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문학의 향기

송강 정철에 대하여

맑은물56 2007. 12. 26. 18:58
1. 송강 정철 개관

송강 정철(松江 鄭澈 : 1536~1593)은 조선 선조(14대) 때의 명신이면서 문인으로서 자는 계함, 호는 송강이며, 시호는 문청이다. 율곡 이이와 동갑나기인 정철은 돈녕부 판관을 지낸 정유침의 아들로서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당대의 명유들이었던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면앙정 송순 등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우리나라 시가사상 고산 윤선도와 쌍벽을 이루는 가사문학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그가 52세 때 향리인 담양에서 지은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은 조선 선조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노래한 것으로 유배가사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서포 김만중은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중국 초(楚)나라의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離騷)에 비겨, 동방의 이소(離騷)라고 절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의 경치좋은 광주호 주변에 있는 식영정과 호남의 명산인 무등산 북서쪽의 원효계곡 자락에 있는 성산(별뫼)의 모습을 연결시켜 노래한 성산별곡은 정극인의 상춘곡, 면앙정 송순의 면앙정가, 정해정의 석촌별곡으로 이어지는 호남 가단의 중요한 맥을 형성하고 있다. 송강 정철은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관동지방의 해금강, 내금강, 외금강 등의 절승지와 관동팔경(*)을 중심으로 한 기행가사인 관동별곡을 짓기도 했다. 또한 송강 정철은 본래 성질이 곧아서 바른 말을 잘하는 데다, 당시 조정의 당파 싸움에 연루되어 거의 평생을 귀양살이로 마쳤지만, 학문이 깊고 시를 잘 지어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즐겨 회자되고 있다. 오늘날 송강의 시비(詩碑)가 강원도 원주시 치악예술관 입구에 있는데, 이는 송강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도민((道民)을 교화하기 위해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짓고 관동별곡을 지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송강의 사후 담양 창평의 송강서원(松江書院)과 경남 영일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別祠)에 제향(祭享)되었다.

* 굴원의 이소 : 373구 2490자로 된 고대 중국의 시가 중에서도 가장 긴 서정시임.
중국 초나라의 굴원은 회왕 때 좌도(左徒) 벼슬에 있었는데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역대의 치란(治亂)에 밝아 회왕으로부터 신임이 두터웠다. 굴원이 회왕의 명을 받아 초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위해 헌령(憲令)을 기초하고 있었는데 굴원과 왕의 은총을 다투던 상관대부 늑상이 그걸 가로채어 자신의 공적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굴원은 이를 거절하였다. 늑상은 이에 굴원을 회왕에게 다음과 같이 참소하였다.
"굴원은 학식을 빙자하여 대왕을 업신여기며 무엇인가 딴마음을 품고 있는 듯합니다."
현명치 못한 초의 회왕은 늑상의 말을 믿고 굴원을 멀리하였다. 굴원은 왕의 듣고 보는 것이 총명하지 않고 참소와 아첨이 임금의 밝음을 가로막는 것을 근심하고 비통해하면서 장편의 시를 지어 그의 울분을 토로하니 이 시가 그 유명한 굴원의 이소(離騷)이다.

* 관동팔경 : 관동팔경은 관동지방 즉 대관령 동쪽의 바닷가에 있는 여덟 군데의 명승지를 말하는데, 통천의 총석정, 고성의 삼일포, 간성의 청간정, 양양의 낙산사, 강릉의 경포대, 삼척의 죽서루, 울진의 망양정, 평해의 월송정이 여기에 든다.


2. 담양지방과의 인연

송강 정철이 전라남도 담양 지역과 인연을 맺은 것은 그의 나이 16세 때 였다. 두 누이가 각각 인종의 귀인이자, 계림군 유의 부인이었던 탓으로 궁중에 자주 출입하며 경원대군(훗날 13대 명종)의 동무가 되기도 하는 등, 명문세가의 자식으로서 유복하게 지냈던 그의 어린 시절은, 송강이 10살(명종 즉위년, 1545년)이 되던 해에 을사사화가 터지면서 끝이 났다.
을사사화로 인해 계림군 유는 죽임을 당했고, 송강 정철의 형은 모진 매를 맞고 먼 곳으로 귀양가던 길에 죽었으며,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으로, 다시 경상도 영일로 유배되었고 정철도 북으로 남으로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를 떠돌았다. 6년 후 유배에서 풀린 그의 아버지는 한양 생활을 정리한 후, 온 가족을 이끌고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었던 전라남도 담양 땅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담양에서의 생활은 송강의 일생에서 그나마 안정적이고 따스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16살 되던 해까지 체계적인 학문을 배울 수 없었던 그는 사촌 김윤제에 의해 발탁되었는데, 그 후 10여 년 동안 고봉 기대승, 하서 김인후, 송천 양응정, 면앙정 송순 등 호남사림의 여러 학자들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석천 임억령에게서 시를 배웠다.
또한 담양 땅 무등산 자락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시인으로서의 자질을 흠뻑 길렀고,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과도 사귀었다. 송강 정철은 17세 때에 사촌 김윤제의 외손녀 사위(장인은 문화 유씨 강항)가 되었다.


3. 송강의 벼슬 생활

송강 정철은 명종 16년(1561년)에 27세로 과거에 급제하면서 율곡 이이와 함께 湖堂에 들어갔고, 서인의 거두로 불리면서 우의정까지 지냈다. 그러나 송강 정철의 벼슬살이는 선조 즉위 이후, 시대적 분위기와 더불어 파란만장했다.
수찬·좌랑·종사관 등을 지내다가 40세 때에 당쟁에서 밀려 낙향하였다가, 43세 때에 다시 조정에 나가 직제학·승지 등을 지냈다. 다시 동인의 탄핵으로 낙향하였다가 45세 때(1580년)에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이 때 최초의 가사인 [관동별곡]과 [훈민가]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였다.
그 뒤 전라도 관찰사·도승지·함경도 관찰사·예조판서로 승진하였으며, 49세 때에 대사헌이 되었다가 동인의 탄핵을 받아 또 다시 낙향하여 4년간 담양지방의 송강정에 은거하였다.
이 때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의 가사와 시조, 한시 등 많은 작품을 지었다. 54세에 정여립사건(1589년 기축년)이 일어나자 다시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로서 최영경, 정개청 등을 다스리고 철저히 동인 세력을 추방하였으며, 다음 해에 좌의정이 되고, 56세에 세자 책봉 문제인 建儲問題(조선 선조 24년인 1591년에 왕세자 책봉문제로 동인과 서인 사이에 일어난 분쟁)가 일어나 동인파의 거두인 영의정 이산해와 함께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건의하기로 하였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건의하였다. 이에 신성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던 선조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명천 땅에 유배되었다
57세 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선조 임금을 맞이하고 의주까지 호송하였으며, 왜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에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체찰사를 지내고, 이듬해 명나라의 조선 출병에 감사하는 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4. 생애 마침

그 후 다시 동인의 모함을 받아 사직하고 강화도 송정촌(松亭村)으로 물러나와 만년을 지내다가, 빈한과 회한속에서 이 해(선조26년,1593년) 12월 18일에 다사다난했던 생의 막을 내리니, 향년 58세였다.
송강의 묘소는 현재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어은에 있는데, 송강정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송강의 신도비는 1684년에 문정공 우암 송시열이 글을 짓고 오위도총부부관 김수증이 전서하고 글을 썼으며, 비의 높이가 2.5미터이고 폭이 1.5m이며, 신도비각은 15평으로서 충청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187호로 지정되어 있다.


5. 송강의 성격

동서붕당으로 갈려, 서로 치고 받던 시절에 어느 편에도 서지 않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할 말이 있으면 반드시 입 밖에 내야 하고, 사람의 허물을 보면 親友權貴라도 조금도 용서함이 없어, 禍를 산같이 입더라도 앞장서서 싸우기를 불사하던 송강 정철의 성격상, 정치가로서의 그의 삶은 파란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6. 송강의 작품
송강의 작품으로는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 4편의 가사와 장진주사, 시조 107수가 전하며, 유고로 송강가사, 송강집, 송강별추록유사(松江別追錄遺詞)가 있다.
송강은 평생을 시와 술을 즐겨했으며, 거문고에도 조예가 깊어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의 집 뜰에 있던 오동나무로 만든 거문고를 평생토록 애용했다고 하며, 술 좋아하는 송강에게 이 잔으로 하루에 한 잔씩만 마시라고 선조 임금이 준 은술잔을 송강이 사발만큼 두들겨 크게 늘려서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도 은잔과 함께 전해온다.

▣ 관동별곡(關東別曲) : 조선 선조 13년(1580년)인 송강 정철이 45세 때에 관동지방을 둘러보고 지은 295구의 기행 가사

* 가사 내용 :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고질병이 되어, 은서지인 담양 창평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임금님께서) 8백리나 되는 강원도 관찰사의 직분을 맡겨 주시니, 아아, 임금님의 은혜야말로 갈수록 그지없다.

▣ 사미인곡(思美人曲) : 조선 선조 18년(1585년)인 송강 정철이 50세 때에 담양 창평에서 지은 서정가사

* 가사 내용 : 이 몸이 태어날 때에 임을 따라 태어나니, 한 평생 함께 살아갈 인연이며 이 또한 하늘이 어찌 모를 일이던가? 나는 오직 젊어 있고, 임은 오직 나를 사랑하시니, 이 마음과 사랑을 비교할 곳이 다시 없다.

▣ 속미인곡(續美人曲) : 조선 선조 18년-22년(1585-1589년)인 송강 정철이 50-54세 때에 지은 서정가사

* 가사 내용 : 서사- 임과 이별한 사연 :
갑녀- 저기 가는 저 부인, 본 듯도 하구나. 임금이 계시는 대궐을 어찌하여 이별하고, 해가 다 져서, 저문 날에 누구를 만나러 가시는고?
을녀-아, 네로구나. 내 사정 이야기를 들어 보오. 내 얼굴과 이 나의 태도는 임께서 사랑함직 한가마는 어쩐지 나를 보시고 너로구나 하고 특별히 여기시기에 나도 임을 믿어 딴 생각이 전혀 없어, 응석과 아양을 부리며 지나치게 굴었던지, 반기시는 낯빛이 옛날과 어찌 다르신고? 누워 생각하고 일어나 앉아 헤아려 보니, 조물주의 탓이로다.

▣ 성산별곡(星山別曲) : 조선 명종 15년(1560년)인 송강 정철이 25세 때에 지은 가사

전남 담양군 남면에 있는 성산(별뫼)의 풍경과 식영정(息影亭), 서하당(棲霞堂)을 중심으로 읊은 것으로 김성원(金成遠:號 棲霞堂)을 경모(敬慕)하여 지은 작품

* 가사 내용 : 엇던 디날손이 성산의 머믈면서,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듯소.인생 세간(世間)의 됴흔 일 하건마난 엇디 한 강산을 가디록 나이너겨 적막 산중의 들고 아니 나시난고.

▣ 장진주사(將進酒辭) : 송강 정철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시조

* 시조의 내용 : 인생은 허무한 것이나 후회하지 말고 죽기 전에 술을 무진장 먹어 그 허무함을 잊어버리자는 일종의 권주가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조는 전체적으로 암울한 분위기에 걸맞은 소재를 선택해서 삶의 허무함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어두운 어조로 잘 나타내고 있는데, 삶의 극단적인 허무의식에 빠지지 않고, 고사성어나 한문 조어를 피하였으며, 우리말의 일상적 생활어를 시어로 선택함으로써 일반 대중과의 공감대를 넓게 확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 잔(盞) 먹새그려 또 한잔 먹새그려.
곶 것거 산(算) 노코 무진무진(無盡無盡) 먹새그려.
이 몸 주근 후면 지게 우희 거적 더퍼 주리혀 매여 가나 유소보장(流蘇寶帳)의 만인(萬人)이 우러네나,
어욱새 속새 덥가나무 백양(白楊) 수페 가기곳 가면,
누른 해, 흰 달, 굴근 눈, 쇼쇼리 바람 불 제, 뉘 한잔 먹쟈할고.
하믈며 무덤 우희 잔나비 휘파람 불제, 뉘우친달 엇더리.

* 출전 : <청구영언>
* 의의 : [순오지](홍만종의 시화)에 이백(李白), 이하(李賀), 두보(杜甫)의 명시인 <장진주>와 시상이 같다고 평함.

▣ 훈민가((訓民歌) : 송강 정철이 선조 13년(1580년)에 지은 연시조 16수

* 시조의 내용 : 송강 정철이 45때에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강원도 지방 도민의 교화를 목적으로 지은 일종의 훈민가로서, 중국 송나라 때 진고령(陳古靈)이 백성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조목별로 쓴 선거권유문(仙居勸誘文)인 13조목에 군신(君臣). 장유(長幼). 붕우(朋友)의 3조목을 추가하여 각각 한 수씩 읊은 것으로, 유교의 윤리를 주제로 한 교훈가이며,연시조의 형태를 취했으나 각 수는 완전히 독립된 작품이다.

1.
아버님 날 나흐시고 어마님 날 기르시니
두분 곳 아니시면 이 몸이 사라실까.
하늘같은 가 업슨 은덕을 어데 다혀 갑사오리

2.
님금과 백성과 사이 하늘과 땅이로다.
내의 셜운 일을 다 아로려 하시거든
우린들 살 진 미나리 홈자 엇디 머그리.

3.
형아 아이야 네 살할 만져 보와
뉘손데 타나관데 양재조차 같아산다.
한 젖 먹고 길러 나이셔 닷 마음을 먹디 마라.

4.
어버이 사라진 제 셤길일란 다 하여라.
디나간 후면 애닯다 엇디 하리
평생에 곳텨 못할 일이 잇뿐인가 하노라.

5.
한 몸 둘헤 나누어 부부를 삼기실샤.
이신 제 함께 늙고 주그면 한데 간다.
어디셔 망녕의 것이 눈 눈 흘긔려 하난고.

6.
간나희 가는 길흘 사나희 에도다시,
사나희 녜는 길을 계집이 츠ㅣ도다시,
제 남진 제 계집 하니어든 일홈 뭇디 마오려.

7.
네 아들 효경 읽더니 어도록 배왔나니,
내 아들 소학은 모르면 마칠로다.
어네 제 이 두 글 배화 어딜거든 보려뇨.

8.
마을 사람들아 올흔 일 하쟈스라.
사람이 되여 나셔 올치 옷 못하면
마소를 갓곳갈 씌워 밥 먹이나 다르랴.

9.
팔목 쥐시거든 두 손으로 바티리라.
나갈 데 계시거든 막대 들고 좇으리라.
향음주(鄕飮酒) 다 파한 후에 뫼셔 가려 하노라.

10.
남으로 삼긴 듕의 벗갓티 유신(有信)하야.
내의 왼 일을 다 닐오려 하노매라.
이 몸이 벗님 곳 아니면 사람되미 쉬울가.

11.
어여 뎌 족하야 밥 업시 엇디할고.
어와 뎌 아자바 옷 업시 엇디할고.
머흔 일 다 닐러사라 돌보고져 하노라.

12.
네 집 상 사달흔 어도록 찰호산다.
네 딸 서방은 언제나 마치나산다.
내게도 업다커니와 돌보고져 하노라.

13.
오늘도 다 새거나 호미메고 가쟈스라.
내 논 다 메여든 네 논 졈 메어 주마.
올 길헤 뽕 따다가 누에 먹켜 보쟈스라.

14.
비록 못 니버도 남의 옷을 앗디 마라.
비록 못 먹어도 남의 밥을 비디 마라.
한적 곳 때 시른 후면 고텨 씻기 어려우리.

15.
쌍육(雙六) 장기(將碁) 하지 마라 송사(訟事) 글월 하지 마라.
집 배야 무슴 하며 남의 원수 될 줄 엇지,
나라히 법을 세오샤 죄 잇난 줄 모로난다.

16.
이고 진 뎌 늘그니 짐 프러 나를 주오.
나는 졈엇거니 돌히라 무거울까.
늘거도 셜웨라커든 짐을 조차 지실까.

▣ 송강가사(松江歌辭) : 송강 정철의 가사(歌辭)와 시조 작품을 모아 엮은 가집(歌集).

목판본 1책으로 여러 이본(異本)이 있으나 그 중에서 이선본(李選本) ·성주본(星州本) ·관서본(關西本)의 세 판본이 전하고, 의주본(義州本)과 관북본(關北本)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 밖에 필사본이 가끔 발견되나, 완전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 못하다.
‘이선본’은 원래 소장자였던 일사(一加) 방종현(方鍾鉉)이 명명(命名)한 것으로 현재 서울대학교 도서관의 일사문고(一加文庫)에 들어 있고, 1948년 7월에 발견된 ‘관서본’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7. 송강 정철연보

* 송강 정철의 출생

조선 중종 31년 윤 12월 6일 서울 장의동(지금의 청운동)에서 위로 형 셋과 누나 셋을 둔 막내로 테어남. 본관은 경북 영일이고 고려왕조 때 현감벼슬을 한 정극유의 12대 손. 아버지는 돈령부 판관 정유침이며 어머니는 죽산 안씨로서 대사간 안팽수의 딸임. 고조 할아버지는 병조판서, 증조 할아버지는 김제 군수를 역임했으나 출생 당시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벼슬에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음.

* 유년(10살 이전)

맏누이가 당시 세자였던 인종의 후궁 가운데 한 사람인 숙의로 입궐하고, 막내누이가 왕의 종실인 계림군에게 출가하면서, 왕실과의 혼인으로 집안이 새롭게 활기를 찾으며 펴 나감.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도 벼슬이 내려짐. 궁중을 자유롭게 출입하면서, 왕자들과 어울려 놀며 친교를 쌓음. 특히 훗날의 명종인 당시 경원대군과는 소꼽동무 사이로서, 정분이 매우 두터웠음.

* 10살(1545년)

인종 1년이자 명종 즉위년, 을사사화가 일어나 집안이 사화에 연루되면서 참혹한 화를 입음. 이로 인해 파란만장한 삶의 시발점에 서게 됨. 자형 계림군이 역모죄로 붙잡혀 처형을 당하고,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으로, 맏형은 광양으로 유배됨. 송강은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 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곧 이어 아버지만 유배가 풀림.

* 12살(1547년)

명종 2년, 전라도 양재역 벽서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을사사화의 여파가 집안에 휘몰아침. 아버지는 경상도 영일로 유배되었으며, 맏 형은 다시 붙잡혀와 매를 맞고 함경도 경원으로 귀양가는 도중 32살의 나이로 요절했고, 둘째 형은 과거를 준비하다가 벼슬길에 환멸을 느껴 처가가 있는 전라도 순천으로 은거함. 송강은 다시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 생활을 함.

* 16살(1551년)

명종 6년. 왕실의 대를 이을 왕자(훗날의 선조)가 태어나, 아버지가 사면을 받아서 유배에서 풀려남. 송강은 아버지를 따라 담양 창평의 당지산 기슭으로 옮겨와 살게 됨. 이후 27살의 나이로 벼슬길에 나아가기 전까지 10년여 동안 이 곳에서 송순, 임억령, 김윤제, 김인후, 양응정, 기대승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학자, 문인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학하였으며, 김성원, 고경명들과 교유하며 성장함.

* 17살(1552년)

명종 7년. 김윤제의 주선으로 문화 유씨 강항의 외손녀와 결혼함.

* 21살(1556년)

명종 11년. 율곡 이이와 처음 만나 교우의 도를 정함.

* 26살(1561년)

명종 16년. 진사시에서 장원을 차지함. 적어도 이 해 이전에 이미 우계 성혼과 교우의 도를 정함.

* 27살(1562년)

명종 17년. 문과 별시에서 장원 급제함. 성균관 전적 겸 지제교를 거쳐 사헌부 지평에 임명됨. 순조롭게 출발한 벼슬길이었으나 명종 임금의 사촌형 경양군의 옥사사건을 맡아 처리하면서 명종의 부탁을 거절함으로써, 수년 동안 좋은 벼슬길에서 소외됨. 이후 30살 때까지 형조, 예조, 공조, 병조의 좌랑을 거쳐 공조, 예조의 정랑에 제수됨. 요직에 나아가지 못해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음.

* 30살(1565년)

명종 20년. 한 달여 동안 경기도사에 제수됨.

* 31살(1566년)

명종 21년. 형조정랑, 성균관 직강, 사간원 헌납, 사헌부 지평 등 역임. 1월에 형조정랑 자격으로 궐정에 참여하여 을사사화에 연루된 선비들의 무고함을 밝혀 줄 것을 건의함. 3월에 인조의 귀인이었던 맏누이의 상을 당해 곡함. 9월에 북관어사로 나아가 함경도를 순시함. 도중에 우연히 시조 한 수를 짓게 되는데, 그 내용이 명종의 죽음을 예언하고 있다 하여 오래도록 화제가 됨. 10월에 홍문관 부수찬에 제수되어 처음으로 홍문관에 들어감.

* 32살(1567년)

선조 즉위년. 벼슬살이에 새로운 전기를 맞음. 10월에 이르러 을사사화에 무고하게 연루된 인사들이 석방되고 명예가 회복됨. 아버지 판관공의 직첩이 다시 회복됨. 11월에 홍문관 수찬에 임명됨. 직후 율곡과 더불어 호당에 선출됨.

* 33살(1568년)

선조 1년. 3월에 이조좌랑의 요직에 임명됨. 6월에 원접사 박순의 종사관이 되어 시 재주를 발휘함.

* 34살(1569년)

선조 2년. 5월에 홍문관 수찬, 교리, 지평에 제수됨. 이즈음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기존세력들이 사림계 인문 17인을 논죄하고 조정에서 내쫓으려 하자, 임금 앞에 나아가 그들을 통렬히 논박함.

* 35살(1570년)

선조 3년. 교리, 예조정랑을 역임함. 4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경기도 고양군 신원에서 37살(1572년) 되던 해 6월까지 2년여에 걸쳐 시묘살이를 함. 이 때 모든 의례와 절차를 스승과 벗들에게 물어 예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게 함으로써, 주위의 큰 칭송을 받음.

* 37살(1572년)

선조 5년. 7월에 시묘살이의 복을 벗고 벼슬길에 나아가 직강, 이조정랑, 의정부 검상 및 사인, 사간원 사간 등을 역임함.

* 38살(1573년)

선조 6년. 홍문관 전한, 사헌부 집의, 군기시정 등을 역임함. 4월에 모친상을 당하여 경기도 고양군 신원에서 40살(1575년) 되던 해 5월까지 약 2년 동안 시묘살이를 함. 이 때에도 예를 다하여 주위의 큰 칭송을 받음.

* 40살(1575년) : 첫 번째 낙향

선조 8년. 6월에 시묘살이 복을 벗고 벼슬길에 나아가 내자시정, 사인으로부터 홍문과 직제학, 성균관 사성, 사간등을 역임함. 이 무렵 동서분당에 따른 당쟁의 소용돌이가 본격화되기 시작함. 서인의 주요 인사로서 동인과 대립함. 그러다가 마침내 율곡에게 조정의 화합을 맡기고 담양 창평으로 낙향함(첫번째 낙향). 이 소식을 들은 선조가 장차 크게 등용하겠다고 하면서 만류했으나 끝내 낙향을 택함. 이로 인해 이 해 10월 이후 42살(1577년) 되던 해 10월까지 약 2년간 주로 창평에서 생활함. 낙향 기간 중에 선조로부터 계속해서 여러 관직을 제수받지만, 모두 응하지 않음.

* 42살(1577년)

선조 10년. 11월에 계림군에게 출가했던 막내 누님이 죽자 고양군 신원에 와서 지냄. 같은 달에 인성왕후(인조의 왕비)가 세상을 뜨자, 대궐에 들어가 상에 임함. 이어 송익필을 만나 거취를 상의하기도 함.

* 43살(1578년)

선조 11년. 5월에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으로 승진되어 다시 벼슬길에 나아감. 11월에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나, 그 즈음에 벌어진 진도 군수 이수의 뇌물 사건 옥사 처리 문제로 동인들의 공격을 받아 탄핵을 받아 직무가 바뀜. 12월에 성균관 대사성, 병조참지에 제수되지만, 이수의 옥사 이후 계속 조정에 나아가지 않음.

* 44살(1579년) : 두 번째 낙향

선조 12년. 5월에 형조참의, 6월에 우부승지, 8월에 동부승지에 제수되지만 역시 나아가지 않음. 당쟁의 소용돌이가 빚어낸 일련의 사건을 지켜보다가 정치 현실에 깊은 환멸을 느끼고, 그 동안 머물러 있던 서울 및 고양군 음죽을 떠나 다시 창평으로 낙향함(두 번째 낙향)

* 45살(1580년)

선조 13년. 1월에 강원도 관찰사를 제수받고 다시 벼슬길에 나아감. 이 무렵 <관동별곡>, <훈민가>등을 지음. 관찰사 임무를 수행하면서 도내 여러 폐단들을 시정, 개혁하고, 영월 땅에 표석도 없이 버려진 단종의 묘를 수축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며, 지방관들을 독려하기 위해 <고을의 관리들을 깨우쳐 인도하는 글>을 짓기도 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강원도 내 민풍을 크게 진작시킴.

* 46살(1581년) : 세 번째 낙향

선조 14년. 관찰사의 외직에서 돌아와 2월에 참지, 4월에 대사성에 제수됨. 6월에 임금의 명을 받들어 정승 노수신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비답(신하의 상소에 임금이 내리는 답)을 짓게 되는데, 그 내용이 합당치않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과 동인들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다시 창평으로 낙향함(세 번째 낙향), 그러나 12월에 특명으로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특히 도내 세액과 부역의 실상을 조사, 개혁하여 백성들에게 크게 칭송 받음. 그 무렵 전라도사로 있던 조헌과 처음 만나 우여곡절 끝에 돈독한 교분을 쌓게 됨.

* 47살(1582년)

선조 15년. 9월에 임금의 특명으로 가선대부 행 승정원 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상서원정 예문관 직제학에 임명됨. 12월에 예조참판에 이어 함경도 관찰사에 임명됨.

* 48살(1583년)

선조 16년. 2월에 예조참판, 3월에 특명으로 자헌대부 예조판서로 승진됨. 4월에 평소 술을 즐겨 위신을 잃는 일이 많고 승진이 너무 빠르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입으나, 임금이 비호함. 다시 4월에 지돈령 부사, 6월에 동지 성균관사에 이어 형조판서에 제수됨. 8월에 임금과 대면하여 교만한 동인세력의 인물들을 죄로 다스릴 것을 청하여 결국 뜻을 이룸. 다시 예조판서에 제수됨. 9월에 동인세력을 죄로 다스린 일로 계속 간원들의 논핵을 받지만, 임금의 적극적인 비호를 받음.

* 49살(1584년)

선조 17년. 1월에 더없는 지기였던 율곡이 세상을 떠나자, 곡하며 애도의 시를 지음. 2월에 대사헌 겸 예문제학에 제수되며, 곧이어 찬집청 당상으로 차출됨. 8월에 지의금부사 대사헌에 제수됨. 이 무렵 임금이 총마를 특사하여 출입시에 타고 다니게 되니, 사람들이 그를 '총마어사'라고 부르기도 함. 12월에 다시 특명으로 승진하여 승정대부 의정부 우찬성 겸지 경연사에 제수됨. 선조의 총애가 더할 나위 없이 두터운 시기였음.

* 50살(1585년) 네 번째 낙향

선조 18년. 3월에 판돈령으로 직무가 바뀜. 4월에 동인세력의 인물들로부터 논핵을 입으나, 임금이 비호함. 8월에 이르러 동인들로부터 조정 내부에 파당을 만들어 나라 일을 그르치려는 무리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그들의 공박과 사간원 및 사헌부의 논핵을 입고 마침내 그와 가까이 지내던 주변 인물들과 함께 벼슬에서 물러남. 처음에 고양을 중심으로 한 근기지방에서 생활 근거를 마련하고자 했으나, 가까이에서 계속 비방의 소리가 들려오자 결국 창평으로 낙향함(네 번째 낙향), 이후 54살(1589)되던 해 10월 초까지 4년여동안 향리 창평을 근거지로 초야에 묻혀 지냄. 이 기간에 주옥같은 작품들을 많이 지음.

* 51살(1586년)

선조 19년. 10월에 조헌이 상소하여 이이, 성혼, 박순과 함께 송강을 복권시키고자 함.

* 52살(1587년)

선조 20년. 3월이 이귀가 상소하여 송강을 복권시키고자 애씀. 이 해와 다음 해 사이의 기간에 특히 <사미인곡>,<속미인곡>을 지음.

* 53살(1588년)

선조 21년. 조헌이 재차 상소하여 송강을 복권시키고자 함.

* 54살(1589년)

선조 22년. 7월에 사암 박순의 죽음에 곡하며 추도의 시를 지음. 8월에 맏아들 기명의 죽음으로 복을 입음. 10월에 정여립 모반사건이 적발되자 아들의 장사를 위해 경기 고양에 올라와 있다가 대궐에 들어가 임금께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계를 올림. 선조는 충절로서 일컬으며 가상히 여김. 이어 기축옥사가 벌어지며, 11월에 특명으로 의정부 우의정에 임명되고 겸하여 옥사를 주관하는 위관이 됨. 낙향한 지 4년여만에 다시 화려하게 중앙 정계에 복귀함.

* 55살(1590년)

선조 23년. 2월에 좌의정으로 승진함. 3월에 다시 위관을 맡아 기축옥사를 처리함. 희생을 줄이기 위해 갖은 애를 씀. 7월에 수충익모 광국추충 분의협책 평난공신을 책하고 인성 부원군에 봉해짐.

* 56살(1591년)

선조 24년. 2월에 세자 책봉 문제를 건의하다 이산해의 모해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 사직서를 올리자 체임됨. 3월에 용산촌사로 물러나 명을 기다림. 윤 3월에 이르러 평소 주색에 빠져 생활이 문란하고 당을 꾸며 경박한 무리를 모았으며, 조정의 인사를 마음대로 휘둘렀다는 혐의로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의 논핵을 입고 파직됨. 6월에 다시 양사가 계를 올려 송강의 귀양을 청하자, 처음에는 명천으로 정배되었다가, 곧 이어 진주로 옮기라는 명이 내린 지 사흘 만에 북녘 땅 강계로 유배되어 거처 주위에 가시울타리까지 쳐지는 혹독한 귀양살이를 함. 이 기간 중 대부분을 독서와 사색으로 보냄.

* 57살(1592년)

선조 25년. 4월 중순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5월 초에 유배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임금을 모심. 9월에 충청, 호남 양호의 체찰사로 임명되어 남쪽으로 내려감. 이 무렵 조헌의 순국 소식을 듣고 제문을 지어 곡함.

* 58살(1593년) : 송강 정철의 죽음

선조 26년. 1월에 체찰의 임무를 소홀히 한다는 모함을 받고 북쪽 조정으로 돌아옴. 5월에 사은사로 명나라에 가게 되는데, 출발에 임하여 임금께 글을 올려 국난에 임한 충정을 간절히 드러냄. 귀국 후 명나라 조정에서 군사를 출동할 뜻이 없는 것 같이 송강의 일행으로부터 나온 거짓 보고 때문에 엉뚱한 모함을 입음. 이에 사면을 청하고 강화 송정촌으로 물러남. 당장 생계조차 꾸리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면서 깊은 시름을 안고 지내다가 마침내 12월 18일 강화 송정촌 거처에서 세상을 뜸.

* 송강의 사후

세상을 뜬 이듬해인 1594년 2월에 경기도 고양군 신원에 장사함. 1624년(인조 2년)에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665년(효종 6년)에 충북 진천으로 이장함. 1684년(숙종 10년)에 문청이라는 시호가 내림. 1691년(숙종 17년)에 다시 관작이 삭탈되었다가, 1694년(숙종 20년)에 재차 회복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