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망의 칼이었다.
무신(武臣)이었음에도 웬만한 문신 이상의 문기(文氣)와 참 선비적 도량이 아우른 그였다. 아들 면이 왜놈들의 칼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순신은 말없이 소금 창고에 들어가 소금 더미에 엎어져 우는 장면이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 한 대목으로 나온다. 적군의 칼은 이렇듯 아군의 심정과는 결코 연대할 수가 없다. 적군이 칼로 이룬 것도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리라.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거나 배려하는 수단이 아님을 보여준다. 왜놈의 손에 자식이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소식을 들은 부모라면 누가 통곡하지 않을 수 있을까. 통곡하기 전에 정신을 놓고 쓰려지기도 했을 것이다. 그럴 때는 세상의 모든 적의를 가진 칼들은 겨우내 무뎌지다 못해 두툼한 녹이 슬어야 마땅하다. 겨우 과도(果刀)에 손이 베여 피를 보고 있는데, 창밖은 화창한 봄날이었다. 윤기 나는 검은 머릿결을 가진 젊은 처자에서부터 백발의 허리가 굽은 할머니까지 작은 바구니를 끼고 공터나 들녘으로 나가는 것이 보인다. 한 손엔 작은 칼들을 하나씩 들었다. 봄나물을 캐기 위해서다. 삼삼오오 모여서 혹은 하나 둘 떨어져서 공터나 버려진 묵정밭으로 손칼이나 주머니칼을 들고 나가는 여인네들의 모습은 한편으로 정겹고 한편으론 기이해 보이기까지 한다.
봄날은 젊거나 늙은 여인네들이 아지랑이의 호위를 받으며 들녘으로 출정(出征)하는 날인가 보다. 칼은 크지 않고 옷소매 안에 능히 감춰지는 크기다. 그 칼은 피를 보지 않고 흙만을 묻힌다. 거기엔 난세(亂世)의 피가 아니라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에 점점 가려져 가는 흙을 묻히는 칼이다. 저들의 칼에 캐어진 봄나물인 냉이며 쑥 등속은 이내 저녁 식탁에 올라온다. 길었던 지난 겨울의 피로를 몰아내고 새로운 활기를 넣어준다. 냉이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는 뚝배기에 둘러앉아 숟가락질을 하는 소리가 유난히 귀에 잘 남는다.
이때 칼은 훼손의 칼이 아니라 보존의 칼이다. 또한 죽이는 칼이 아니라 살리는 칼이 된다. 윤회론자는 아니지만 푸줏간의 고기를 써는 사람의 칼은 결코 야만적이지 않다. 그 칼에 도륙이 난 소나 돼지조차 먼 훗날 다른 몸으로 태어날 것을 약속하는 헌식(獻食)의 대상이 됐는지도 모른다. 먹이사슬의 관계 속에서 많고 적음은 하나의 관용이다. 이상한 말 같지만 적당히 죽이는 것은 올바르게 살고 살리는 이치에 닿아 있지 않나 싶다.
연명(延命)의 칼을 굳이 버려라 하지 말라. 그렇다고 마음의 못된 칼이 녹슬게 그냥 놔두라는 것은 아니다. 세 치 혀가 가지는 무서운 적의와 변혁의 그늘이다. 때로 침묵이 얼마나 큰 보검이고 은혜인지, 저 숲에 서 있는 아직 베어지지 않은 나무들을 통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칼 스스로를 베어야 할 때가 되었다. 야만은 옛날이 아니라 작금의 석유전쟁, 미국의 경찰 국가적 제국의 논리, 그 무자비한 야만에 들어 있다. 변형된 칼의 적의를 누그러뜨리지 않는 한 미국은 힘의 우위 외에는 아무것도 확인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에 무슨 대단한 이유와 혐의가 있을까. 사람은 적당히 죽여야 하는 대상이 아니니 하는 말이다. 칼에서는 결코 꽃이 피지 않는다.
○ 글 : 유종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