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 Johan Sebastian (1685.3.21-1750.7.28)
Schafe können sicher weiden,
Wo ein guter Hirte wacht.
Wo Regenten wohl regieren,
Kann man Ruh und Friede spüren
Und was Länder glücklich macht.
Sheep may ever graze securely
Where a worthy shepherd wakes.
Where the rulers well are ruling,
May one rest and peace discover
And what nations blissful makes.
양들은 평온히 풀을 뜯으리
선한 목자가 지키는 곳에서
통치자가 잘 다스리는 그곳에서
백성들은 안정과 평화 느끼리
온 세상을 행복하게 하는 안정과 평화를
바흐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세속칸타타 BWV.208
"나의 즐거움은 오직 사냥뿐" 일명 사냥 칸타타는
작센공 크리스티안의 생일을 축하해 만들어진 곡이다.
바흐의 현존하는 세속 칸타타는 약 20여곡이며 대부분은
라이프치히 시대에 콜레기움 무지쿰의 연주회를 위해 작곡되었으며
세속 칸타타는
종교 칸타타와는 달리 결혼축하, 취임축하, 생일축하 등을 목적으로 하고 있어서
그 내용이 종교 칸타타에 비해 쉽고 또한 떠들썩한 곡이 많지만
음악적으로는
대단히 우수하며 또한 바흐의 세속 음악 작곡가로서의 다른 일면을 관찰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소년시절
아이제나흐 궁정과 지방 의회에 고용된
현악기 연주자 요한 암브로지우스 바흐와
엘리자베트 래머히르트 사이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1692(또는 1693)년부터 학교 공부를 시작했고
잦은 결석에도 불구하고 학교 성적은 좋았다.
그가 당시 받은 음악교육에 관해서는 확실하게 알려진 것이 없으나
아버지에게 현악기 연주의 기초를 배우고 게오르크 교회에 다닌 것으로 여겨지는데
1703년까지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가 오르간 연주자로 있었다.
1695년경 양친이 모두 죽자 오르드루프의 오르간 연주자였던
맏형 요한 크리스토프(1671~1721) 밑에서 자랐다.
크리스토프는 한때 영향력있는 건반음악 작곡가인 요한 파헬벨의 제자였으며,
동생 제바스티안에게 건반악기를 가르쳤다.
어린 바흐는 다시 뤼네부르크의 미하일 교회 부속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했으며,
목소리가 좋아 1700년까지 가난한 소년들로 구성된 성가대의 일원이 었다.
그 후 목소리에 이상이 생겨 학교를 떠났으나 한동안 뤼네브르크에 머물면서
방대한 최신 교회음악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던 그곳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했다.
이때 요하네스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인 게오르크뵘의 연주를 들었던 것 같으며,
유명한 오르간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요한 아담 라인켄의 연주를 듣기 위해
함부르크를 방문했고
아울러 셀 공작의 프랑스 오캐스트라의 연주도 들었다.
1702년 늦은 여름, 바흐는 이미 능숙한 오르간 연주자가 되어 다시 튀링겐으로 돌아왔다.
1703년 3월 4일경 그는 바이마르의 요한 에른스트 공작 오케스트라의 일원이 되었다.
이 자리는 단지 임시 방편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미 그의 마음은 당시 아른슈타트의 노이 교회에서 제작중이었던 오르간에 가 있었다.
오르간이 완성되자 바흐는 그 악기를 시험해 보았고,
1703년 8월, 18세의 나이로 오르간 연주자에 임명되었다.
아른슈타트시대
튀링겐 삼림지대의 북쪽에 위치한 아른슈타트에서 바흐는 특히 오르간 음악에 몰두했다.
뤼네부르크에 있는 동안 그는 북독일 오르간 악파의 가장 중요한 오르간 연주자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의 연주와
작품을 직접 접할 기회가 없었지만 1705년 10월 한 달 동안의 휴가를 얻어
뤼베크까지 300km나 되는 거리를 걸어가 마침내 그의 연주와 음악을 듣게 되었다.
1706년 1월 중순이 되어서야 돌아온 것으로 보아
그곳에서 체재가 그에게 유익했던 듯하나
그는 그동안의 부재와 그밖의 일들로 문책을 받았다.
찬송가의 선율에 마음대로 화성을 붙여 회중이 따라 부르기 어렵게 만든다는 것과
무엇보다도 칸타타를 한 곡도 작곡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진정한 이유는 그가 오르간에 집착한다는 것과
자신이 요구하는 음악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그 지역 가수·연주자들과의 불편한 관계 때문이었던 것 같다.
1705년 여름에는 한 바순 연주자에게 공격적인 언사를 한 것이
거리의 난투극으로까지 발전한 일도 있었다.
이런 일들로 인한 문책에 대해 그의 답변은 만족스럽지도 못하고 성의도 없었지만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음악가를 잃고 싶지 않았던 고용주측은 그를 해고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바흐는 튀링겐 지역의 음악문화를 흡수하는 한편
북스테후데로부터도 많은 것을 얻었다.
1708년경에는 독일 선배 작곡가들에게 배울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얻었으며,
최초로 독일의 북부와 남부 양식을 통합했다.
아울러 프랑스의 오르간 음악과 기악음악을 공부하기도 했다.
뮐하우젠시대
1707년 6월 튀링겐의 뮐하우젠에 있는 블라지우스 교회에 일자리를 얻었으며
그해 10월 17일 도른하임에서 사촌인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와 결혼했다.
뮐하우젠에서는 한동안 모든 일이 순로로운 듯했다.
이때 작곡한 칸타타들은 성서 혹은 코랄 가사를 기초로 한 보수적인 틀을 고수하고 있으며,
훗날 그의 칸타타에 나타나는 '근대' 이탈리아 오페라 형식의 영향은 보이지 않는다.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바흐는 블라지우스 교회를 사임하고 곧바로 바이마르로 갔다.
바이마르시대
바이마르에서는 당초부터 궁정 오르간 연주자 겸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시작했다.
빌헬름 에른스트의 배려로 처음 몇 년 동안 오르간에 몰두했다.
바이마르에 있는 동안 가끔 바이센펠스를 방문했는데
1713년 2월 그곳 궁정의식에 참석하여 그의 첫 세속 칸타타인
〈사냥 칸타타 Was mir behagt〉(BWV 208)를 연주했다.
1713년 말 할레에 있는 리프프라우엔 교회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차호의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나
헤르초크가 급료를 올려주자 바흐는 바이마르에 계속 머물렀다.
1714년 3월 2일 부지휘자가 되면서
매달 한 편의 칸타타를 작곡해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되었다.
그의 양식이 심오한 변화를 겪었던
1708~14년 사이의 자세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1714~16년에 작곡된 칸타타를 볼 때
분명 그는 당시의 이탈리아 오페라 양식과 형식,
그리고 안토니오 비발디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협주곡 작곡가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
(→ 오페라 세리아, 다카포 아리아).
그 결과 1714년에 작곡된 칸타타 182, 199번 및 61번,
1715년에 작곡된 31번과 161번, 그리고 1716년에 작곡된 70번과 147번이 나왔다.
이탈리아 양식에서 비롯된 기법인
어떤 곡의 전체를 그대로 또는 변형시켜 반복하는 리토르넬로,
또는 다카포 기법을 즐겨 썼는데,
그는 이 기법들을 써서 그때까지 보다 규모가 큰 음악형식을 만들 수 있었다.
새로이 습득한 이러한 기법은 그의 아리아와 콘체르토,
보다 규모가 큰 푸가(특히 완숙기에 작곡된
오르간을 위한 푸가들)에 나타나고 있으며,
코랄 작법에도 영향을 주었다.
여러 작품 중 분명히 바이마르 시대에 작곡된 곡들은
〈오르간 소곡집 Orgelbüchlein〉에 있는
대부분의 작품과 소위 18곡의 '대(大)' 코랄 전주곡이라고
불리는 작품(그중 마지막 18번째 곡은 제외),
최초의 오르간 트리오, 오르간 전주곡과 푸가들이다.
오르간을 위한 '대(大)' 〈전주곡과 푸가 G장조〉
(BWV 541)는 1715년경에 최종적으로 개작되었고,
〈토카타와 푸가 F장조〉(BWV 540)는 바이센펠스에서 연주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716년 12월 1일 바이마르의 궁정 악장인 요한 자무엘 드레제가 죽자
보잘것없는 실력의 소유자인 그 아들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이에 분개한 바흐는 쾨텐의 레오폴트 대공 측에서 제의한 궁정 악장 자리를 수락했고,
1717년 8월 그 취임이 확정되었다.
헤르초크 빌헬름은 바흐의 사임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와 사이가 좋지 않은 조카와 바흐가 절친했던 것이
그 부분적인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9월경에는 프랑스의 유명한 오르간 연주자인 마르샹과 바흐와의 경연이 준비되었다.
당시의 정확한 상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경연이 있기 몇 시간 전에
마르샹은 드레스덴을 떠나버렸기 때문에 내용상으로 바흐가 이긴 것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용기를 얻은 바흐는 바이마르 궁정에 사임을 요청했고,
헤르초크는 얼마 동안 그를 감금하기까지 했지만(11. 6~12. 2) 결국 풀어주었고,
그는 할레에서 북쪽으로 50km 떨어진 쾨텐으로 갔다.
쾨텐시대
쾨텐의 궁정 악자으로서 주로 실내악과 관현악에 전념했다.
몇몇 작품들은 이전 것을 나중에 개작한 것이지만
바이올린과 클라비어, 비올라 다감바와
클라비어를 위한 소나타들과 무반주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작품들은
이 무렵에 작곡된 것이었다.
1721년 3월 24일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이 완성되었고,
그 중 6번은 비올라 다 감바를 연주하는
대공의 기교적인 한계를 염두에 두고 작곡된 것이다.
아울러 그는 대공의 생일과 그밖의 여러 행사를 위한 칸타타 몇 곡을 작곡했으나
지금은 보다 일반적인 가사로 바꾼 후기의 개정판만이 남아 있다.
1720년 7월 8일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가 갑자기 죽었다.
바흐는 이듬해 12월 3일 바이센펠스의 트럼펫 연주자의 딸인
안나 마크달레나 빌켄과 재혼했다.
첫번째 부인의 죽음을 제외한다면 쾨텐에서의 첫 4년 동안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대공은 진실로 음악을 이해했고
바흐는 그러한 대공과 최상의 관계를 유지했으며
또한 그 곳에서 일생을 마치기를 원했다.
그러나 1721년 12월 11일, 대공이 결혼을 하면서 상황은 변했다.
대공비는 남편이 자기에게만 관심을 가져 주기를 원했고 바흐는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또한 1710년과 1714년에 각각 태어난 두 아들의 교육문제를 생각해야 했기 때문에
요한 쿠나우의 죽음으로 음악감독 자리가 비게 된 라이프치히로 옮겨갈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가 그 자리에 들어가고자 했을 때는
이미 바흐의 친구인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이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했고,
다시 당대의 뛰어난 작곡가이며 다름슈타트의 음악감독이었던
크리스토프 그라우프너에게 제안된 상태였다.
그라우프너가 그 요청을 받아들일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흐는 1723년 2월 7일 칸타타 22번
〈예수께서 12사도를 이끄셨도다 Jesu nahm zu sich die Zwölfe〉를 시연했다.
그러나 4월 9일 그라우프너가 초청을 정식으로 거절했을 때는
이미 라이프치히로 가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므로
4월 4일에 그와 대공 사이를 소원하게 만들었던 대공비가 죽었지만
그는 쾨텐을 떠나 5월 13일 라이프치히에 부임했다.
그 후 그는 쾨텐의 명예 궁정악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그와 그의 부인은 1728년 11월 19일 대공이 죽을 때까지 때때로 그곳에서 일했다.
라이프치히시대
라이프치히 시의 교회 음악감독으로서 바흐는 교회 연주자를 책임져야 했다.
페터 교회 성가대에서는 단지 찬송가를 인도했고
노이 교회, 니콜라이 교회, 토마스 교회에서는 성부 합창을 했지만
바흐 자신이 직접 지휘를 하고 자신이 작곡한 교회 음악을 연주한 곳은
니콜라이 교회와 토마스 교회 두곳뿐이었다.
그의 첫번째 공식 연주는 삼위일체 축일
다음의 첫번째 일요일인 1723년 5월 30일에 있었던
칸타타 75번 〈가난한 잔치에 초대받으리라 Die Elenden sollen essen〉의 연주였다.
1723년에 여러 곡의 칸타타와 마그니피카트를 포함한 신작들을 작곡했으며
1724년 전반에는 〈요한 수난곡 St. John Passion〉을 만들었다.
이 기간에는 무려 62여 곡이나 되는 칸타타가 연주되었는데
그 가운데 39여 곡은 신작이었다.
1724년 6월11일 삼위일체 축일
다음의 첫 주일에 바흐는 다시 칸타타를 작곡하기 시작했으며
그 기간 동안 52곡이나 되는 소위 코랄 칸타타를 작곡했다.
〈B단조 미사〉의 거룩송(상투스)은 크리스마스 때 연주되었다.
라이프치히에서의 첫 2년(혹은 3년) 동안
그는 엄청나게 많은 칸타타를 써 거의 1주에 한 곡씩 작곡한 셈이었다.
라이프치히에서의 첫 3년 동안 칸타타에 전념한 결과,
장차 축일과 축일예배에 필요한 교회음악 대부분을 쓰게 되었다.
그래서 1726년 이후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
1729년 〈마태 수난곡 St. Matthew Passion〉을 작곡했는데
이 작품은 1730년대 중반에 일기 시작한 칸타타보다 규모가 큰
성악작품에 대한 관심의 시발점이 된 작품이었다.
말년
1747년 5월 포츠담에 있는 아들 에마누엘을 방문해서
프로이센의 대왕 프리드리히 2세 앞에서 연주를 했으며,
7월에 왕이 준 주제에 대한 즉흥연주를 〈음악의 헌정 The Musical Offering〉으로 완성했다.
1747년 6월에는 전에 그의 제자였던
로렌츠 크리스토프 미츨러가 설립한 음악학회에 가입했으며
그 학회에 그는 코랄
〈높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도다 Vom Himmel hoch da komm'ich her〉를
주제로 한 카논 변주곡을 헌정했다.
바흐의 말년의 병에 대해서는 그 병이 여러 달 계속되었다는 것과
그로 인해 〈푸가의 기법〉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사실 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시력을 잃은 두 눈을 수술한 것이 실패하여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으며,
결국 1750년 6월 28일 라이프치히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아내 안나 마크달레나는 의붓아들들이 전혀 돌보지 않았으며
친아들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홀로 남아 극심한 궁핍을 겪었다.
그녀는 1760년 2월 27일에 죽었는데 장례식은 빈민구제를 위한 조치로 치러졌다.
미완성인 채로 1751년에 출판된 〈푸가의 기법〉은 거의 주목을 끌지 못했으며,
1752년에는 유명한 베를린의 음악가이며
후일 왕실 복권 감독 프리드리히 빌헬름 마르푸르크의 찬사와
함부르크의 영향력있는 작곡가이자 비평가인 요한 마테존의 인정에도 불구하고
1756년경에는 단지 30부 정도의 악보가 판매되었으며,
알려진 바로는 그 악보는 폐품으로 팔렸다고 한다.
에마누엘 바흐와 오르간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요한 프리드리히 아그리콜라(제바스티안의 제자)가
바흐를 위해 사망기사를 쓰고 미츨러가 몇 마디 끝맺는 말을 덧붙여
음악학회의 학회지(1754)에 실어 출판했는데
이 글의 영역본은 〈The Bach Reader〉에 수록되어 있다.
불완전하고 부정확한 점이 없지 않지만 이 글은
바흐에 대한 1차 자료로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그는 좋은 남편이자 훌륭한 아버지였다.
그리고 20여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그중 10명의 아이들은 어린 나이로 죽었다.
그는 검소하고 겸손하고 친절했다.
음악이 신사에게 적당한 직업이 아니라고 생각되기 시작한 시대를 살았던 그는
때로 인간으로서 또는 음악가로서의 권리를 주장해야 했고,
이점에서는 결코 타협하지 않았지만
어떤 냉정한 고용주와도 마찰을 일으키지 않았으며
동료 음악가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아울러 그는 훌륭한 선생이었으며
뮐하우젠 시대 이후 결코 제자가 끊인 적이 없었다.
출처-Daum 백과사전 W. Emery R.L. Marshall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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