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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무형문화재 제 77호 방짜유기장 이봉주 

맑은물56 2011. 8. 10. 15:12

중요무형문화재 제 77호 방짜유기장 이봉주
세계가 인정한 명품 납청유기, 청와대 만찬 때 사용하기도
[126호] 2010년 08월 30일 (월) 00:00:00 이아름 기자 allang20@mjknews.com

 

↑↑ 방짜유기장 이봉주 선생.

ⓒ 정경뉴스

[정경뉴스]방짜유기는 현대과학으로도 풀리지 않는 신비의 그릇이다. 독성이 없고, 항균·살균 효과가 탁월해 생명을 살리는 ‘신비의 그릇’이라고도 하고 일명 양대유기라고도 불린다. 구리와 주석 비율을 78대22로 섞어 만든 방짜유기는 제작 기법에 따라 방짜, 주물, 반방짜 등으로 나뉜다. 특히 평북 정주군 마산면의 납청 지역은 예부터 널리 알려진 양대유기(방짜유기) 제작지로 국내 유기 산지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으로 꼽힌다.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기능보유자 이봉주 선생(84)이 그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납청유기는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 방한 때 청와대 만찬에 사용되기도 했으며, 세계 최대 타악기 회사인 질리안에 의해 기술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이봉주 선생은 조선시대부터 대대로 내려온 납청유기의 명맥을 잇기 위해 평생 유기 제작에 전념해 왔다. 유기에 대한 자세한 유래를 듣기 위해 경북 문경시 가은읍에 자리한 납청유기촌을 찾았을 때 굵은 비를 내리고 있었다. 팔순이 넘은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한 이봉주 선생은 휴일도 잊은 채 공방을 지키고 있었다. 악수를 건네는 그의 손은 오랜 작업으로 인해 굳은살이 두껍게 박여 있어 매우 거칠고 상처 투성이였지만 그 어떤 손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최고가 아니면 만들지 않는다
국내 유일의 방짜 유기장인 이봉주 선생은 1948년에 월남한 이후 지금까지 납청유기 연구·계승을 위해 고집스럽게 한 길만을 걸어 왔다. '최고가 아니면 만들지 않는다'는 사명감으로 만든 납청유기는 유기 가운데에서도 품질이 가장 우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조지 W 부시 미국 전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그가 만든 납청유기가 청와대 만찬에 사용됐으며, 그 뒤 청와대의 요청에 따라 같은 형태의 식기 두 벌을 제작하기도 했다. 또한 국내 굴지의 몇몇 기업에서는 외국인 초대 행사에 납청유기로 식사를 대접, 찬사를 받아 해외 바이어들의 주문량도 늘고 있다. 현재 유기 부문에서 무형문화재로 선정된 인물은 이봉주 선생(방짜)을 비롯해 경기도 안성의 김근수(주물) 선생과 충남 보성군 벌교의 윤재덕(반방짜) 선생이 있다.

 

 

 

↑↑ 납청유기촌에서 제작된 유기 제품들.

ⓒ 정경뉴스

 

한편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장인정신으로 제품을 만들어 온 이봉주 선생은 실력을 인정받아 1981년 제6회 전승공예전에 입선한 이래 각종 공예공모전에서 수많은 상을 받았다. 1983년에는 대한민국 무형문화재 제77호 방짜유기장으로 지정받아 대한민국 최고 명인으로 이름을 알리게 됐다.
이 밖에도 평생 제작하고 수집한 유기 1480점을 대구방짜유기박물관에 기증했다. 그는 “우리의 유기 제작 기법이 과학기술 문명에 밀려 사라져 가는 것이 안타까워 조상들이 사용한 방짜 유기제작 기법을 계승시키기 위해 기록으로 남긴 것”이라고 기증 이유를 설명했다.
유기는 성분 비율에 따라 다르다. 구리와 주석을 78대22 비율로 합금해 만든 놋그릇은 방짜유기, 구리와 아연을 합금해 만든 그릇은 황동유기, 구리에 니켈을 합금해 만든 그릇은 백동유기라고 한다.

방짜유기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제작된다. 주물유기는 두 사람 또는 소수의 인원으로 제작이 가능하지만 방짜유기는 용해, 네핌질, 우김질, 냄질, 닥침질, 제질 및 담금질, 벼름질, 가질 등 순으로 만든다. 공정 과정이 워낙 복잡해 많은 인력과 숙련된 기술자들을 필요로 한다. 그러다 보니 보통 7명에서 11명이 한 팀을 이뤄 작업을 진행한다.
머저 도가니에 열을 올린 다음 구리(78%)와 주석(22%)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배율을 맞춰 섞어 1200도가 넘는 온도에 끓여 녹여 낸다. 녹인 쇳물을 물판에 부으면 바둑 모양의 둥근 합금 덩어리가 나온다. 그 모양이 바둑알 같다고 해서 ‘바둑’ 또는 ‘바데기’라고 부른다. 성형 재료인 바둑이 나오면 소나무 숯으로만 불을 지펴 다음 작업에 들어간다. 보통 11 명이 한 조가 되어 바둑을 불에 달구고 망치로 치는 과정(네핌질)을 되풀이해 가며 얇게 늘려낸다. 얇게 편 판은 여러 장 겹쳐 우김질로 틀을 만들면 우묵한 그릇의 틀이 잡힌다. 이를 당기며 쳐 늘리는 작업인 닥침질이 끝나면 간수를 발라서 물에 담갔다가 내어 완제품에 가까운 형태로 완성시킨다. 담금질을 하게 되면 놋쇠 특유의 성질이 나타난다. 담금질을 하고 나면 놋쇠의 경도와 인성이 낮아져 질이 연해진다. 한편 담금질 과정에서 모양이 다소 꼬이거나 비틀어지는 등 변형이 일어나 이를 벼름질을 통해 바로잡아 준다. 마지막 과정인 가질에서는 벼름질이 끝난 재료에 산화 피막이 형성되고 흠 같은 것이 난 것을 제거해 놋쇠 특유의 색이 나오도록 전체 또는 그 일부를 깎아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방짜유기는 완성된다.

신비의 놋그릇 '방짜'
예부터 음식을 담는 반상기로 쓰인 방짜유기는 독성이 없고, 항균·멸균 효과가 뛰어나며, 농약 성분을 가려 주는 역할을 한다. 미나리나 야채를 씻을 때 놋성기에 담가 두었다가 씻으면 거머리나 벌레 등이 죽거나 도망가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한편 경기도보건환경연구원이 200ℓ들이 횟삼 수족관에 놋그릇이나 놋수저의 재료인 놋쇠판을 넣은 뒤 약 40시간이 지나자 생선에서 비브리오균이 99.9% 제거됐고, 조개류에 잠복해 있는 비브리오균도 48시간 뒤에 90%가 사라졌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처럼 선조들의 지혜가 엿보이는 놋쇠는 인체에 해가 없고 독을 죽인다고 해 오래전부터 일상생활에 귀하게 쓰였다. 좋은 놋쇠는 특유의 성질을 지닌다. 시계태엽과 같이 휘청휘청해도 휘어지거나 잘 깨지지 않으며 쉽게 찌그러지지도 않는다. 작업을 하다가 실수로 불에 달궈진 놋쇠에 데거나 예리한 부분에 베어도 쇠 독이 오르거나 덧나지 않는다. 실제로 이봉주 선생도 작업 도중에 놋쇠 파편이 튀어 한쪽 눈을 잃었다. 그는 “방짜쇠가 아닌 다른 쇠였다면 어떻게 됐을지도 모른다”면서 “방짜에 독이 없기 때문에 그나마 이 정도”라고 전했다.

 

 

↑↑ 납청유기촌에서 직원들이 완제품들을 손질하고 있다.

ⓒ 정경뉴스

이처럼 놋쇠는 인체 친화력이 좋아 스님들이 삭발할 때 사용하는 삭도도 방짜로 만들었으며 놋쇠 제품 가운데 수저와 그릇은 예부터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독상 방지용으로도 사용됐다. 현재는 사용 용도와 기능이 점차 다양해지면서 식기뿐만 아니라 생활용품과 타악기 등으로 제작되고 있다. 요즘은 현대인들의 취향에 맞춘 놋제품도 새롭게 선보이고 있다. 납청유기촌에서도 흐름에 맞춰 다양한 제품 생산에 주력하고 있다.
“요즘은 문화상품이라 하여 티스푼이나 나이프·포크·원앙식기세트 등의 주문량이 늘었고, 핵가족이나 싱글족이 느는 추세를 고려해 현대인들의 기호에 맞는 식기를 제작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차를 즐기는 차인이 늘면서 녹차잔, 다도잔, 귀대접 등도 많이 찾고 있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놋쇠 제품 가운데에는 전통 국악기가 있다. 대표적인 방짜 악기로는 징을 비롯해 꽹과리, 좌종, 곰보종, 운라, 바라 등이 있다. 특히 악기의 소리를 제대로 내는 ‘울음잡기’의 명수인 이봉주 선생의 작품은 김덕수 사물놀이패를 비롯해 내로라하는 국악 연주가들이 애용하고 있다. 또한 미국에 있는 세계 최대 타악기 회사인 질리안에 의해 기술력을 인정받으며 명실상부 최고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이 밖에도 이봉주 선생이 1994년에 제작한 지름 161cm, 무게 98kg의 세계 최대 크기의 특대징은 현재 대구방짜유기박물관 입구에 전시돼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지금이 가장 행복해
1926년 평안북도의 납청에서 30리 떨어진 시골에서 태어난 이봉주 선생은 농사일이 유일한 직업이던 시절 유기행상을 하는 어머니를 따라 납청유기공장에 자주 들르면서 유기장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1948년에 월남한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납청 사람이 운영하는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 위치한 방짜유기공장에 들어갔다. 특유의 성실함과 추진력으로 다른 사람은 10년 걸려도 되기 힘들다는 원대장(방짜 제작 총괄 지휘자) 자리를 18개월 만에 따냈다. 그는 이 일을 시작한지 10년 만인 1958년에 서울 구로동에 방짜유기공장을 설립했다.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땔감이 연탄으로 바뀌던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점점 쇠락해져 갔다. 사람들은 연탄이 내뿜는 일산화탄소에서 나오는 독성으로 인해 검게 변색되는 방짜유기가 귀찮다는 이유로 외면하고 플라스틱이나 스테인리스, 알루미늄 그릇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결국 공장 문을 닫을 수밖에 없게 된 그는 유기 공장을 떠나 생계를 위해 거리로 나왔다. 공사판의 허드렛일부터 호떡장사까지 마다하지 않으면서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갔지만 유기 만드는 연장만큼은 버리지 않았다. 1978년에 그동안 번 돈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안양에 다시 공장을 열었다. 우여곡절 많은 삶이었지만 납청유기의 맥을 끊을 수 없다는 그의 장인정신이 있었기에 지금의 납청유기가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일을 하지 않으면 몸살이 난다. 일 할 때가 즐겁고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앞으로도 방짜유기 전통 계승을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겠다.” 이봉주 선생은 여든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은 해야 한다”며 쉬지 않고 투지를 불사르고 있다. 장인은 결코 한순간의 노력으로 탄생되지 않음을 장인의 얼굴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글·이아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