동안이나 잔뜩 눈을 감고 옆의 사람도 잘 보지 않던 눈을 번쩍 떠서 황진이를 보니 보면 볼수록 선계의 정념이 점점 없어지고 사바의 욕화가 점점 일어나기 시작하여 불과 며칠 사이에 황진이와 서로 말을 걸게 되었다. 황진이는 예의 그 능란한 교제술과 영롱한 수완으로 그 선사를 마음대로 놀려 최후에는 그만 파계를 하게 까지 되니 세상에서 흔히 말하기를 '망석중 놀리듯 한다'는 말이라든지 '십년 공부 아미타불'이라는 말은 그 사실을 일러서 하는 말이요 속간에서 흥행하는 '망석중 놀음'이라하는 것도 또한 그 사실을 실연하는 것이었다.
황진이는 이와 같이 인물이 비범하니 만큼 다른 여자로서는 엄두에도 두지 못하는 일을 많이 하였다. 그 중에서도 큰 예는 특히 명산 대천의 유람을 말할 수 있다. 그녀는 강우너도 금강산이 천하의 제일 명산이라는 말을 듣고 한 번 유람할 생각을 가졌으나 동행할 사람이 없어서 가지 못하고 있던 중 그때 마침 서울에서 이씨란 청년이 개성으로 놀러 왔었다. 그 청년은 어떤 재상의 아들로 사람됨이 청수 호탕하고 또한 유람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황진이는 그 사람을 만난 자리에서 조용히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중국 사람들도 원생 고려국하여 일견 금강산이라 하고 누구나 금강산 구경하기를 원한다 하니 더구나 우연히 당신을 만나 뵈니 가히 동무하여 유람을 갈만합니다." 라고 말했다. 이 말에 이씨도 쾌히 승낙의 뜻으로 악수한 뒤에 날짜를 잡아 금강산 구경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이윽고 여행을 떠나기로 한날 아침이었다. 황진이는 죽장 망혜에 굵은 삼베 치마와 저고리를 걸쳐 입었고 이씨도 또한 표의 초립으로 양식을 바랑엥 짊어지고 산정수로 몇백리를 걸어서 내외 금강의 1만2천봉과 장안, 유점, 신계 등 고사 명찰을 모조리 찾아 구경하니 그 운치야 물론 범용한 사람으로선 감히 맛볼 수 없는 것이지만, 고생이 여간 아니었다. 구경을 다니다가 노자가 떨어져서 기갈이 심한 중에 노독까지 나고 보니 두사람의 초라한 몰골은 그 어디에다 비길 데가 없었다. 그런 중에 호사다마격으로 중도에서 두 사람은 서로 종적을 잃게 되었다.
그리하여 황진이는 천신 만고 끝에 이씨를 찾아 내었으나 다시 또 서로 종적이 묘연하므로 그 때 황진이는 하는 수 없이 걸식을 하여 가며 발길 닿는대로 갔다. 그리하여 경상도 태백산과 전라도 지리산까지 두루 구경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주에 이르니 그 때 마침 나주 목사가 무슨 연회를 하는데 각군의 명기, 명창들이 한 곳에 모여 질탕하게 놀고 있는 것이었다. 황진이는 그 말을 듣고 폐의 파상, 초라한 차림으로 연회석에 끼어드니 만좌가 모두 황진이를 미친 여자이거나 걸인 여자로 알고 놀라거나 낯을 지푸렸다.
그러나 보옥은 제아무리 진흙속에 묻혀 있어도 광채가 나기 마련이었다. 황진이는 비록 차림새는 삼베 바지 저고리 차림이었지만 워낙 인물이 뛰어나게 아름다웠고 거기에다 지성을 갖추었으니 알아보는 사람은 알아보게 마련이었다. 요컨대 목사가 황진이를 보니 미친 여자거나 걸인 여자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좌석을 허락했다.
이윽고 황진이는 연회석에서 노래 좀 불러달라고 하자 서슴없이 그에 응했다. 목청을 한껏 높여 노래를 부르니 그 노래 소리가 멀리 공중을 통하고 고저 장단이 모두 절조에 부합하여 그 좌석에 있는 소위 명기, 명창이라도 감히 따르지 못할 만하게 하니 만좌가 모두 경탄해 하며 특히 우대했다.
그 당시 선전관 이사종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풍류호객으로 노래가 천하 절창이었다. 평소에 황진이의 염명을 익히 듣고 한번 같이 놀아보려고 일부러 개성까지 왔었는데 황진이의 집에는 직접 들르지 않고 그녀의 집 근처 천수원 천변가에 말을 매고 백사장에 드러누워 두어 곡조의 노래를 부르니 황진이가 바람결에 듣고 놀라며 말하기를 "이 노래의 곡조는 심상한 시골 촌부가 부르는 노래가 아니다. 필경 어떤 명창의 노래인데 내가 듣건대 서울의 풍류 남아 이사종이 당대 절창이라 하더니 아마 그 사람이 이 곳에 놀러 왔나 보구나." 하고는 사람을 보내어 탐문하니 그는 과연 이사종이었다.
황진이는 즉시 이씨를 맞아들여 수일을 같이 노는데 자연히 지기가 서로 합하니 피차에 6년간을 같이 살기로 약속하되 먼저 3년 간은 자기가 일체의 생활비를 담당하여 살고 뒤의 3년 간은 이씨가 일체의 생활비를 담당하여 살기로 하고 황진이가 먼저 자기 집의 집기 등을 전부 팔아 가지고 이씨집에 가서 3년 동안 이씨의 돈은 한 푼도 쓰지 않고 자력으로 이씨까지 먹여 살리었다.
그리고 3년 후에는 이씨가 또한 살림을 하게 되어 먼젓날에 황진이가 자기에게 하던 것과 똑같이 하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들의 재미스러운 행복한 생활을 부러워하였다. 이와 같이 3년을 또 살다가 약속한 6년의 만기가 되자 황진이는 그 약속대로 섭섭하기 짝이 없으나 또한 어쩌지 못하고 그냥 헤어졌다.
이런 일은 황진이와 같은 여류 기인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못할 일이었다.
청산리 벽계수야 쉬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 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이 시조는 황진이가 지은 시조로서 몇백 년이 된 지금까지도 세상에서 흔히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 노래를 지은 출처에 있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숨어 있으니 그 때에 왕족 중에는 벽게수 이모가 있었다. 그는 워낙이 자로 잰 듯이 살아가는 타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므로 평생에 기생과의 오입이라고는 한 번도 해본 일이 없었다.
평소에 그는 자기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누구든 황진이를 한 번 보았다 하면 그 빼어난 미모에 넋을 잃고 만다지만 그것은 모두가 그들의 의지가 박약한 까닭이다. 만일에 내가 그 계집을 보게 된다면 넋을 잃기는 커녕 천하에 요망스러운 년이라고 당장에 호령을 하여 축출하겠다."
고 장담을 했었다.
황진이는 그 소문을 듣고 혼자 웃으며 어디 그가 얼마나 고결한가 한 번 시험하여 보리라 하고 중간에 사람을 놓아 벽계수를 유인하여 만월대 구경을 오게 하였는데 때는 마침 늦가을이었는지라 중천에 월색이 교교하고 만산에 낙엽이 져 수북히 쌓여 있어 누구나 감상에 젖기 쉬울때였다. 황진이는 단장 소복을 한 채 숲 속에 숨어 있다가 연연이 나와서 이씨의 말고삐를 휘어잡고 앞에 밝힌 노래를 한 곡조 불렀다. 그러자 이씨는 달빛 아래에서 그 어여쁜 자태를 보고 또 청아한 노래를 들으니 자기도 모르게 스르르 심신이 봄눈 녹듯이 녹으며 황홀경에 빠 부지중에 말에서 떨어졌다.
그걸 황진이가 지켜보고 있다가 웃으며 말하기를 "당신이 어찌하여 저를 축출하지 못하고 말에서 떨어지시나요?" 하고 조롱하니 이씨가 부끄러워 아무말도 못했다. 그러니까 원래 노래 속에 벽계수란 말은 이모를 대용함이요 명월은 황진이의 자인 까닭에 황진이는 그때의 상황을 취하여 지은 것이었다.
황진이는 비록 화류장에 몸을 던졌으나 항상 척당 불기한 기개와 비분 강개의 뜻이 있어 달 밝고 고요한 밤이면 선죽교나 만월대에 올라 통곡도 하고 노래도 불러 고려의 옛일을 조상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한 번은 꿈에 어떤 백마를 탄 장수가 예전 고려 때의 활 쏘던 사장에 와서 말을 멈추고 머뭇거리고 있는 것을 보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꿈에서 깨어나 생각하니 그 장수는 필경 옛날 고려 시대의 어느 장수로 죽은 고혼이라도 차마 고국을 잊지 못하여 꿈에라도 나타났는가 싶어 마음이 그렇게 아플 수 없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노래를 한 편 지었으니 이것도 세상에 많이 유전하는 것으로 소위 송도 회고지가라는 시가 바로 그것이다.
5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네
두어라 고국 흥망을 물어 무삼하리오.
황진이는 이렇게 일생을 보내다가 40내외에 불행히도 병에 걸려 죽었다. 그녀는 죽을 때 집안 사람들에게 유언하기를 "나는 평생에 여러 사람들과 같이 놀기를 좋아하였은 즉 고적한 산중에다 묻어 주지 말고 내인 거객이 많이 다니는 대로변에다 묻어 주며, 또 평생에 음률을 좋아하였은즉 장사 지낼 때에도 곡을 하지 말고 풍악을 잡혀서 장례를 지내 달라." 하였더니 집안 사람들이 그의 유언대로 풍악을 잡혀서 큰 길가에다 장례를 지냈다고 한다.
그녀의 무덤은 몇백 년 전까지도 송도 대로변에 있어 천하 호협시인 임백호 같은 이는 평안도사로 부임하던 길에 일부러 제문을 지어 가지고 그녀의 무덤까지 가서 제를 지내주었다가 그것이 언관에게 말썽거리가 되어 좌천까지 당한 일이 있었다.
꽃이 지고 물이 흘러 3백여 년을 지난 오늘에는 절대 명기인 그녀의 무덤조차 찾아볼 길이 없고 다만 그녀의 시 몇 편과 노래 몇 종잉 남아 있어서 시인 가객들의 입에서 향그럽게 회자될 뿐이다. 끝으로 그녀의 시조 몇 편을 소개하기로 한다.
시조 3수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임의 정이라
녹수 흘러 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어 예어 가는구나
산은 옛산이로되 물은 옛물이 아니로다
주야에 흐르니 옛물이 있을소냐
인걸도 물과 같아야 가고 아니 오도다
동지달 기나긴 밤 한허리를 둘러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고운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