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깊이 / 김사인
<유진의 시읽기> 풍경의 깊이 / 김사인
☛ 서울일보/ 2010. 6.5.(토요일)자
詩가 있는 풍경
풍경의 깊이
김사인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바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외로운 떨림 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 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시 읽기◆
「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바르르 떠는데....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 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읽으면 읽을수록 고요하게 깊어지는 詩다.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도 무수한 생명이 살고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작은 생명들의 무수한 떨림들... 그 작은 떨림 들로 인해
우주의 한 때가 저물고 또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무수한 생명들의 그 의외로운
떨림 들로 해서 생의 한순간 순간이 깊어지는 것이다.
사람 또한 어떤 사건, 어떤 한 생각을 일으키고 잠재우고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오욕칠정으로 인한 크고 작은 떨림들..... 그 의외로운 떨림을 반복하는 사이에
점점 사람은 깊어지는 것이다.
무엇과 무엇, 어디서 어디까지가 경계일까? 세상의 어떤 것도 모두 고리를 물고
연결되지 않는 것이 없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와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
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다.
이는 지극히 작은 생명에서부터 거대한 우주의 흐름까지 생명의 순환, 생명의 깊
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풍경처럼 스쳐가는 가운데에 살아가는 찰라적 순간적
존재, 모든 생명들의 순환, 끊임없는 진화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바람 부는 저녁, 바르르 떨고 있는 키 낮은 풀들에서 고요하게 진행되는
우주적 순환을 보고 있는 것이다.
유 진/ 시인, 첼리스트<선린대학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