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매창 그는 누구인가
매창의 출생과 관련하여 다양한 기록들이 있으나 매창집의 발문에 따르면 매창은 1573년에 출생해서
38세를 살고 1610년에 세상을 떠난것으로 나와있다.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 시인으로 평가받는 매창은 1573년(선조 6년) 부안현의 아전이던 이탕종(李湯從)의 서녀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가 계유년이었기에 계생(癸生), 또는 계랑(癸娘)이라 하였으며, 향금(香今)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 부안 군청뒤 성황산 서림공원에 올랐다. 인천의 자유공원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곳이다.
서쪽의 변산과 김제평야를 보려했으나 빗속에 가려서 볼수가 없었으나 그래도 이매창이라는 이름석자는 뚜렸이 떠오르고 있었다.
부안의 진산 상소산 기슭의 서림공원에 오르면 매창의 시심과 문학정신을 기리는 시비 (詩碑)가 있다. 서림공원은 본래 부안현감의 관사인 선화당의 후원 일부라고 하며 매창이 관아에 들어오면 자주 거닐던 곳이라고 전한다. 또 매창시비 오른쪽에는 ‘금대(琴臺)’ 라고 새겨진 커다란 바위가 있으니 매창이 자주 앉아 거문고를 뜯던 곳이고, 매창시비 왼 쪽에는 혜천(惠泉)이라는 샘터가 있으니 또한 매창이 즐겨 마시던 샘이라고 한다. (참고: 매창공원은 읍내 한가운데에 있다)
계생은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으며, 시문과 거문고를 익히며 기생이 되었는데, 이로 보아 어머니가 기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기생이 되어 그는 천향(天香)이라는 자(字)와 매창(梅窓)이라는 호(號)를 갖게 되었다. 조선시대 여성들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당호(堂號)를 가진 귀족 여성, 이름만 있는 기생들이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이름, 자, 호까지 지니며 살았던 것이다.
시집 매창집은 매창이 직접 편찬한 것이 아니고 매창이 죽은 이후 아전들의 입을 통해 전해 내려오던 것을 매창이 죽은 후 60여년 후에 매창이 생전에 자주 찾아 마음을 다스리곤했던 개암사에서 목판본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원하는 이가 너무 많아 절의 재정이 바닥날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목판을 불살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올 만큼, 부안 사람들은 그녀의 시를 아끼고 사랑했던 것이다.
규장각본 가곡원류에 실려있는 "이화우"
梨花雨 흣날릴 제 울며 잡고 離別한 님
秋風落葉에 져도 나를 생각는가
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쾌라.