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양은 예수가 죽나 보자고 유다가 고발했고, 죽을 때 로마군이 속옷도 다 벗겼고, 남자 제자들은 다 도망갔으며, 베드로는 그를 모른다고까지 했으나,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만 도망치지 않았다고 했다. 여자들이 더 진실했으며 용기 있고 의리 있었던 것이다.
* 그러나 당시 기독교는 여러 파가 있었다. 그 중 그노시스파는 육체가 영혼을 가둔다고 생각했다. 예수는 죽기 일주일 전 유다와 밀담을 나눴다. 제자들과 최후의 모임에서 예수가 유다에게 “네가 그 일을 하라”한 것은 로마군에게 유다로 하여금 자신을 고발케 하여 죽임을 당함으로써 순교로 비쳐져 기독교가 번성하길 바랬고, 죽음으로써 자신의 영혼이 해방되기를 원해 유다로 하여금 자신의 소원을 들어 주도록 부탁한 것이다. 그러므로 유다가 예수의 소원을 들어준 것이지 예수를 배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유다 복음서도 있었으나 한 신부가 없애 버렸다. 그리하여 그 신부의 입맛에 맞는 복음서와 경전만 전하고 있다. 역사란 누군가에 의해 말살되기도 하고 조작하기도 해왔다.
기원 후30년 경 유월절 사흘 전 일주일 동안 유다와 예수가 나눈 밀담을 콥트어로 쓴 필사본이 2001년 뉴욕 외곽 롱아일랜드 학스빌 어느 은행 비밀금고에 보관 되어 있다. 그 내용은 대화 속에 숨겨진 예수의 계시가 밝혀져 있다. 이 유다복음은 1978년 중반 이집트의 나일강 부근 사막 동굴에서 발견됐다(미국 내셔널 그래피지 2006년 간행본. 한국 시사영어사 2006년12월호 참조)
최근에 방영된 디스커버리 채널에 의하면 유다경전이 사막 동굴에서 어느 양치기에 의해 발견됐으나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두 명의 학자가 사려했을 땐 소유자가 너무 비싸게 불러 못 샀고, 그 뒤 은행 금고에 보관했으나, 파피루스에 쓰여졌으므로 지금은 심하게 건조되고 삭아서 그 내용을 알 수조차 없다. 이 유다복음서 얘기는 위에 쓴 복음서 얘기와 같아 보인다.
* 2007년 11월 10일 엠파스에 다음과같은 글이 있다.
“유다, 예수요구로 배반”......유다복음 일부 공개
예수와 12명의 제자 가운데 예수를 배반한 제자 가롯 유다와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해 볼 수 있는 고문서 `유다복음(The Gospelof Judas)‘의 내용 중 일부가 6일 처음으로 공개됐다.
미국 내셔널 지오그래픽지(誌)가 오는 9일 전면 공개할 예정인 유다복음은 1천700여년 전인 서기300년께 이집트의 콥트어로 파피루스에 쓰인 것으로 지난 1970년대 이집트 사막에서 발견돼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법으로 진본임이 확인된 것.일부 공개된 내용에 따르면 유다복음은 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 등 신약성경의 기존 4대 복음과 달리 예수의 요구에 의해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것으로 기술돼 있어 많은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AP통신에 따르면 유다복음은 ”예수가 유다와 나눈 계시에 대한 비밀스런 이야기“라는 말로 시작된다. 또 예수가 유다에게 ”너는 그들 모두를 능가할 것이다. 너는 인간의 형상을 빌려 이 땅에 온 나를 희생시킬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일부 성경학자들은 유다가 예수로 하여금 육신의 짐을 벗어던질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영적인 존재로 해방되도록 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이집트 카이로에서 발행되는 `와타니’ 편집자인 유세프 시드홈은 “이 문서가 유다를 배반자로 간주하는 기독교의 중심생각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옛날부터 유다의 역할이 예언을 완성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유다를 박해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학파가 있었으며 새 문서가 `예언의 완성에 있어 유다의 역할이 핵심적이었다’는 이런 관점을 뒷받침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유다복음은 서기 180년께 프랑스 리옹에 있는 이레나에우스 주교에 의해 처음 언급됐으나 당시 그 주교는 주류 기독교 내용과 다르다며 꾸며진 얘기로 비판했었다고 AP통신은 밝혔다.
2006-04-07 오전 6:29:57 (워싱턴=연합뉴스)bingsoo#yna.co.k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을 하였다는 사실이 영국의 BBC방송국 기자들에 의해 밝혀지고 영국 법정에서 재판을 통해서 확인되었다. 영국 BBC 방송국의 기자 세 사람은 10여 년간의 조사 끝에 1982년「성혈과 성배」(TheHoly Blood And The Holy Grail/ 미카엘 베이전트, 리처드 레이, 헨리 링컨 공저)라는 책을 통하여 위와 같은 놀라운 내용을 밝힌 바 있는데 책의 주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을 하여 자녀까지 두었으며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구세주 행세를 하며 다윗 왕을 계승하여 유대의 왕이 되려다가 유대인의 반발로 인해 처형될 처지에 놓이게 되자 예수의 처남 아리마대의 요셉을 통하여 많은 뇌물을 받은 바 로마의 유대 총독 빌라도와 짜고 십자가에서 죽는 것 같이 연극을 하고는 그 뒤 부활의 연극을 한 다음 로마병사들의 호위 속에 프랑스로 망명을 해, 아내 막달라 마리아와 자녀들과 프랑스 골(gaul) 지방에 정착하여 은둔하며 80세를 넘게 살았다.
프랑스 남부의 마을 렌느 르 샤토에서 수 킬로 떨어진 야산 몽 카르두에 예수의 무덤이 있으며 막달라 마리아는 렌느 르 샤토에서 교회를 세워 교구장으로 지내다가 프랑스의 액생 프로방스 생봄에서 죽었으며 예수의 제자 나사로는 마르세이유에 주교관구 겔트교회를 세워 주교로 지내다 죽었다.
예수의 후손들은 4세기 후에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 왕조에 동화되었으며 카롤링거 왕조의 비지코트가 등 8개의 가문을 이루었으나 이후 기독교가 번성함에 따라 예수의 혈족은 예수의 혈통임을 숨긴 채 살아왔다. 1099년에는 예수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고드프로아 드 부 이용이 십자군 전쟁 때 예루살렘에서 십자군이 세운 예루살렘왕국에서 잠시 다윗 왕을 계승하기도 하였다.
예수의 친척 징표를 가진 귀족을 포함 많은 예수의 후손들이 현재에도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 살고 있다. 이러한 예수가의 비밀에 대해 성당 기사단(聖堂騎士團, 1118년 예루살렘 순례자 보호를 위해 조직된 교회 군대)과 시온의 소수도원이라는 유명한 비밀조직은 깊이 믿고 신뢰하여 그 비밀에 대해 자세한 기록들을 간직하여 남겨 놓았다. 그것이 중세 성당기사단의 지방지부의 성터가 남아있는 프랑스 남부 마을 렌느 르 사토에서 1891년 폐허가 된 이 성채의 성당을 복원하던 교구 신부 베랑제르 소니에르에 의해 양피지 문서와 보물이 발견되어, 보물과 고문서를 팔아 막대한 부를 누린 신부에 관한 이야기를 조사하던 기자들에 의해 모든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BBC 방송에서 부분적으로 3차례에 걸쳐 방송까지 된 바 있는 이러한 내용의 책 성혈과 성배가 출판이 되어 세계를 경악케 하자 이에 놀란 영국의 기독교와 천주교인의 사실 확인 소송이 영국 법정에 제소되어 재판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대로 예수를 믿어온 가문의 기독교인이 주심판사를 맡아 3년간에 걸쳐 심리를 하였으나 프랑스에 사는 예수의 27대 후손 피에르 프랑타르씨 등 많은 증인과 증거들을 비롯해 조상이 예수로 되어 있는 족보 책과 프랑스의 렌느 르 사토에 예수의 묘비명이 있는 예수의 무덤까지 현지 답사하여 확인하고는 무덤의 사진까지 보여주며 책의 내용을 모두 인정하는 판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심판사는 판결을 미뤄오다 빨리 판결하라는 법원의 독촉을 받고 판결하기를 “나도 3대째 예수를 믿어온 집안의 자손으로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정하려고 무던히 노력하였습니다만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하여 84세까지 살다 죽었습니다. 예수는 로마 병사 판델라의 아들이었습니다. 책의 내용은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라고 판결을 하였다.
예수의 27대 후손인 피에르 플랭타르씨와 그의 아들- 이러한 판결을 지켜보던 신부, 수녀, 목사들은 법정 방청석에서 옷을 찢고 통곡을 하였으며 기독교인이 목을 매 자살하고, 교회가 문을 닫는 등의 소란이 영국 전역에서 확대되어 영국정부에서는 이러한 혼란이 지속되고 전 세계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판결문의 공개 및 해외 유출을 금지시키고 언론에 보도를 통제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미 재판과정을 지켜본 영국의 기독교인들은 약 80%가 회교 등 타종교로 개종을 하였으며 유럽과 미국 등에서도 수많은 교회가 문을 닫는 등의 소동이 이어졌다. 1982년 처음 책이 나와 세계적인 화제가 되자 대한민국에서는 전 언론(동아, 조선,중앙, 부산일보등)에서 엉터리 사건인 양 짧게 보도(사진3 :1982.2.20자 동아일보)를 하였으나 재판과 판결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보도가 없다. 그래서인지 기독교가 급격히 쇠락하던 그 당시의 세계적 추세와는 달리 한국의 기독교는 경제 성장에 편승하여 계속해서 급성장하는 이변을 낳았다.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이 죽지 않았다는 증거로서 예수의 시신을 쌌던 성의(聖衣)라고 하여 기독교와 로마 교황청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증거로 삼던 세마포(토리노 성의로 불려왔음)가죽은 사람이 아닌 산 사람을 감쌌던 것이라는 것이 과학적 분석과 여러 가지 문헌의 고증에 의해 밝혀진 바 국내에도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 」(앨마 그루버, 홀거 케르스텐 지음, 홍은진 번역, 아침이슬 간행)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음을 더욱 분명히 밝혀 주고 있다. 토리노 성의는 1세기 때 부터 유대와 유럽의 교회와 왕가에 때로는 공개 전시 되며 보관 되어오다 1460년에서 1983년까지 성의를 보관해 오던 사보이 왕가에서 교황청에 기증을 하게 되어 현재 로마 토리노의 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죽은 시체에는 필요가 없는 100근(40kg)이나 준비 된 상처 치료제 몰약과 침향(요한복음19:40)과 피, 땀 등에 의해 얼굴과 전신이 그대로 새겨져 있는 토리노 성의는 과학자들의 분석에 의해 상처 입은 산사람을 싼 세마포라는 것이 밝혀져 오히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유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1988년 10월 13일 토리노의 대주교 발레스트레오 추기경은 토리노 성의가 13∼14세기에 만들어 진 모조품이라고 발표를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아는 과학자들이 공개적인 검증을 계속 요구하자 1997년 9월5일에는 토리노의 성의가 예수의 시신을 쌓던 진품이라고 번복 발표를 하고는 감정 요구에는 일체 응하지 않고 있다. 토리노의 성의는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진 사람의 몸을 감쌓던 것이지만 그 마저도 죽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증거물이 되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음을 더욱 분명히 증명 하고 있다.
유다 복음서를 포함한 고문서는 발견된 이후 몇번의 손을 거쳤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은 스위스의 메세나 재단이 고문서의 진품 입증과 보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해달라고 제안을 해와 고대 문화 연구와 역사적 지식의 발전이 유물 발견과 보존에 의해 지원된다는 신념으로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한편 내셔널지오그래픽은 유다 복음서 공식 웹사이트(www.nationalgeographic.com/lostgospel)를 개설했다.
배신자 유다 “예수 뜻이었다” 당당한 변명 1700년 전 ‘잃어버린 복음서’ 세계 이목 집중. 부활 등 언급 없고 정통 성서에 반해 ‘파문예고’
어떻게 유다 복음서가 수세기를 견뎌냈을까? 전문가들은 유다 복음서가 이집트의 사막에 1600년 넘는 기간 동안 숨겨져 있었기에 파피루스가 손상되지 않은 채 보존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뉴욕 롱 아일랜드 은행금고에 16년 동안 보관되어 있는 동안 고문서가 심하게 훼손되어 이를 복원하는 데만도 5년이 넘게 걸렸다고 한다. 참고가 되셨다면 저의 홈 http://www.tenrio.com 에 함 들어가 보세요.
나도 위의 사실에 대한 국내 언론의 “한바탕의 거짓 소동인 양 짤막하게 쓴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증거물에 대한 과학적 증명이나, 재판 결과 등 그 후문에 대해선 일체 사실 보도가 없어 오히려 사실을 왜곡시킨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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