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문학 강의실 '징'

[스크랩] "징" 창작교실 유종인 지도교수님 세계 . . .

맑은물56 2009. 5. 18. 11:55

      유하백마도(柳下白馬圖)*를 보다 / 유종인




        버드나무는 우듬지가 보이지 않는다.
        치렁치렁한 줄기 가지로 옅은 바람을 탄다
        흰 말이 곁에 있었지만
        수양인지 능수인지 모를 버들은 말을 건드리지 않는다

        말은 예민한 짐승, 잘못 건드리면
        주인도 태우지 않고 먼 들판으로 달아난다
        거기서 말의 고삐와 안장은
        들꽃들의 우스갯거리에 불과하다
        이 흰말에 죽은 말벗을 태우려 했나니 이 흰
        말의 잔등에 앉아 영원을 달리려 했더니

        버드나무는 고삐도 없이 수백 년 한자리에 묶이고
        잠시 매인 흰 말은 무료한 투레질로
        오월 허공에 뜬 버들잎에 허연 침버캐를 묻힌다
        가만히 버들가지가 말의 허리를 쓸어준다
        흰 말은 치뜬 눈동자가 고요해지며 제 눈의 호수에
        버들잎 몇 개를 띄어준다 눈이 없는
        버드나무는 말의 항문을 잎 끝으로 간질이자, 말은
        색(色)이 안 든 허공에 뒷발질을 먹인다 허공은 죄가 없으므로
        멍이 들지 않는다 뼈가 부러지지도 않는다

        주인이 오지 않는 흰 말과 버드나무
        사이에 능수(能手)와 능란(能爛)의 연리지(連理枝) 고삐 끈이 늘어진다
        버드나무는 오히려 짐승처럼 징그럽고
        흰 말은 꽃 핀 오두막처럼 고요하다
        친연(親緣)의 한나절이 주인을 빼먹은 일로 갸륵하다



                          2007년 ‘유하백마도'를 보다’ 로 '제2회 지리산문학상' 수상 .




                          *유하백마도(柳下白馬圖):공재 윤두서의 그림.보물.


                          [2009.5. 17(일) 현실참여 문인 . 시민연대 운영위원 일동]

                             

                             

                             

                             

                             

                            칼에서는 결코 꽃이 피지 않는다

                            연명(延命)의 칼을 굳이 버려라 하지 말라. 그렇다고...

                            까마득한 옛날이었다. 때는 기원전으로 춘추전국시대의 오(吳)나라에 구천이라는 사람이 월나라를 패퇴시켰다.

                            그는 이 공을 인정받아 임금은 여섯 자루의 보검(寶劍) 중 하나인 거궐을 하사했다. 그 칼에 붙여진 이름의 뜻을 살펴보니 ‘큰 대궐'이었다. 짐작컨대, 한 나라가 칼로 일어서고 칼로 무너지던 시대의 칼은 야만(野蠻)이 아닌 명분적 수단이었다. 큰 칼을 옆에 차고 수루(守樓)에 홀로 앉아 시름에 잠기던 충무공 이순신의 칼은 비애와

                             
                            존망의 칼이었다.

                            무신(武臣)이었음에도 웬만한 문신 이상의 문기(文氣)와 참 선비적 도량이 아우른 그였다. 아들 면이 왜놈들의 칼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순신은 말없이 소금 창고에 들어가 소금 더미에 엎어져 우는 장면이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 한 대목으로 나온다. 적군의 칼은 이렇듯 아군의 심정과는 결코 연대할 수가 없다. 적군이 칼로 이룬 것도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리라.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거나 배려하는 수단이 아님을 보여준다. 왜놈의 손에 자식이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소식을 들은 부모라면 누가 통곡하지 않을 수 있을까. 통곡하기 전에 정신을 놓고 쓰려지기도 했을 것이다. 그럴 때는 세상의 모든 적의를 가진 칼들은 겨우내 무뎌지다 못해 두툼한 녹이 슬어야 마땅하다. 겨우 과도(果刀)에 손이 베여 피를 보고 있는데, 창밖은 화창한 봄날이었다. 윤기 나는 검은 머릿결을 가진 젊은 처자에서부터 백발의 허리가 굽은 할머니까지 작은 바구니를 끼고 공터나 들녘으로 나가는 것이 보인다. 한 손엔 작은 칼들을 하나씩 들었다. 봄나물을 캐기 위해서다. 삼삼오오 모여서 혹은 하나 둘 떨어져서 공터나 버려진 묵정밭으로 손칼이나 주머니칼을 들고 나가는 여인네들의 모습은 한편으로 정겹고 한편으론 기이해 보이기까지 한다.

                            봄날은 젊거나 늙은 여인네들이 아지랑이의 호위를 받으며 들녘으로 출정(出征)하는 날인가 보다. 칼은 크지 않고 옷소매 안에 능히 감춰지는 크기다. 그 칼은 피를 보지 않고 흙만을 묻힌다. 거기엔 난세(亂世)의 피가 아니라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에 점점 가려져 가는 흙을 묻히는 칼이다. 저들의 칼에 캐어진 봄나물인 냉이며 쑥 등속은 이내 저녁 식탁에 올라온다. 길었던 지난 겨울의 피로를 몰아내고 새로운 활기를 넣어준다. 냉이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는 뚝배기에 둘러앉아 숟가락질을 하는 소리가 유난히 귀에 잘 남는다.

                            이때 칼은 훼손의 칼이 아니라 보존의 칼이다. 또한 죽이는 칼이 아니라 살리는 칼이 된다. 윤회론자는 아니지만 푸줏간의 고기를 써는 사람의 칼은 결코 야만적이지 않다. 그 칼에 도륙이 난 소나 돼지조차 먼 훗날 다른 몸으로 태어날 것을 약속하는 헌식(獻食)의 대상이 됐는지도 모른다.  먹이사슬의 관계 속에서 많고 적음은 하나의 관용이다. 이상한 말 같지만 적당히 죽이는 것은 올바르게 살고 살리는 이치에 닿아 있지 않나 싶다.

                            연명(延命)의 칼을 굳이 버려라 하지 말라. 그렇다고 마음의 못된 칼이 녹슬게 그냥 놔두라는 것은 아니다. 세 치 혀가 가지는 무서운 적의와 변혁의 그늘이다. 때로 침묵이 얼마나 큰 보검이고 은혜인지, 저 숲에 서 있는 아직 베어지지 않은 나무들을 통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칼 스스로를 베어야 할 때가 되었다. 야만은 옛날이 아니라 작금의 석유전쟁, 미국의 경찰 국가적 제국의 논리, 그 무자비한 야만에 들어 있다. 변형된 칼의 적의를 누그러뜨리지 않는 한 미국은 힘의 우위 외에는 아무것도 확인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에 무슨 대단한 이유와 혐의가 있을까. 사람은 적당히 죽여야 하는 대상이 아니니 하는 말이다. 칼에서는 결코 꽃이 피지 않는다.

                             

                            ○ 글 : 유종인

                            출처 : 현실참여 문인ㆍ시민 연대
                            글쓴이 : 허브와풍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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