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사찰순례

[스크랩] 성철스님께서 수도하신 해동최초가람 구미 도리사(桃李寺)

맑은물56 2012. 12. 26. 18:41

 

 

성철스님께서 수도하신 해동최초가람 

경북 구미 태조산 도리사(桃李寺) 여행

 

 

 토요일밤 우연히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처음 만난 도리사를 보고 한번 다녀 와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늘 점심을 먹고 있으니 집사람이 오후에 절에 다녀 오자고 하길래 마침 잘 되었다 싶어서 도리사로 향했다..그저께 내린 눈으로 온 산천은 하얗게 변해 마음마져 상쾌함을 금할 수가 었었다..의성 군위를 지나서 선산 해평을 도달하니 어느듯 도리사의 일주문이 우리들을 반기고 있었다....

 

 도리사로 들어가는 길의 제설작업은 아주 힘들게 실시하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렵게 잘 치은 덕에 도리사 마지막 주차장까지  갈 수가 있었다..도리사 마당까지는 너무 가파르고 눈이 있어 차로는 못올라 가고 걸어서 가는데 꽤나 찬바람이 귀싸대기를 시럽게 만들고 있었다...아름다운 도리사내의 전경과 극락전의 부처님께 절을하고 난 후 주변풍경을 정신없이 구경하고 나니 어느듯 해가 서산에 걸리고 있었다...

 

 도리사 일주문을 지나 구미보를 지나서 낙단보, 상주보 쪽을 지나면서 예천 용궁에 도착해서 둘이서 순대국밥 한그릇 맛있게 먹고 집에 도착하니 목이 까끌까끌해지고 있다...아마도 감기란 놈이 찾아올것 같구나..콧속도 쎄에하고...

 

 일요일 새벽부터는 옆구리를 우부러싸쥐고 똘똘 구불다가 병원에 가니 요로 결석이라네요..오전에 조정제 맞고 오후에 쇄석실에 들어가서 한시간 가량 얻어 맞고 나오니 정말이지 구역질에다가 어지럼증까지....소변에는 계속 피가 섞여서 울컥울컥 나오고...밤부터 쉬다가 하루가 지난 이제서야 겨우 일어나서 이렇게 자료를 만들고 있습니다...

 

    

아래는 도리사의 내용을 인터넷에서 옮겨 온 것이다. 

 

도리사는 선산과 구미의 남북을 꿰뚫고 흐르는 낙동강의 동쪽 구미시 해평면 송곡동 태조산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로

신라19대 눌지왕(417년)에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이 불교가 없었던 신라에 포교를 위해 처음 세운 해동불교의 발상지이다.

 

 아도화상은 중국에서 현창화상에게 선도를 배워 19세에 자명을 받아 선산 도개부에 있는 모례의 집에서 굴실을 지어 거처하다가 시봉자가 늘어나게 되어 진기승지를 찻아 결암봉불 하던중 이곳에 오색도화가 설중에 만개하여 사호를 도리사라 하니 해동 최초 가람으로 신라불법의 초전법륜지인 것이다.

 

 신라 불교 초전법륜지로 성지화된 이곳은 1976년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하려 올 때 모셔온 세존 진신사리가 세존사리탑 보수 공사중 금동육각사리함(金銅六角舍利函)에 봉안되어 발견되었다.
금동육각사리함은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이 되며 국보 제208호로 지정되어 현재 직지사 성보 박물관에 위탁 소장되어 있다.


 1968년 봄 아미타 좌상 도금시 불상 밑에서 1731년 영조 7년 때의 중수기가 발견되었으며, 극락전 뜰앞에 있는 보물 470호인 도리사 화엄석탑은 일반적인석탑과도 특이한 양식이다. 그 형태는 여러 개의 석주를 맞대어 기단부를 형성하였고 다시 그 상층부에 중층의 탑신부와 상륜을 배치한 특수형식으로 귀중한 문화재로서 옛 향기를 품고 있다.


 그리고 아도화상이 도를 닦았다는 좌선대 옆에는 아도의 사적비겸 자운비가 있는데 앞면에는 인조 17년에, 뒷면에는 효종6년에 새긴 아도의 사적이 음각되어 있다. 현존 건물은 법당 극락전과 삼성각을 비롯하여 선원과 2동의 요사,그리고 세존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다.

 

 

도리사 극락전

 

해동최초가람성지태조산도리사 일주문

 

도리사 입구에 있는 안내도

 

설선당(說禪堂)

 

 

 

 

 

 

설선당(說禪堂)의 여러 모습 

 

수선료(修善寮)

앞에서 보면 2층이고 뒷편에서 보면 단층구조로 아래층은 공양간, 윗층은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다

 

수선료(修善寮)를 뒤에서 본 모습

 

수선료(修善寮)를 뒤에서 본 모습인데 역광이라서 ............^^

 

도리사 전경인데 극락전에서 수선료(修善寮)쪽을 보면서 담아 보았다

 

경상도에서는 정지라고 부르는데 부엌과 같은 임무를 뛰고 있는듯

반야쉼터...아무나 들어가서 쉬라는 뜻인것 같다

 

극락전(極樂殿,경북문화재 자료 제318호)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이 지었다는 원래의 도리사는 불에 타서 없어졌으나, “도리사 금당암 중창기(1807년)”와 “선산 도리사 법당 중수기(1876년)”에 따르면 도리사에는 금당암(극락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극락전은 1870년에 중건된 경복궁 근정전의 공포 구성 양식과
매우 근접한 형식을 갖춘 조선시대 후기말 건축의 특징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극락전(極樂殿) 현판

 

 

 

 

 

극락전 목조 아미타여래좌상(경북문화재자료 제314호) 

1600년에 만들어 개금(改金)한 것으로 높이129cm, 견폭61cm, 슬폭93cm이다.

몸에 비해 머리가 크며, 평면적이고 네모진 넓은 얼굴이 당시 불상 조각의 양식을 엿보게 한다. 머리에는 낮은 나발(螺髮)에 작은 육계를 갖추었다.

양미간(兩眉間) 중앙에는 작은 백호(白毫)가 있으며, 이목구비(耳目口鼻)가 정연하다. 양팔에 걸친 통견의(通肩衣)는

양무릎을 덮고 있으며, 가슴아래 군의(裙衣)는 띠매듭 대신 앙연문상(仰蓮文狀)의 옷자락을 새긴 것이 특징이다.

 

극락전 목조 아미타여래좌상

 

극락전 목조 아미타여래좌상

 

극락전 목조 아미타여래좌상 오른쪽의 탱화

 

극락전 목조 아미타여래좌상의 왼쪽 탱화

 

도리사 삼층석탑(보물 제470호)

화엄석탑이라 부르는 이 삼층석탑은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 같은 유형을 찿아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로 조성되었다.

얆은 지대석을 놓고 장대석을 세운 기단을 만든 위에 판석으로 갑석을 삼고 그 위에 모전 석탑처럼 작은 석재로 쌓아 탑신부를 구성 하였으며, 윗 부분은 노반 위에 연꽃이 조각된 보주를 얹어 놓았다.

 

 

 

도리사 불량답(佛糧畓) 시주질비(施主秩碑)

 

아도화상 좌선대

 

도리사 불량답(佛糧畓) 시주질비(施主秩碑) 밀 아도화상(阿道和尙) 사적비(事蹟碑)

 

아도화상 좌선대

 

 

도리사 전경

 

포대화상(布袋和尙)

당나라 명주 봉화현 사람으로 법명은 契此(계차)이다.

뚱뚱한 몸집에 얼굴은 항상 웃으며 배는 풍선 처럼 늘어져 괴상한 모습으로 지팡이 끝에다 커다란 자루를 걸러메고 다니는데, 그 자루 속에는 별별 것이 다 들어있어서 무엇이든 중생이 원하는대로 다 내어주어서 포대스님이라고 불렀다.

무엇이든 주는대로 받아먹고 땅을 방바닥으로 삼고 구름을 이불 삼고서 어느 곳에서든지 벌렁 누워 태평하게 코를 골며 이마을 저마을 돌아다니면서 세속사람들과 같이 차별없이 어울리면서 길을 가르치고 이끌었다.

연꽃과 같은 삶이었다. 그는 자연과 더불어 자고 깨었으며 자연과 더불어 행하였고 대자연으로 돌아간 걸림없는 대자유인이었다."천백억으로 몸을 나누어도 낱낱이 참 미륵일세 항상 세인에게 나뉘어 보이건만 아무도 미륵임을 아는 이 없네" 게송을 남기고 반석위에 단정히 앉은채로 입적하였다.

 

 

태조선원(太祖禪院)

태조선원은 정면 7칸, 측면 8칸의 ㄷ자형 건물로서, 크기는 총 50평이다. 내부에는 후불탱(1931년)을 봉안하였다.

스님들이 참선하는 곳으로 성철스님도 이 곳에서 수양을 하셨단다. 

 

 

 

태조선원(太祖禪院) 현판

 

도리사(桃李寺) 현판 모습..태조선원 현판과 나란히 있다

 

태조선원(太祖禪院) 측면 마루 모습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17세기 전반에 조성된 세존사리탑은  석종 모양의 부도로 전체 높이 162cm탑신 높이 102cm이다. 도굴로 인해 계곡에 방치된 것을 경내로 옮겨 복원하던 중 (1977년) 금동육각사리함과 세존진신사리1과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며, 총 7평이다.

내부에는 칠성탱을 중심으로 좌우에 독성탱과 산신탱, 그리고 아도대화상진영(阿道大和尙眞影)을 봉안하였다.

 

 

 

 

범종각(梵 鍾 閣)

종각은 일반적으로 범종. 법고. 묵어.  운판을 걸어놓고 의식 때마다 소리를 내어 삼계의 미물들 까지 고통에서 벗어날수 있도록 하는 전각이다. 도리사의 범종은 2005년에 건립 정면1칸, 측면 1칸 규모와 사모지붕 건물로 현재 사물 가운데 범종만 봉안되있다.

 

 

 

 

아도화상 좌상

아도는 중국 위나라 아굴마의 아들로 일명 묵호자라고도 한다.
신라 19대 눌지왕때 19세의 나이로 어머니 고씨도령의 명에 따라
고구려로부터 신라에 불교를 전하기 위해 몰래 들어왔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이미 불교가 전파된지 오래이나 오직 신라만은 고유의 신앙과 왜래 문물에 배타적이어서 불교 포교에 대한 박해가 심했던 까닭이다.

그는 묵호자란 이름으로 지금의 선산군 도개면 도개동에 와서 앞서말한 모례의 집에 숨어서
낮에는 우곡에서 소와 양을 기르는 목동이 되고 밤에는 많은 사람을 모아 불법의 자비로운 진리를 강론하기를 3년이나 계속하였다. 그때 중국 양나라에서 사신으로 하여금 신라에 향을 예물로 보내왔으나 그 사용 방법을 아는 사람이 없어 걱정 해오던 중 모례가 아도에게 물으니 그것을 불에 태우면 향기가 그윽하여 신성 하기가 이를데 없고 소원을 말하면 반드시 영혐이

있는 법이다.신성이란 참에 지나는 것이 없다.삼보란 불타,달마,승가 즉 부처님의 가르침이시라고 일러 주었다.

그때 나라에서는 성곡 공주가 큰 병이 들어 여러 의원을 불러 온갖 약을 써 보았으나
효험이 없고 날이 갈수록 병은 더해갔다. 마지막으로 아도에게 치료를 청하니 아도는 향을 피우고 불공을 들였다. 그러자 신통하게도 공주는 병이 완쾌 되었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아도에게 큰 상을 내리고 흥륜사 등 일곱개의 절을 지어 주었다 한다.

그러나 왕이 승하한 후 불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 아도는 금수굴(金水窟)이라는 것에 들어가 숨었다. 이 굴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는 굴이었으나 아도가 들어간 후 불가에서 불공을 드리는 날이면 등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고 한다. 비록 아도의 포교는 성공하지 못했으나 그 공적은 크다.

 

 

 

 

적멸보궁 (寂滅寶宮)

1977년 세존 사리탑에서 발견된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사리탑을 새우고

불사리 예배소인 寂滅寶宮(적멸보궁)을 1982년에 주지 法燈和尙 (법등화상)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적멸보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에 총 19평이다

 

 

적멸보궁 (寂滅寶宮)앞의 천진동자불

 

적멸보궁 (寂滅寶宮) 측면모습

적멸보궁 (寂滅寶宮) 측면모습

 

극락전과 삼층석탑 모습

 

 

적멸보궁 (寂滅寶宮) 뒤의 釋迦世尊舍利塔(석가세존사리탑) 모습

적멸보궁 뒤편에 있는 석가세존사리탑은 1977년 세존사리탑에서 발견된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1987년에

법등화상이 조성한 것이다

높이8m로 八角 圓堂形 浮屠(팔각원당형부도)를 본 따서 정방형 지석대 위에 팔각 석탑을 세웠는데 기단에는 용을 조각하고 탑신에는

사천왕상을, 상륜부의 귀꽃에는 여래상을 조각하는 등 전체적으로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적멸보궁 (寂滅寶宮) 뒤의 사리탑 모습

 

적멸보궁 (寂滅寶宮) 뒤의 사리탑 모습

 

팔정도(八正道)

 깨달음 열반으로 이끄는수행 올바른 여덟 가지 . 정견(), 정어(), 정업(), 정명(), 정념(), 정정(), 정사유(), 정정진(). 팔성도() 이른다.

 

법성계(法性戒)

신라의 고승인 의상조사께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을 요약(要約)해서 그 진수(眞數)만을 모아 칠언절구(七言絶句)로 30구절(句節)총 210자로 지은 경구(經句)이다. 해인도라고도 한다.

 

 

 

<도리사 전경>

 

 

 

 

 

 

 

적멸보궁에서 바라 본 광경

 

 

 

 

 

적멸보궁 (寂滅寶宮), 범종각 입구에 위치한 안내도

 

 

 

주차장에서 바라본 도리사 전경

 

주차장에서 바라본 광경

 

주차장에서 바라본 광경

 

도리사 여행을 마치고 나오다가 만난 일주문....마지막이 아니고 다시 찾아오라고 서산의 해가 길을 안내해 주고 있다

출처 : 어린왕자의 들꽃사랑마을
글쓴이 : 淸溪 이주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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